◈ [62화] 합류 (1)
원래 하려던 야영은 갑자기 나타난 에단 때문에 접어야 했다.
“……평화가 끝났네.”
휴고가 음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에단이 마차의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아쉬워?”
“아, 아닙니다.”
“아쉬우면 말해. 다시 보내 줄 테니까.”
“어디로요?”
“궁금해?”
에단의 섬뜩한 미소에 휴고는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늘 안에 일을 다 끝내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페르나니엄 자치령.
용병의 도시이자 무역의 도시.
자유를 표방하는 도시로 유명했다.
비록 공권력은 없다시피 한 무법 지대라고 볼 수 있었지만, 독자적인 규율이 질서를 만들었다.
누구보다 거칠게 사는 용병들이 세운 힘의 율법.
그 율법은 고압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덕분에 확실한 강제력을 가졌다.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그 구조부터가 일반적이지 않았다.
상인들이 모이면서 많은 돈이 돌기 시작했고, 돈 냄새를 맡은 용병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상인들도 용병들을 거부하지 않았다. 상행의 안전을 위해서는 용병이 필요 불가결했기에.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도시는 발전했다.
빠른 성장 탓에 부작용도 따랐지만, 그를 뛰어넘는 장점 때문에 페르나니엄 자치령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확실히 활기가 넘치는 도시네.”
“와, 해가 떨어졌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신기하네요.”
휴고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상인들의 호객 행위와 길가에서 술을 마시고 연초를 태우는 용병들.
신선한 분위기였다. 무질서함 속에서도 나름의 질서가 있었다.
상인들은 에단 일행을 힐긋거리며 주시하고 있었다.
‘호구를 노리는군.’
에단 일행의 분위기가 딱 그랬다.
초짜 여행객.
유희를 즐기는 귀족이거나 갓 자립한 초보 행상인.
한마디로 빼먹기 좋아 보이는 먹잇감이었다.
에단이 봐도 그랬다.
앳돼 보이는 기사 둘에 어벙한 외모의 여자 하나, 그리고 나이 든 중년.
‘좋은 먹잇감이 따로 없군.’
그렇다고 블란테임을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
경계심을 주는 편보다는 호구 잡히는 게 나았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렸다. 지금부터는 직접 훑어볼 생각이었다.
인파가 북적였다. 에단이 마차에서 내리자, 호객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적어졌다.
“뭐지?”
“도련님 인상이 안 좋아서 그런 거 아닐까요?”
해맑은 휴고의 대답에 에단이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내가 인상이 더럽다고?”
“조금……. 정확히 말하면, 잘생겼는데 다가가기 힘든…….”
― 딱 맞는 말이구나. 너는 거울도 안 보고 다니더냐.
휴고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에단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인상이 안 좋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인상이 거칠어도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용병을 상대로도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에단을 기피하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짜증이 난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자, 그나마 접근하던 상인들도 몸을 돌렸다.
에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단의 인상이 날카로운 편이기는 하였지만, 싸움터에서 구른 용병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이 에단을 멀리하는 이유는, 에단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 몸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피어 때문이었다.
블랙 오우거는 몬스터 중에서도 마수에 가까운 존재였다.
영물이나 신수와는 질이 달랐다. 그것들보다 더 포악하고 사나운 기운이었다.
‘뭐, 덕분에 편해지긴 했네.’
에단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때 에단을 향해 접근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앳된 외모의 소녀였다. 소녀는 당찬 발걸음으로 에단을 향해 다가왔다.
“여행객이신가요? 혹시 아직 쉴 장소를 찾지 못했으면 저희 여관으로 오세요!”
에단이 말없이 눈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주근깨가 있는 얼굴과 갈색 머리를 한 소녀.
에단을 마주했음에도 소녀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음식은?”
소녀의 용기가 마음에 들어 끌리기는 했지만, 음식은 중대 사항이었다. 그들에겐 편한 잠자리보다 질 좋은 음식이 우선이었다.
“맛도 양도 최고입니다! 자신할 수 있어요!”
소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에단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내해.”
* * *
뜻밖의 인연으로 머물 장소가 정해졌다.
에단 일행은 소녀가 안내하는 장소로 향했다. 번화가에서 조금 동떨어진 장소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긴 세월이 엿보이는 간판에는 ‘질긴 가죽’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용병단 같은 이름이군.”
“여관 주인분이 용병 출신이라 그래요! 겉은 투박할지 몰라도 내부는 나름대로 깔끔하답니다.”
“그래, 기대하지.”
“넵, 말과 마차는 제게 맡기세요.”
소녀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하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에서 내린 가토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고삐를 건넸다. 소녀가 작은 손으로 고삐를 쥐고는 능숙하게 말을 이끌었다.
그걸 본 가토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휴고를 슬쩍 바라봤다.
“누구보다 쟤가 더 나은 것 같은데?”
“……시끄러워.”
휴고는 여전히 말과 친해지지 못했다.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가 은은하게 전해졌다.
문을 열 때 나는 투박한 소리에서조차 적지 않은 세월이 느껴졌다.
“어서 오세요.”
상당한 풍채의 중년 여성이 일행을 맞이했다.
네이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곳 주인이십니까?”
네이드의 물음에 중년 여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하, 허름하지만 제가 주인입니다. 방이 필요하신가요?”
여주인의 물음에 네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머무를 생각입니다. 객실을 좀 여유 있게 쓰고 싶습니다만…….”
“운이 좋네요. 때마침 머무르던 용병들이 떠나서 방이 비던 참입니다.”
“그럼 준비해 주시죠. 식사는 가능한가요?”
“그거야 당연하죠.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여주인의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 네이드가 힐긋 뒤를 바라봤다.
“……종류는 상관없으니까 넉넉하게 준비해 주시죠.”
“하하, 배가 터질 정도로 준비해 드리죠. 숙박비랑 식비까지 총 20실버입니다. 참고로 우리는 선불로만 받아요.”
네이드가 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서 건넸다. 여주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금화는 오랜만이네요. 거스름돈은 시간이 좀 걸릴 텐데, 괜찮습니까?”
“상관없습니다. 음식부터 준비해 주시죠.”
“이해해 줘서 고맙네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여주인이 주방 안으로 들어가자, 일행은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주인이 용병 출신이라길래 남자일 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네요.”
“그래도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쭤볼 게 있습니다.”
“말해 봐.”
“갑자기 급히 서두르시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애초에 정보라면 가문의 힘을 이용해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걸로는 부족해.”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네이드가 입을 열었다.
“세력을 만드시려는 겁니까?”
네이드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원래라면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에단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모르지.”
“…….”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가문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에단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입지를 다진 상태였다. 에단이 독자적인 세력을 꾸려 무언가를 모의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이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헨리가 입을 열었다.
“덩달아 용병들도 찾고 있는 것 아니었나요?”
“어, 붉은 곰.”
“들어 본 적 있어요. 최근 들어 이름을 알리고 있는 신생 용병단으로 꽤나 실력이 있다고…….”
“찾는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있으니까 찾지.”
일행은 설명을 원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구체적인 대답을 하기가 애매했다.
‘붉은 곰은 레벨린의 수하였고, 레벨린의 발을 자르기 위해서 붉은 곰에게 접근한다.’
정보의 출처부터, 설명하기 곤란한 것들이었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그때 말과 마차를 데려갔던 소녀 종업원이 들어왔다.
“헤헤, 금방 왔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음식은 금방 나와요!”
종업원이 후다닥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안에서도 발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당히 활기찬 아이네요.”
휴고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업원 소녀는 작은 덩치로 큰 접시를 가뿐하게 옮겼다.
넓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먹음직한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다.
일행이 식사를 시작했다. 아이가 자신만만해하던 것처럼 음식은 확실히 맛있었다.
밖에서 먹던 네이드의 요리도 분명 훌륭했지만, 노상에서 먹는 음식과 편안한 자리에서 먹는 음식에는 확실한 차이가 존재했다.
“헤헤, 제가 장담했죠?”
음식을 빠르게 먹어 치우는 일행을 바라본 아이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기대한 보람이 있네.”
“제가 과장은 좀 해도,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아요. 페르나니엄은 처음인가요?”
“티가 많이 나나?”
“네, 완전요. 혹시 귀족이라거나 높은 분은 아니시죠?”
“왜 그것도 티가 나나?”
에단의 장난기 어린 대답에 소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귀족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딱히 걱정한 건 아니에요. 페르나니엄에서는 귀족이라도 똑같은 외지인이니까요. 귀족이 아니면 있는 집 자제인가요? 상인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궁금한 게 많나 보군.”
“헤헤, 한창 그럴 나이라서요.”
천연덕스러운 대답이었다. 에단이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그냥 여행객이라고 생각해. 여기에는 찾는 사람이 있어서 온 거고.”
“찾는 사람이요? 누구요? 상인? 용병?”
“용병. 혹시 들어 본 적 있나? ‘붉은 곰’ 용병단이라고.”
“붉은 곰이요? 의뢰 때문에 찾는 건가요?”
“어, 의뢰를 맡기려고.”
“하지만 소문을 듣기로는 되게 위험한 사람들이라고…….”
불안한 듯 보이는 소녀의 말에 휴고와 가토가 눈을 끔뻑였다.
‘제일 위험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모든 일을 지켜봤다.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어떻게 죽이는지.
모룬과의 결투에서 어떻게 모룬을 제압하는지.
에단이 아카데미에서 온 교수를 어떻게 박살 내는지.
그리고 아카데미를 지키던 문지기를 어떻게 손보는지.
그 장면들은 떠올리기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붉은 곰 용병들이 얼마나 악명 높은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히 에단의 손속에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네. 걱정해 줘서 고맙다.”
에단이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행이 먹던 손을 멈추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태도가 상당히 어색했던 것이다.
‘왜 자상해?’
‘아니, 뭘 잘못 먹었나?’
소녀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헤헤, 아니에요. 손님인데 당연하죠.”
“그래, 이름은?”
“다비입니다.”
씩씩한 대답에 에단이 품에서 금화를 하나 꺼내 건넸다.
“이놈들 데리고 동네 구경이나 시켜 줘.”
에단이 네이드를 포함한 일행들을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기자 네 사람은 당혹스러워했다.
당황하기는 다비도 마찬가지였다. 예상 못 한 거금을 손에 쥔 다비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큰돈은.”
“무슨 소리야. 거스름돈은 들고 와야지.”
에단의 대답은 단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