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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57화 (57/398)

◈ [57화] 평민 교수 (1)

음식을 받아 온 에밀라가 에단의 앞에 앉았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다시 음식을 입에 넣기 시작했고, 에밀라도 수저를 들었다.

둘 사이에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음식을 밀어 넣는 에단에게서는 기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접시 위에 가득 쌓여 있던 음식이 비워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식사를 마친 에단이 자리를 일어났지만, 에밀라의 식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밀라의 눈이 에단을 따라가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왜? 너 밥 먹는 것도 기다려 줄까?”

“……히허어스니다.”

음식을 머금고 있는 에밀라의 발음이 뭉개졌다. 순간 에밀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에단은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다가 씨익 웃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아, 내 방은 몇 번이지?”

계단을 오르던 에단이 물었다. 입에 머금은 음식을 삼킨 에밀라가 말했다.

“……4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알겠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다 삼키고 말해.”

“당신……!”

에밀라가 발끈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에단은 무시하고 방으로 향했다.

숙소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호화스럽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웬만한 여관보다는 나았다.

에단이 짐을 풀었다. 사실 짐이랄 것도 없었다.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으니까.

대강 짐을 정리한 에단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군.’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주인공도 슬슬 활동할 시기였다.

지금껏 머릿속으로 세운 계획을 정리할 때였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원작 주인공과의 접점을 만들고, 사건 속에서 에단이 필요한 것을 취할 수 있었다.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안일하게 있을 수는 없지.’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에단이 경각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에단도 자신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게 된다.

‘문제는 주인공이 가져가는 기연들이 줄어든다는 건데…….’

원작 스토리는 주인공의 원맨쇼나 다름없었다.

전형적인 이세계물의 스토리.

주인공은 세계를 구원할 구원자이자, 용사였다.

하지만 에단이 개입한 이상, 주인공의 성장세는 한풀 꺾일 수밖에 없다.

‘내가 뒈질 수는 없으니까.’

양보나 희생 따위는 가정해 두지도 않았다. 설사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에단은 자신의 사람들을 챙겨 끝까지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주인공에게 협조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주인공이 가져갈 힘이 줄어든 만큼, 에단이 도움을 줄 생각이었다.

‘어디 한번 보자고.’

답답하게 굴면 가만 있지 않을 생각이다.

에단이 눈을 감았다. 밤이 깊어졌다.

* * *

크러쉬는 자신의 방에 누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결같이 아름다운 에밀라.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평민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을 하고 나서야 겨우겨우 에단이라는 이름을 떠올려 냈다.

‘불결해, 천박하고, 상스러워.’

에밀라 옆에 서 있었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감히 평민 따위가 에밀라 씨 옆에 서? 그녀의 옆에 서려면 블라디미르 가문 정도는 돼야지. 나 정도는 되어야…….’

블라디미르 가문의 삼남인 크러쉬.

그의 가문은 마법 가문이었다. 하지만 크러쉬의 말과는 다르게 블라디미르 가문 자체의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가문의 역사는 깊었지만, 대마법사를 배출하지 못한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마탑은 우후죽순 생겨났고, 대륙에서 이름을 날리는 마법사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뛰어난 마법사는 어딜 가서든지 대접을 받았지만, 크러쉬는 그 정도로 재능을 뽐낼 수 있는 마법사가 못 되었다.

그런 크러쉬에게 뜻밖의 제안이 왔다.

― 아카데미에서 학생을 지도할 생각은 없습니까?

처음에는 거절하려 했다.

저명한 마법사로서 이름을 떨치기도 바쁜데 교수 노릇이라니!

‘그때 수락하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이 훌륭한 재능을 썩힐 뻔했잖아. 게다가 에밀라 씨도 못 봤을 테고.’

형제들과 비교해도 그저 그런 재능을 가진 크러쉬는 그렇게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

마법사로서의 역량과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같지 않았다. 비록 마법 재능은 출중하지 않더라도, 크러쉬는 교육자로서 그리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삶에 회의적이던 크러쉬의 생각도 바뀌었다.

아카데미에서 교수 생활을 하며 크러쉬의 자신감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고, 자연스레 거만한 성격이 되었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성향을 지녔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평민을 혐오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그 빌어먹을 평민 놈……!’

유례없는 재능으로 대륙에 지대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평민 마법사. 수많은 마탑과 국가에서도 그를 영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크러쉬는 그를 실제로 마주한 경험이 있었다.

‘당신이 소문의 그 마법사입니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귀족인 자신이 먼저 손을 뻗어 인사를 청했지만, 그 평민 마법사는 말없이 크러쉬의 얼굴을 응시하다 자리를 떠났다.

명백히 자신을 무시한 행위였지만, 크러쉬는 그 자리에서 분노를 표출할 수 없었다.

그날 당한 모욕을 크러쉬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났다.

감히 평민 따위가. 평민은 예의 없고 더러운 종자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러던 차에 아카데미에 오게 되었다.

아카데미의 특성상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크러쉬는 그 사실에 불만을 품었다.

물론 그 불만을 대놓고 토로할 수는 없었다. 아카데미에는 귀족가의 자제도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의 교칙상 학생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수 없었다. 신분의 차이로 발생하는 차별과 억압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하나 규정이 모든 변수를 방지할 수는 없었다.

귀족가의 자제들이 형성한 카르텔은 아카데미 내에 엄연히 존재했다.

어릴 때부터 다져 온 사교 활동과 부모님들의 교류가 자녀들에게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크러쉬는 평민을 혐오했고, 당연하게도 신분에 따라 학생을 차별하는 교수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도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있었다.

‘에밀라…….’

에밀라의 신분은 비록 평민이었지만, 모든 학생이 에밀라를 존경했고 그만큼 잘 따랐다.

아름답고 고고한 외모와 출중한 실력.

아카데미의 꽃이라는 별칭이 무색하지 않았다. 늘 고고하게 행동하는 에밀라의 모습에 크러쉬의 마음도 흔들렸다.

평민은 미천하다는 신조가 흔들릴 뻔했지만, 그는 자신을 합리화해 문제를 해결했다.

‘에밀라 정도의 실력와 인성이라면 어딜 가도 작위를 수여받을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그 예로 대륙을 주름잡는 고위 귀족들도 앞다퉈 에밀라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에밀라는 어디서 어떤 제안이 오더라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모습에 크러쉬는 더욱더 그녀에게 마음을 주었다.

‘그녀야말로 내게 어울리는 여자야.’

비록 평민이라는 점이 흠이기는 했지만, 에밀라는 언제든지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는 특별한 평민이었다.

그 사실이면 충분했다.

에밀라를 향한 감정이 생긴 후로, 크러쉬는 에밀라에게 노골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러쉬의 구애에도 에밀라는 언제나 공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물론 크러쉬는 그걸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후후, 부끄러움만 없었으면 벌써 내 여자가 됐을 텐데. 그러면 조금 전 그 평민 놈 옆에 있지도 않았을 테고.’

일이 끝난 후, 방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건 그의 행복이었다. 한데 오늘은 에단이라는 평민이 신경을 거슬렀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들어와 버렸군.’

크러쉬의 머릿속에 각인된 에단은, 얼굴과 복장까지 모두 천했다.

혹시나 몰라 예를 갖추고 손을 뻗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하찮은 평민이었다.

‘제기랄, 더러운 기억이 떠오르는군.’

평민 마법사에게 악수를 청한 순간이 생각났다.

크러쉬는 냉수를 단번에 들이켜며 분을 삭였다.

‘그런 버러지를 배려하는 마음이라니. 에밀라 씨가 불쌍하군.’

에밀라를 향한 동정심까지 들었다.

‘초반부터 기를 잡아 둬야겠군. 직위는 같을지 몰라도 신분의 차이는 확실하니까 말이야.’

귀족임을 밝혔음에도 건방을 떨던 에단의 모습을 상기하자 절로 짜증이 났다.

‘내일 제대로 주제 파악을 시켜 줘야겠어.’

크러쉬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아침 해가 뜨자마자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일 층으로 향했다.

일 층으로 향한 에단은 곧장 음식을 배식받았다.

아침은 걸러서는 안 되는 끼니였다.

“좋은 아침입니다.”

“굉장히 부지런하시네요.”

배식원의 말에 에단이 주변을 둘러보니, 일 층에는 자신 혼자만 있었다.

에단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세 끼를 챙겨 먹는 것은 근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런가요?”

“네. 보통 아침은 거르시는 분이 많으니까요. 아, 한 분 꼬박꼬박 챙겨 드시는 분이 계시긴 한데…….”

“그게 누구죠?”

“마침 내려오시네요.”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침임에도 완벽하게 준비된 에밀라가 계단을 내려왔다.

“…….”

에밀라가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자, 에단이 손을 들었다.

“좋은 아침.”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는 않군요.”

에밀라가 에단의 곁에 다가와 음식을 받았다.

아침은 소박했다. 따뜻한 빵과 고기가 들어간 수프였다.

이번에도 역시 단백질이 부족한 식단이라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먹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수프의 풍미는 그윽했고, 빵은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웠다.

“의외로 끼니는 잘 챙겨 먹네?”

“……불만입니까?”

어제 일을 의식해서인지 에밀라가 입 안에 든 음식을 모두 삼킨 뒤 대답했다.

“그럴 리가. 끼니를 챙기는 건 중요하지. 잘하고 있어.”

“당신에게 칭찬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칭찬은 아닌데? 그래도 넌 나한테 졌잖아.”

“…….”

에밀라가 뾰족한 시선으로 노려봤으나, 에단은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덕분에 빠르게 식사를 끝낸 에단이 에밀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 뭘 하면 되지?”

“처음인 만큼 사수 곁에서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 배울 겁니다. 말로 설명한다고 한들 실제로 보는 것에는 못 미칠 테니까요.”

“뭐, 좋아. 그래서 내 사수가 누구지?”

“아직 정해지진 않았습니다. 정말 안타깝게도 제가 맡을 확률이…….”

“제가 맡도록 하죠.”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밀라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기름을 바른 것만 같은 특유의 목소리.

크러쉬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기품 있는 발걸음으로 에밀라의 앞까지 온 크러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때론 여인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아는 것도 귀족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크러쉬의 그윽한 시선이 에밀라를 향했다. 에밀라는 크러쉬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구태여 안 그러셔도 됩니다. 제가 해도 상관은…….”

“아니요. 그럴 수는 없죠. 평민 교수에게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고고한 신분을 가진 저, 블라디미르 크러쉬가 아니겠습니까?”

― 저 새끼, 그냥 죽이면 안 되겠느냐?

‘저도 고민 중입니다.’

처음에는 신선한 느낌을 받았지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졌다.

“설마 에단 씨가 제 호의를 거절하지는 않겠죠?”

“뭐, 그러도록 하죠.”

어디까지 하는지 볼 생각으로 크러쉬의 말에 답했다.

이윽고 에밀라는 먼저 따로 이동했고, 크러쉬와 에단은 같이 움직였다.

“제 수업에 참관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왜죠?”

에단의 발언에 크러쉬가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한 겁니까? 하, 우둔한 평민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도 귀족의 의무 중 하나겠죠.”

크러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다. 당연히 에단은 크러쉬의 말을 조금도 듣지 않았다.

‘오늘 중에 만나 보겠군.’

에단이 요청한 사항 중 하나가 바로 여동생이 있는 학급에 배정받는 것이었다.

지금은 크러쉬의 수업을 따라다니고 있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오늘 내에 주인공과 만날 수 있을 터였다.

‘만나 보면 알겠지.’

대략적으로 어떻게 행동할지는 생각해 뒀다.

크러쉬가 한참 동안 떠드는 걸 흘려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의실이 있는 본관 앞에 도착했다.

“이해하셨습니까?”

“네, 뭐.”

“우둔한 평민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우셨을 겁니다. 앞으로 잘 보고 배우면 되니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론 제 수업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느끼는 것은 있을 테니까요.”

“네, 노력은 하죠.”

에단이 웃음을 삼키며 크러쉬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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