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이해 못 할 행보
응접실을 나온 에단은, 가만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에밀라를 볼 수 있었다.
에밀라는 다소 복잡한 얼굴로 말없이 에단을 바라봤다.
“왜 거기서 멀뚱멀뚱 서 있어?”
“……무슨 말을 하셨습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 궁금해?”
웃음기 있는 에단의 목소리에 에밀라가 인상을 팍 구겼다.
“물어본 제가 바보군요.”
“별말 없었어. 근데 아마 너는 많이 혼날걸?”
“진짜입니까?”
“아니, 농담이야. 빨리 방이나 안내해 주지?”
“…….”
에밀라가 한 차례 에단을 노려보고 앞장섰다.
바깥에선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날이 저물었음에도 밖을 거닐고 있는 학생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통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헤헤, 알겠습니다. 그 혹시 옆에 계신 분은……?”
여학생이 에단을 바라보며 묻자, 에밀라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새로 오신 교수님입니다.”
“아, 진짜요? 반갑습니다!”
해맑게 인사하는 학생을 바라보며 에단이 대답했다.
“그래, 반갑다. 앞으로 잘 부탁하마.”
“헤헤, 이 시간에 같이 다니시길래 전 또 에밀라 교수님 애인인 줄 알았네요.”
여학생의 말에 에밀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네∼ 죄송합니다.”
에밀라의 타박에 머리를 긁적인 학생이 몸을 돌려 기숙사 쪽으로 총총 뛰어갔다.
“정말 학생한테 꽤나 인기 있나 보네?”
“그 말은 무슨 의미죠?”
“그냥 있는 그대로의 의미인데?”
“……교직원들 숙소는 이쪽입니다.”
교직원들의 숙소는 여학생이 뛰어간 기숙사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기숙사랑 가깝네?”
“위급 상황 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입니다.”
“직업의식이 꽤나 훌륭한걸.”
“교육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도 저희의 의무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규칙과 규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밀라는, 교수보다는 기사에 더 어울리는 성향이었다.
“그러는 애가 밤에 암살을 하러 잠입해?”
“…….”
에밀라가 할 말을 잃었는지, 시선을 회피했다.
숙소로 들어가자 상당히 고급스러운 내부가 보였다.
“남자 숙소는 2층입니다. 저희는 3층을 이용하고 있고요.”
“1층은?”
“식당 겸 휴게실입니다. 보통은 학생들과 같이 식사를 하지만, 같이 드시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교수분들도 있습니다.”
에단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2층 계단에서 남자 하나가 내려왔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와 느끼한 눈썹을 가진 남자였다.
그 남자를 보자마자 에밀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대부분의 설명은 끝났으니, 다른 용무는 내일…….”
“하하, 에밀라 씨?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시나요.”
귓가를 타고 흐르는 버터 같은 목소리.
에단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표정이 구겨진 것은 비단 에단뿐만이 아니었다.
한차례 몸서리를 친 에밀라가 재빠르게 반대편으로 발을 옮겼지만, 남자의 걸음이 더욱 빨랐다.
마치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것 같은 매끄러운 발걸음.
“하하, 제 목소리를 못 들으셨나 보군요?”
에단이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은 남자를 눈짓으로 가리키자, 에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이십니다.”
남자는 그제야 다른 사람도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찰랑이는 머리를 넘기며 에단을 응시했다.
하지만 에단이 반응이 없자, 남자는 에밀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분은……?”
“오늘 새로 부임한 교수입니다. 과목은…….”
“체육.”
에단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체육이라고요? 저희 아카데미에 체육이라는 과목이 존재했습니까?”
“몸 쓰는 건 다 맡기로 해서 말이죠.”
에단의 태연한 대답에 남자가 에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코웃음 쳤다.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행동이었지만, 에단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거 제 소개가 늦었군요. 마법을 담당하고 있는 블라디미르 크러쉬라고 합니다. 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죠? 블라디미르 가문은 유서 깊은 마법 가문으로…….”
크러쉬가 입을 열기 시작했고, 에단은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어디까지 하나 한번 지켜볼 생각이었다.
한참 동안 자기 가문에 대하여 열띤 소개를 하던 크러쉬가 손을 뻗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제 소개는 이쯤 해야 할 것 같군요. 에단 씨는 혹시 가문이……?”
에단은 말없이 크러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평민입니다.”
에단의 말에 크러쉬는 잠시 동안 에단을 바라보더니, 이번에는 대놓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뻗은 손을 회수했다. 마치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불쾌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크러쉬가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냈다. 그는 자수가 화려한 손수건으로 악수하지도 않은 손을 닦았다.
‘별 미친 새끼가 다 있군.’
에단은 화가 나기보다 재미가 있었다. 이런 녀석을 실제로 마주하다니.
모룬과 카론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는 것은 에단뿐만이 아닌 듯했다. 페온이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 저 미친 새끼는 뭐라고 하는 게냐? 블라디미르? 그 머저리 새끼들이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저야 모르죠.’
블란테는 검술 명가였고, 마법을 배척하는 가문이었다. 비록 무투라는 외도의 길을 택한 페온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반감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안 좋은 시선을 가진 걸 떠나서, 블라디미르라는 가문 자체의 위상이 크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애초에 비중이 있었으면 원작에서도 언급이 많이 됐겠지.’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마법 가문이라고 해도, 블란테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블란테가 가진 무력은 한 국가의 무력과 비견해도 밀리지 않는다.
그러니 블라디미르는 비교할 대상이 아니었다.
어쨌든 가문과 별개로 에단은, 원작에서 언급되었던 그에 관한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 크러쉬.
에밀라를 흠모하는 캐릭터.
권위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지만, 천재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자격지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재밌네.’
느끼한 캐릭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권위 의식? 거만한 성격?
그것도 다 알고 있었다. 크러쉬의 포지션은 빌런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귀를 파고드는 기름진 목소리를 듣고, 저 표정을 보니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새로운 종족을 보는 것 같았다.
“전 또 같은 귀족인 줄 알았네요. 하긴……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긴 했습니다. 귀족으로서 가져야 할 기품이 보이지 않더군요.”
에단이 말없이 크러쉬를 바라보고 있자, 오히려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에밀라였다.
어째서 그가 자신의 가문을 밝히지 않는지, 어째서 이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지켜보는 모습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불안함이 무색하게 에단은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이러다가 수틀리면 언제든 무력시위를 해 기를 죽여 놓을 수도 있었다.
‘일단 가문을 밝히지는 않기로 했으니까.’
괜히 가문을 밝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이거 미천한 신분이 실례했군요.”
에단이 저자세로 나가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에밀라였다. 에밀라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에단을 바라봤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 것은 아닙니다. 저의 신분에 비해서 미천한 것은 사실이나, 자신의 주제를 알고 있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죠.”
크러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렸다. 에단은 흡족한 얼굴의 그를 보며 잠시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다.
“그런데 평민 신분인 건 에밀라 교수님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말에 에밀라가 에단을 바라봤다.
에밀라가 에단의 곁에 한 걸음 다가갔다. 에밀라가 이를 꽉 문 채, 씹어뱉듯 속삭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에단은 따로 대답하지 않은 채 크러쉬를 바라봤다. 크러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지금 당신과 에밀라 씨를 동일 선상에 올려 두시는 겁니까?”
“아니, 뭐 신분이 똑같은 것은 사실 아닙니까? 크러쉬 님 같은 고고한 신분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라는 소리죠.”
에단의 태연한 대꾸에 크러쉬가 이를 빠득 갈았다.
“에밀라 씨는 이미 실력이 증명된 사람입니다. 당신 따위의 천한 사람과 비교할…….”
“여기까지 하시죠.”
참다못한 에밀라가 중재를 하기 시작했다. 에단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이 상황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다.
“날이 늦었습니다. 크러쉬 교수님도 내일 수업을 준비하셔야죠? 에단 교수님도 내일 첫 수업을 준비하시려면 이렇게 여유를 부리실 때가 아닐 텐데요.”
싸늘한 에밀라의 시선에 먼저 물러선 것은 크러쉬였다.
“……그 말도 사실이군요. 오늘은 날이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크러쉬가 기품 가득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뒤 휘릭 몸을 돌렸다.
몸을 돌려 올라가는 크러쉬가 순간 고개를 돌려 에단을 흘겨봤다.
에단을 향한 시선은 역시나 곱지 않았다.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크러쉬가 사라지자 에밀라가 에단을 노려봤다.
“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뭐가?”
“가문을 숨긴 것 말입니다. 이유가 뭐죠?”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눈을 끔뻑였다.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러기로 했다고요? 누구랑 말씀이죠?”
“네 상사.”
순간 에밀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마 레벨린 님 말씀인가요?”
“어. 아무래도 시험에 낙방한 망나니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나 봐.”
“…….”
에단의 말에 에밀라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것뿐입니까?”
“뭐, 다른 이유도 있나?”
“됐습니다. 그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에밀라가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에밀라를 에단이 불러 세웠다.
“잠깐.”
에밀라가 슬며시 고개를 돌려 에단을 바라봤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뭐죠?”
“식당 이용법을 알려 줘야지. 밥은 먹고 자야 할 거 아니야.”
“…….”
에밀라가 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에단의 요구는 지극히 합당했으니까.
‘근 손실은 참을 수 없지.’
식사는 중요했다. 공복 시간이 너무 길어졌다.
* * *
다행히 아직 식사 시간이 마감되지 않아 음식을 배급받을 수 있었다.
“식단이 조금 부실하네.”
다른 것들은 얼추 나쁘지 않았지만, 단백질 함량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바라는 게 많으시군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깐깐한 게 당연하지. 네가 먹는 데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렇게 약한 거야.”
“…….”
식단이 동반되지 않는 운동은 단순한 노동에 불과하다.
그것이 에단의 지론이었다. 비록 운동량은 못 채웠어도 충분한 영양 섭취는 동반되어야 했다.
‘하루 굶는다고 이상이 생길 몸은 아니지만.’
굳이 식사를 거를 필요는 없었다. 에단이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라기보다는 음식을 몸 안으로 밀어 넣는 행위에 가까웠다.
“뭐야, 밥 먹는 거 처음 봐?”
볼을 한껏 부풀린 에단의 물음에 에밀라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저도 당신 때문에 저녁을 먹지 못했습니다.”
에밀라도 음식을 받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