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또다시 협상 (2)
“……뭐라고요?”
에단이 찾아왔다는 직원의 보고에 레벨린의 볼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이른 방문이었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녀는 에밀라가 나섰다는 사실이 더 이해 가지 않았다.
‘어째서 보고를 하지 않았지?’
돌발 상황에 에밀라가 나설 수는 있다. 하지만 평소의 에밀라라면 자신에게 보고를 먼저 했을 것이다.
에밀라는 지금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에단은 현재 학장을 만나러 갔고,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계획이 계속 틀어지고 있다는 것에 두통이 느껴졌다.
“에단 씨는 지금 어디 계시죠?”
레벨린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 * *
“도련님, 저는…….”
네이드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을 흐렸다. 네이드는 에단의 곁에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쟤네 셋만 보내? 그래도 되겠어?”
네이드가 가토와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고, 가토도 멋쩍게 웃었으며, 헨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셋을 바라보던 네이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네이드의 말에 에단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해? 안 가고?”
“……지금 바로 가야 하나요?”
휴고가 불쌍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하지만 에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당연한 거 아니야?”
“…….”
헨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고, 다른 일행들도 축 처진 발걸음으로 떠나갔다.
남은 이는 에단과 에밀라, 둘뿐이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성격입니까?”
여러 의도가 담긴 가시 돋친 말에 에단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직장 동료인데 ‘당신’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하아…….”
에밀라는 에단과 말싸움을 해 봤자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한숨만 쉬어 댔다.
“아, 이제 나는 어디서 지내야 하지?”
“교직원들이 쓰는 숙소가 있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안내를…….”
에밀라가 설명을 하려던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여성, 레벨린이었다.
그녀의 입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레벨린을 마주하자 에밀라의 얼굴이 굳었다.
에단이 에밀라를 흘겨봤다.
‘잘 먹힌 모양이군.’
에단이 심은 의심의 씨앗은 성공적으로 발아한 것 같았다.
“실물로 뵈는 것은 처음이군요, 에단 씨.”
“그러게 말이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반말에 레벨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벨린이 애써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밀라 씨도 여기 계셨군요.”
“……네.”
레벨린의 눈이 에밀라를 훑었다. 에밀라의 몸이 흠칫 떨렸다. 에단이 한 걸음 다가갔다.
“방금 학장이랑 얘기는 끝냈는데.”
“그 이야기, 저와도 하시죠.”
에밀라의 말에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지? 네가 학장보다 높은 위치인가?”
날카로운 에단의 물음에 레벨린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그녀는 금세 미소를 되찾았다.
“그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업무는 제가 처리해서 말이죠. 저랑 대화하기가 싫으신가요?”
“어, 싫어.”
레벨린의 표정이 다시 한번 딱딱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에단이 피식 웃었다.
“농담이야. 그래, 대화 좋지.”
“……농담이 짓궂으시군요.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레벨린이 앞장서면서 에밀라를 흘겨봤다.
“에밀라 씨는…… 나중에 따로 뵙도록 하죠.”
레벨린의 말에 에밀라가 고개를 숙였다.
* * *
에단이 에밀라를 따라 응접실에 들어섰다.
‘어찌 된 게 학장실보다 화려하군.’
과장이 아니었다. 레벨린의 응접실은 정말로 학장실보다 넓고 화려했다.
“제 개인 장소는 아닙니다.”
“누가 뭐래?”
제 발 저렸는지 먼저 말을 꺼낸 레벨린에게 에단이 대꾸했다. 하지만 레벨린은 따로 답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생각보다 급하게 오셨군요.”
“미뤄서 뭐 하려고.”
지금과 같이 레벨린이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만약 그녀가 대비를 한다고 해도 뚫고 나갈 자신은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계획 자체를 어그러뜨리는 게 편하고 쉬운 길이었다.
“……학장실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신 거죠?”
“뭐, 그냥 서로 도움이 되는 얘기를 나눴지.”
“솔직하게 말해 주시죠.”
에단이 다리를 꼬았다.
“궁금해?”
무례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레벨린이 인상을 썼다.
“……제가 에단 씨에게 뭐 실수한 거라도 있었나요? 에단 씨는 전부터 저를 싫어하시는 것 같군요.”
“어, 싫어해. 나는 속이 검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든.”
솔직한 에단의 대답에, 에밀라의 미간이 다시 한번 꿈틀거렸다.
에단의 이런 행동은 다분히 고의적이었다.
그녀에게 제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듯, 에단에게도 이곳에서 이득을 극대화할 계획이 있었다.
‘경계를 받는 건 나쁘지 않아.’
어차피 레벨린은 블란테를 눈엣가시로 여겼으니, 부딪치는 건 예견된 상황이었다.
에단은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주인공을 향한 경계를 흩트릴 생각이었다.
‘녀석이 성장해야 나도 사니까.’
주인공의 모든 것을 강탈할 생각은 아니었다. 에단에게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건 다른 애한테 맡기고.’
에단은 그저 자신의 것들을 지키고 싶었다.
‘애초에 아카데미에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니까.’
필요한 것을 얻고, 주인공과의 접점만 만들면 에단은 이곳을 떠날 생각이다. 떠난 이후로는 레벨린도 자신에 대한 경계를 누그러뜨릴 게 빤했다. 처음부터 에단이 원하는 바는 그것이었다.
“대화 내용은 별거 없었어. 대화라기보다는 협상이었지.”
“무슨 말이시죠?”
“내가 블란테라는 것을 감추기 위한 협상을 했다고.”
“이유가 뭐죠? 서로 득이 되는 게 없을 텐데.”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평범한 블란테의 구성원이라면 그 말이 맞겠네.”
“…….”
에단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에단이 말을 이었다.
“모든 사실을 늘어놓으면 아카데미의 평판도 떨어질 텐데.”
에밀라의 상징성.
레벨린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상징성을 만들어 냈으니까.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꽃이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과 인성을 겸비한 고고한 교수.
에단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에단은 대륙 내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망나니였다.
에단이 벌인 패악질과 사건들은 유명했고,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처참하게 탈락했다는 사실도 세간에 유명한 일이었다.
완전히 상반되는 둘의 평판.
그런 에단이 에밀라를 박살 내고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면 아카데미의 근간이 흔들릴 문제다.
레벨린의 표정이 굳었다.
“구태여 그런 협상을 왜 하신 거죠?”
“내가 이유 없는 호의를 보인 것 같아?”
“……무엇을 원하죠?”
“운신과 교육의 자유. 나는 지금부터 평민 에단이야. 이름을 바꿀 생각은 없어. 어차피 지금 내 모습에서 블란테의 에단을 유추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교육의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 나는 맡은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니까.”
자유.
굉장히 두루뭉술한 말이었다. 특히나 레벨린에게는 상당히 껄끄러운 조항이었다. 하지만 거절하기에는 애매했다.
‘명분이 없어. 거기에 패는 상대가 쥐고 있고.’
에단의 말은 사실이다.
에단의 교수 임용에 얽힌 모든 전말이 밝혀지면 아카데미의 평판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힘겹게 쌓아 올린 탑이 무너질 만한 위험을 그저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계약에 충실히 한다는 말은 사실이겠죠?”
“나는 한 말은 지켜.”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하자, 레벨린이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해만 보게 되었어.’
협상 테이블에서 손해를 본 게 얼마 만이던가. 탁상 위에서 행하는 협상은, 그녀에게 가장 자신 있는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에단의 막무가내식 행보는 그녀의 평정을 무너뜨리기 일쑤였다.
블란테를 삼키기 위해, 그리고 블란테의 위상을 이용하기 위해서 블란테를 아카데미로 초청하려고 했지만, 눈앞의 에단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블란테가 왔음에도 블란테인 것을 밝힐 수 없는 상황.
레벨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좋군.’
반면 에단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계획이 순조로웠다.
에단이 블란테인 것을 밝히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주의 통보, 에단이 운신할 때의 제약.
블란테는 아카데미를 향해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에단은 아카데미에 올 때부터 블란테인 것을 밝히지 않기로, 또 가문의 권위를 이용하지 않기로 가주와 약속했다.
가주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대견스러워했지만, 에단의 생각은 반대였다.
‘이용할 건 이용해야지.’
이미 은연중에 블란테를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아직 뽑아 먹을 단물은 차고 넘쳤다.
오늘의 협상 테이블도 에단에게 블란테라는 뒷배가 있기 때문에, 이렇게 유리하게 진행이 된 것이다.
아무리 에단이 거칠 게 없는 성격이라고 한들, 가문이란 뒷배가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둘 수는 없었을 터.
“따로 교수 임용식은 없나?”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됐어. 귀찮아.”
“…….”
레벨린이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에단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수업은 내일부터 진행해도 되나? 수업 하나 빼 주지?”
“상당히 조급하시군요.”
“이왕 일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아, 반은 내가 정했으면 하는데.”
“따로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 여동생이 있어서.”
“여동생 말씀인가요?”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 재주인가?”
“…….”
레벨린이 입을 다물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리사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가문을 숨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 알아. 가문을 숨기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잖아. 그냥 얼굴 한번 보려고.”
“……알겠습니다.”
에단이 리사를 떠올렸다. 에단의 기억을 뒤져 보면 둘의 관계는 결코 좋지 못했다.
에단은 리사의 재능을 질투했고, 리사는 에단의 성정을 혐오했다.
둘의 관계는 거리를 좁히려야 좁힐 수가 없는 관계였다.
‘그래도 건방진 동생은 한번 만나 봐야지.’
때마침 리사와 주인공은 같은 반이었다.
‘당연한 일이지.’
원작에서 리사는 어엿한 주연이었으니까.
‘어디 한번 매제의 자격이 있는 놈인지 확인이나 해 볼까?’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할 얘기는 끝났겠지?”
에단이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가기 직전에 레벨린을 흘겨봤다.
“아, 그리고 꽤나 재밌는 짓들을 하던데.”
“그게 무슨……?”
“조금 진부하고 재미없더라고. 산적들을 풀어 놓는 짓 말이야.”
“……!”
“뭐, 물증이 없어서 따질 생각은 없지만…… 조심하는 게 좋아. 또 걸리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니까. 블란테랑 전면전을 할 생각은 없겠지?”
블란테는 무력 집단이기에, 명분이라는 칼을 쥐면 전면전을 불사할 자신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요.”
“모르면 됐어.”
에단이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고, 홀로 남겨진 레벨린이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