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또다시 협상 (1)
“보람찬 하루였군.”
아카데미의 학장실.
본관과는 꽤나 거리가 있는 위치였지만, 마크는 현재의 생활에 큰 만족을 하고 있었다.
대륙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변두리 지방의 영세한 귀족이던 마크. 그는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출세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뤄 내기 불가능한 바람이었다.
변두리 영지에서 나는 특산품이라고 해 봤자 흔해 빠진 농산물에 불과했고, 광산 같은 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마크의 가문은 도태되었다. 가문을 물려받았지만, 마크가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제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역사에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생을 마감할 생각을 하니, 그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얼마 안 되는 재산으로 도박 수를 던지기에는 담이 너무 작았다.
재산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후까지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됐다.
노후 자금을 잃을까 두려워 사업을 벌일 자신도 없었다.
하여 그렇게 하루하루 허송세월을 보내던 마크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레벨린.
갑자기 나타난 그녀는 마크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건넸다.
지금 마크의 가문은 영세했지만, 과거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귀족 가문들이 과거에는 찬란한 과거를 간직하고 있었다.
과거를 잊지 못하면 도태되고, 변화를 선도해 기회를 잡으면 성장하는 것이다.
마크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바로 기회라는 사실을.
물론 그녀가 요구한 것은 굴욕적이긴 했다.
꼭두각시의 행세.
마크는 무능했지만 우둔하지는 않았기에 그 말을 듣고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마크는 망설이지 않고 레벨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계획은 먹힌다!’
마크의 생각은 정확히 적중했다. 레벨린의 계획은 순탄했고, 아카데미는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했다.
그 와중에 의구심도 들었지만, 마크는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모르는 게 약인 법도 있는 거지.’
마크의 사회적 지위는 크게 높아졌다.
허울뿐인 직위이고, 그 뒤에 레벨린이 있다고 한들 변두리 귀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레벨린 님…….’
레벨린을 향한 충성심은 점차 커져 갔다. 레벨린은 변두리에서 자신을 구해 준 구원자이자, 변화를 선도하는 선지자였다.
그런 그녀에게 최근 눈엣가시가 생겼다.
블란테의 망나니가 아카데미의 물을 흐리고 있다고 했다.
아카데미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단체였기에 뿌리가 얕았다. 그리고 그만큼 흔들릴 여지가 많았다.
‘기강을 잡아야겠어.’
상대는 그 유명한 블란테.
대륙에서 손꼽히는 무력 집단이자 검술 명가.
검 하나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단.
과거의 마크였다면 감히 넘볼 수도, 대면할 수도 없는 거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마크의 위치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마크의 현 지위는 아카데미의 수장이었고, 블란테의 망나니는 교수였다.
‘애초에 에밀라 교수가 잘 처리했으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쯧쯧.
마크가 혀를 찼다.
에밀라 선에서 끝내지 못한 게 아쉬운 탓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와 다를 것이다.
상대가 제아무리 블란테의 자제라고 한들 맡은 위치가 다르니까.
마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블란테의 콧대를 짓누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려면 꽤나 시간이 걸리겠지.’
그 블란테의 행차였다. 꽤나 성대한 준비가 치러질 것이 분명했다.
마크는 천천히 준비를 해 나갈 생각이었다.
“후후.”
마크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때 학장실의 문이 열리며 비서가 들어왔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마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일정에 방문 예정인 손님은 없었다.
마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따로 일정을 잡고 찾아오라고 하세요.”
“그, 그게…… 새로 오신 교수님이라고…….”
“뭐라고요? 설마…….”
마크의 물음에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블란테에서 찾아오셨습니다.”
* * *
“흠흠.”
마크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이런 상황에 대처하는 것도 학장의 업무 중 하나였다.
‘건방진 콧대를 눌러 주겠어.’
마크는 그렇게 다짐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문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학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에단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사납게 웃었다.
“반가워, 학장.”
마크의 얼굴이 당혹감에 젖었다.
* * *
에단은 학장실에 향하기 전 생각에 잠겼다.
아카데미의 학장.
원작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도 알았다.
‘어떻게 할까.’
어떤 행동을 취해야 자신에게 유리할까 고민했다.
이건 협상 테이블이다. 저자세로 나가서 좋을 게 없다.
겸손?
개나 줘 버리라고 해라.
에단은 저자세로 나갈 때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상대는 호의를 호의로 여기지 않는다.
약하게 나가면 오히려 이용하려고 들었다.
이것은 불문율이다. 에단은 자신의 몸값을 키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미 몸값이 높지.’
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은 이미 시작부터 갑의 위치에 있었다.
블란테라는 뒷배를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분명히 말해 두지만 행동을 주의해 주세요.”
“걱정 마.”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에밀라의 말을 에단이 한마디로 끊어 버렸다.
“…….”
에밀라는 에단의 말에 쉽사리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덧붙이기도 힘들었다.
에단은 아직 아무 짓도 벌이지 않았고, 과하게 주의를 주면 오히려 반발심만 생길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서도 일을 벌이겠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
학장실에 당도한 에단이 거칠게 문을 걷어차는 모습을 보며, 에밀라는 조금 전에 한 생각을 후회했다.
에단은 상식이 통용되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이게 무슨…….”
“반가워, 학장.”
에단이 성큼성큼 다가가더니 손님용 의자에 털썩 앉아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그럼 대화를 시작해 볼까?
‘휘, 휘둘리면 안 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숱한 시뮬레이션과 가정을 해 보았지만, 이런 일까지는 예견치 못했다.
마크는 최선을 다해 평정을 유지했다. 최대한 위압감이 드러나는 표정을 지으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행패죠?”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겠지.’
자신은 학장이고, 상대의 직위는 교수. 직급의 차이는 분명했다.
마크는 에단에게서 사과를 이끌어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귀를 후비는 걸 보아하니 조금도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행패? 조금 섭섭해지려고 하네.”
에단이 깍지를 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나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건데.”
“그게 무슨…….”
에단이 뒤를 흘겨봤다. 그곳에는 에밀라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얘, 나한테 깨졌잖아.”
“…….”
“아카데미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블란테의 개망나니. 그게 세간에 퍼진 내 평판 아닌가?”
에단이 씨익 웃었다.
“근데 그런 내가, 아카데미의 교수로 온 걸로도 모자라 실력 좋기로 유명한 교수를 아주 묵사발을 내버린 사실이 소문나면 아카데미의 위상이 어떻게 되겠어?”
그 말에 에밀라는 수치심이 차올랐는지, 이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마크도 이번에는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에단의 말대로였다. 에밀라가 대련 중에 패배했다는 결과는 전달을 받았지만, 그 정도의 완패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다.
“명확한 증거가 있지 않다면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겁니다……. 에단 님께서 에밀라 교수를 쓰러트렸다는 사실을요.”
“하, 하는 말이 고작 증거 타령이야? 뭐, 증인이야 많지. 블란테의 눈이 곧 증거니까. 설마 우리 가문을 못 믿는 건 아니지? 그건 좀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
“그, 그런 의도는…….”
“그렇지? 방금 상당히 기분이 나쁠 뻔했어. 뭐, 다른 증거도 있어. 나는 지금 다시 겨뤄도 이 녀석을 이길 자신이 있거든. 왜, 학생들이 다 보는 앞에서 다시 보여 줄까?”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크가 에밀라를 향해 시선을 던졌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제안이라는 것이 뭐죠?”
“내 제안은 별거 없어.”
정말 별거 없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거든.
* * *
협상을 끝낸 에단이 학장실을 나왔다. 에밀라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에단을 노려봤다.
“왜 그래? 할 말이 있으면 말을 하든가.”
“당신에게는 격식과 예의라는 것이 없는 겁니까?”
에밀라의 물음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어, 없어. 나 몰라? 블란테의 개망나니, 그게 내 별칭이잖아.”
“하…… 그걸 자랑이라고…….”
“개망나니한테 진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않나?”
“…….”
에밀라가 입을 다물었다.
이내 건물에서 나오자, 휴고가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가토도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신기하기는 매한가지인 듯 힐끔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고, 그런 둘의 모습을 네이드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다녀왔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 별일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
에단의 태연한 대답에 에밀라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럼 이제 저희는 어떻게 할까요?”
“아, 너희는 내 수행원으로는 못 있어.”
“그, 그게 무슨…….”
“내 신분은 대외적으로 평민이거든.”
에단의 말에 가토와 휴고가 눈을 끔뻑였다.
“너희는 따로 할 일이 있으니까 걱정 마.”
에단이 씨익 웃었고, 가토와 휴고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저, 저도 그 할 일에 포함돼 있나요?”
헨리가 소심하게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에단은 그게 말이냐는 표정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당연한 걸 왜 물어?”
“…….”
가차 없는 에단의 말에 헨리의 표정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할 일이라는 게 어떤…….”
“아, 특별한 건 아니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이름 좀 떨쳐 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일행이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자, 에단이 미소를 지었다.
“용병 노릇 좀 하고 있으라는 말이야.”
너희가 고생해야 내가 조금 편해지니까.
일행들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