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아카데미의 문지기 (1)
일행은 여정에 속도를 올렸다. 곰 발 산적단 덕에 꽤나 이른 시점에 물자를 충당했다.
원래라면 적당한 마을이나 도시를 경유할 예정이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움직이는 걸 알았으니.’
산적, 붉은 곰, 아카데미.
연관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알게 된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게이트가 있는 도시까지 쉬지 않고 간다는 에단의 말에 휴고는 조금 실망한 눈치였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까지 배려할 수는 없었다.
일행의 체력에는 문제가 없었다.
마차를 모는 말의 체력만 적절히 안배했고, 이내 게이트가 존재하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은 문제가 생겨났다.
“그렇게 비싸다고요?”
밑바닥 인생을 살아왔던 휴고가 게이트 이용료를 듣고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래도 마차까지 함께 이동하는 터라 많은 비용이 요구되었다.
아카데미의 초청장이 있다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겠지만, 에단은 아카데미에서 초청장이 오기 전에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편의를 바랄 수 없었다.
‘나중에 청구하면 되겠지.’
에단은 일단 이용료를 납부하고는 게이트를 통해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이건……?”
휴고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게이트를 넘자마자 보인 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외지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거대한 방벽.
‘돈을 처발랐군.’
블란테 가문의 방벽도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지만, 아카데미의 것과는 비교가 안 되었다.
에단이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장소에 거대한 문이 보였다.
“입구는 저쪽인가?”
에단의 말에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나저나 아카데미에 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헨리가 착잡한 얼굴로 문을 바라봤다.
더 이상 헨리는 아카데미의 소속원이 아니었다. 외지인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아카데미는 새로웠다.
“이렇게 엄격히 통제하면 제대로 된 생활이 가능한가요?”
“정기적인 물자가 들어옵니다. 아무래도 다양한 신분의 사람이 아카데미에 있다 보니, 아카데미와 구성원들은 늘 위협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조치죠.”
“아, 그렇군요…….”
블란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깊은 산맥 중턱에 위치한 블란테도 정기적인 보급을 받고 있었으니.
물론 블란테는 반강제적인 경우였지만…….
에단이 거대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비상식적으로 커다란 문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난 덩치의 거구가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역시나 있네.’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그 앞에 섰다.
거한은 문에 기댄 채로 잠에 취해 있었는데, 에단이 한 걸음 더 다가서자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출입 예정. 오늘 없다. 외부인.”
에단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활자로 보던 녀석을 마주하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거한을 노려봤다.
“나 여기 교수니까 시험이니 뭐니 하지 말고 조용히 들여보내 주면 안 되냐?”
“…….”
말없이 에단을 바라보던 문지기가 마치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너는 교수가 아니다.”
문지기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에단의 표정이 차가워진 것을 본 휴고와 가토는 등이 축축해졌다.
“야, 저거 어떡해……?”
“몰라. 입 다물고 있어. 괜히 불똥 튈 수도 있으니까.”
휴고와 가토는 이미 마음을 놓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에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게 신상에 이로울 터.
“저, 저는 들어갈 수 있나요? 저는 직원인데…….”
지금은 아니지만…….
끝말을 흐린 헨리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문지기가 가늘게 뜬 눈으로 헨리를 바라봤다.
“안 된다. 넌 이제 여기 소속이 아니다.”
문지기의 대답에 헨리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았건만 벌써 아카데미에서 제명당한 것이다.
헨리의 얼굴이 음울해지자,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지랄 말고, 나 교수 맞으니까 비켜.”
“안 된다. 너, 교수 아니다. 나는 여기 지킨다.”
“염병, 진짜.”
에단이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때, 때마침 사람이 나타났다.
“고생하십니다.”
“지나가라.”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웅장한 크기의 문이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열렸다.
“쟤네는 뭐야?”
“몰라,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어서 떼쓰나 보지.”
“큭큭, 한심한 놈들이네.”
“그러게 말이야. 제대로 시험이나 치르고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하핫.”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에단을 흘겨보며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 ……치, 침착하거라.
에단의 감정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페온이었다. 페온은 지금 에단이 어떤 감정에 휩싸였는지 느낄 수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화는 별로 안 나요.’
― ……정말이냐?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에단이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분명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물러서라. 너, 약하다. 다친다.”
문지기 앞에 선 에단이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순한 두통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거슬렸다.
이윽고 기억의 편린이 깨어났다. 류태신의 기억이 아닌 에단의 기억이.
‘허, 어이가 없군.’
기억의 내용은 단순했다. 문지기의 임무는 아카데미의 문을 지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 그것은 문지기의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안하무인이던 망나니 에단은 정해진 규율을 지킬 리 없었다.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억지를 부렸고, 문지기에게 처참히 얻어터졌다.
머저리 같이 얻어맞고 바닥을 기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가슴이 들끓었다. 기억 속의 한심한 자는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기억의 잔상은 계속해서 머리를 찔렀다.
그 당시 얻어터지고 나서 길길이 날뛰었지만, 가문 내에서 외면받는 에단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문지기 따위에게 패배한 에단을 한심하게 여기며 그 사실을 쉬쉬하기 바빴다.
류태신이 아닌, 과거 돼지 같은 에단의 기억을 상기했다.
* * *
짜악!
고메드의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에단의 뺨을 무참히 가격하자, 에단은 속절없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너, 멍청하다.”
고메드가 비릿하게 웃으며 에단을 조롱했다. 주변에 인파가 몰려들었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가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에단의 얼굴이 수치심과 분노로 물들었다.
가문에서 천대받고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익숙했다.
하지만 영지와 밖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에단은 블란테 가문의 적자였고, 블란테라는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 권력이 아카데미에서도 통하는 줄 알았다.
가문에서 무시받지 않기 위해 아카데미로 도망치듯 들어왔다. 하지만 시험에서는 낙방하고, 귀족도 아닌 문지기 따위가 에단을 향해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너, 내가 누구인 줄 알면서 그러는 것이냐?!”
에단이 눈에 쌍심지를 켜며 문지기를 노려봤다.
그러자 거대한 덩치에 문지기는 눈을 끔뻑거리며 에단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너? 돼지 아닌가?”
푸하하하!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벌게진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네가 감히……!”
“너, 못생겼고, 시끄럽고, 돼지 같다.”
문지기가 걸어 나왔다. 그가 발걸음을 내딛자 대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퍼억!
문지기의 다리가 공성추처럼 휘둘러졌고, 에단은 단 한 번의 발길질에 공중으로 붕 떴다.
“너, 동글동글, 공놀이하기 좋다.”
문지기가 비릿하게 웃었다.
* * *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얻어터지는 기억은 에단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류태신이 패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의 기억이 가져다주는 감정은 명확했다.
분노.
화가 치밀었다. 아카데미 입성의 첫 단추인 만큼 원만하게 진행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이 달라졌다.
에단의 입가가 휘었다.
“야, 나 기억하냐?”
에단의 물음에 문지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너 같은 녀석 모른다. 물러서라. 다가오면 다친다.”
“그래. 원래 이긴 새끼에겐 기억이 없어. 나도 그랬거든, 진 새끼들 따위 기억에 안 남아.”
에단이 앞으로 다가서며 웃었다. 여태껏 보인 적 없던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에단을 바라보던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떨었다.
에단의 몸에서는 지금 무형의 마나가 줄기차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눈치가 없는 건가?’
이 거리에서도 피부가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문지기는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너, 겁이 없나?”
“어, 나 겁 없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휴고와 가토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제발 겁 좀 가져!’
하지만 마음의 소리가 문지기에게 닿을 리 만무했고, 문지기는 오히려 쿡쿡 웃었다.
“너, 귀엽다. 하지만 오면 혼난다.”
“내가 너를 이기면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멍청한 소리다. 넌 날 못 이긴다. 그럴 일은 없지만, 나를 이겨도 들어가진 못한다.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선택받은 자들이다. 너같이 멍청한 녀석이 아니라. 하하.”
문지기는 갑자기 유창해진 말로 에단을 도발했다.
“……헨리 씨.”
“네?”
가토의 부름에 침울한 표정의 헨리가 고개를 들었다.
“저 문지기 강한가요?”
“아…… 네, 뭐…… 강하죠.”
“얼마나 강한 거죠?”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마나 유저 중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교수급은 되지 못하죠. 그것도 교수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에밀라 씨를 이긴 에단 씨에게는…….”
그제야 헨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저걸 말릴 수 있을 거 같나요?”
“아…….”
그제야 두 사람 사이의 기류를 눈치챈 헨리의 말끝이 늘어졌다.
그녀도 느낀 것이다. 이미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것을.
헨리가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제발 일이 커지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에단이 한 발짝 더 나아갔다. 문지기의 두꺼운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너, 다친다.”
마지막 경고였다. 그러나 에단은 보란 듯이 발을 내디뎠다.
“다치게 해 봐.”
“늦었다! 후회해도!”
문지기가 에단에게 다가섰다. 엄청난 거구라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지만, 에단의 앞에 나란히 서자 몸집 차이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자그마치 두 배가 넘는 신장 차이. 키만 컸다면 그렇게 거대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몸을 가득 메운 압도적인 근육.
화가 잔뜩 난 근육이 꿈틀거렸다.
문지기가 팔을 젖혔고, 무엇을 할지는 벌써부터 예상이 되었다.
에단은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너, 죽는다!”
문지기가 젖힌 팔을 뻗었다.
후웅!
강한 풍압이 일었다. 단순히 주먹을 내지르는 행위였지만, 거기에 뒤따르는 파급력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위력에 에단의 검은 머리가 휘날렸다.
‘큰일이다!’
문지기는 후회가 막급했다. 눈앞의 치기 어린 애송이의 태도가 건방졌다고 한들, 대응의 정도가 너무 심했다.
손속을 두고 상대해야 했지만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내지른 힘을 제어하기는 불가능했다.
유혈 사태가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자신도 처벌을 피하기가 어려울 터.
“피해라!”
문지기가 간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에단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에단이 한 걸음 더 내딛자, 바위 같은 주먹이 그의 코앞에 다가왔다. 하지만 에단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단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아주 가볍게 문지기의 팔을 쳐 냈다.
패링(Parrying).
상대의 공격을 흘려 내는 방어 기술.
잽과 같은 견제기가 아닌, 제대로 힘이 실린 공격을 패링해 내기는 쉽지 않았지만, 타이밍과 기술의 완성도가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탁!
후웅!
문지기가 자신의 힘에 못 이겨 몸을 휘청거렸다. 에단이 무너지는 문지기의 몸을 가뿐하게 피했다. 문지기는 지면에 팔을 뻗어 고꾸라지는 것을 겨우 면했다.
넘어지는 것은 면했지만, 문지기는 무슨 일을 겪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안도감보다는 의아함이 앞섰다.
분명 눈앞의 남자는 곤죽이 되어야 정상이었다.
‘내가 졌다? 힘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힘은 문지기의 자부심이었다. 힘에 있어서는 그 누구에게도 밀린 적이 없었다.
“너, 속임수 썼다. 나쁜 놈이다.”
문지기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지기의 얼굴이 흉신 악살처럼 일그러졌다. 흉흉한 살기가 줄기차게 흘러나왔다.
“지랄, 아, 맞다. 선빵은 네가 친 거다? 이제 난 죄가 없어.”
에단의 도발이 이번에는 제대로 먹혔다.
문지기의 얼굴이 붉게 물들며 머릿속이 분노로 하얘졌다.
“우어어어!”
문지기가 다시금 주먹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죽이기로 작정하고 휘두른 주먹이었다.
에단이 앞서 했던 동작을 반복했다. 문지기의 손을 쳐 낸 뒤,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주먹은 이렇게 휘두르는 거야.”
앞발을 축으로 에단의 몸이 회전했다. 에단의 왼 주먹이 문지기의 옆구리에 꽂혔다.
퍼억!
“흐억!”
문지기는 헛숨을 들이켰다. 살면서 느껴 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