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에단의 평판
“……정말 동일 인물이 맞습니까?”
헨리가 뜨악한 표정으로 묻자 에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돼지랑…… 같은 사람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주변의 기물들을 마구잡이로 박살 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그 망나니가 에단 블란테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에단 블란테와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다짐은 허사가 되었다. 에단의 외형이 너무 크게 변해 버린 탓도 있었고, 블란테의 일원을 검술 교수로 초청하는 임무에 정신이 팔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답하자 헨리가 멍하니 에단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믿기가 힘들었다.
지금 웃는 이 미청년이 그때 그 망나니랑 동일 인물이라니.
“그럼 슬슬 본론으로 돌아가시죠.”
“아, 넵. 죄송합니다. 괜히 쓸데없는 말을 뱉어서…….”
“괜찮습니다. 지우고 싶은 과거이지만 받아들여야겠죠.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그렇다 해도 이동은 같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차피 제가 떠나면 이 마을에 남아 있을 이유도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네, 그렇기는 합니다만…….”
헨리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에단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어차피 저는 갈 거니까요.”
이건 권유가 아니라 통보였다.
* * *
시간이 흘러 에단이 요청한 말과 마차가 준비되었다.
에단의 곁에는 가토와 휴고가 거무죽죽한 얼굴로 서 있었다.
멀끔한 옷차림과 상반되는 창백한 안색과 죽은 눈이었다.
“속성 훈련은 만족하냐?”
에단이 피식 웃으며 가토와 휴고의 등을 툭 때리자 둘이 비명을 질렀다.
“끄으으윽!”
“꺼허어어억!”
첸에게 몰매를 맞아 가며 혹사당한 몸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새끼들 엄살은.”
‘자기가 해 보든가!’
가토와 휴고가 불만 가득한 눈초리로 쏘아봤지만 에단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차는 말한 대로, 평범하군.”
정말 평범했다.
적당한 크기의 갈색마 두 필과 행상인들이나 몰 것 같은 무늬 없는 나무 마차였다.
블란테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것은 가토와 휴고가 입고 있는 정복 외에는 없었다.
“너희도 가리고.”
에단이 검은 로브를 건네자 가토와 휴고도 옷을 가렸다. 이번 여정은 블란테의 가호를 등에 업은 여정이 아니었다.
‘마중 오는 사람은 없군.’
별채에서 출발하는 탓에 정말 이 인원 그대로 소소하게 출발을 할 것 같았다.
‘내가 없어진다고 제대로 신났겠는데.’
에단이 모룬과 카론을 떠올렸다. 에단에게 완전히 박살 난 이후로 둘은 에단을 피해 다녔다.
역시나 오늘도 둘은 나타나지 않았다.
‘새끼들 속 좁기는. 그나저나 그녀는 언제쯤 오는 거지?’
생각하기 무섭게, 보부상같이 거대한 가방을 짊어진 여자 하나가 힘겹게 언덕을 올라왔다.
“큭큭큭.”
헨리의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여정의 시작이었다.
* * *
“도련님, 말이 저를 너무 무서워하는데 어쩌죠?”
“아, 그래? 그럼 내가 말을 몰까? 어?”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휴고가 말에게 다가가자 말이 꼬리를 내리며 몸을 수그렸다.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짐승은 감이 좋고 예민하기에,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휴고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
그들에게 있어 휴고는 포식자 중의 포식자. 공포감으로만 따지면 오우거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하긴, 짐승이니 그만큼 감각도 예민하겠지.
‘어쩔 수 없죠. 휴고의 본질은 순수한 인간이 아니니까요.’
휴고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말들과 씨름하고 있자, 가만히 지켜보던 가토가 나섰다.
“넌 그냥 마차나 호위해. 내가 몰게.”
가토가 한숨을 내쉬며 고삐를 쥐었다. 가토가 다가가자 겁을 집어먹었던 말들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아…….”
자기가 못하던 일을 가토가 해내자 휴고가 시무룩해하며 마차의 곁에 섰다.
견장을 가리고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용병 같았다.
그때 헨리가 슬그머니 에단에게 다가왔다.
“염치없지만 저, 저도 탈 수 있을까요? 제가 걸음이 느려서…….”
“당연히 괜찮죠. 쟤네는 기사들이고, 옆에는 연로하신 노인까지 계신데.”
“저는 아직 정정합니다, 도련님.”
“확실히 그런 것 같긴 해. 네이드 너도 휴고랑 같이 걸을래?”
“그러고 보니 최근에 뼈마디가 아프더군요. 역시 예전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나이이기는 하지.”
겉치레 없는 둘의 대화에 어안이 벙벙해진 헨리가 슬며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휴고가 고삐를 쥐자 말이 앞으로 나아갔다.
‘승차감은 엉망이군.’
정말 상상 이상으로 최악이었다.
딱딱한 바닥과 포장되지 않은 도로, 투박한 바퀴의 조화는 정말 불편했다.
‘불평할 처지는 아니지.’
아무리 마차 위가 편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
* * *
“도련님이 방금 떠나셨습니다.”
“그런가? 괘씸한 녀석, 인사도 안 하고 가다니. 그나저나 자네가 웬일로 피곤해 보이는군. 맡은 애들이 재능이 그만큼 없던가?”
빈센트의 물음에 첸이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저는 그 둘에게서 블란테의 미래를 엿봤습니다.”
“호오, 극찬할 정도라니.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군.”
첸이 소매를 걷었다. 소매를 걷은 첸의 팔뚝에는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고작 3일 만에 제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을 했습니다.”
“……그거 놀랍군. 너무 살살해 준 거 아닌가?”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금방 벽을 뚫게 될 겁니다.”
“허…… 그런 녀석들이 에단의 밑에 들어가다니 아쉽군그래.”
“도련님의 안목이 그 정도로 출중하다는 소리겠죠.”
“그러면 뭐하나. 가문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두고 훌쩍 떠나 버린 녀석인데.”
빈센트가 평소답지 않게 툴툴거리자 첸이 웃음기를 머금으며 물었다.
“그래서 화가 나신 겁니까?”
“그럴 리가.”
빈센트가 소리 내어 웃었다.
* * *
에밀라는 쉬지 않고 내달렸다.
말의 체력이 다하면 말을 바꿔 탔다.
블란테의 입김이 닿아 있는 지역에는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꽤나 먼 거리를 쉬지도 자지도 않고 주파했고, 블란테의 영향이 닿지 않는 도시까지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에 도착한 에밀라는 곧바로 게이트를 이용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왜 이렇게 초조한 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말에 휘둘리는 건가?’
기억을 지우려고 해도 에단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머릿속에서 의심이 점차 싹텄다.
레벨린에 대한 에밀라의 믿음은 신앙에 가까웠다.
그녀를 의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죄책감이 느껴졌다.
레벨린은 에밀라의 인생을 구원해 준 구세주였다.
‘생각하지 말자.’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기자 에단에게 맞은 곳이 욱신거렸다.
에밀라는 눈을 감았다.
고통을 참는 것에는 익숙했다. 배고픔을 참는 것에도 익숙했다. 감정을 숨기는 것은 어쌔신의 소양이었다.
에밀라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학생들이 선망하던 설화(雪花)의 모습이었다.
이윽고 게이트를 넘어 아카데미에 도착하자, 구역질이 치밀었다.
평소라면 가볍게 넘길 메스꺼움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에밀라로서는 레벨린이 걸어 둔 암시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에밀라가 비틀거리며 걸었다. 시선들이 에밀라에게 향했다.
“어? 에밀라 쌤이다!”
“에밀라 교수님,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어디 가셨다가…….”
에밀라는 말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에밀라의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옷에는 흙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다가오던 학생들도 멈칫했다.
에밀라가 계단을 올라, 레벨린의 집무실로 향했다.
‘불안해하지 마.’
모든 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그따위 말에 휘둘릴 필요는 없었다.
에밀라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평소와 같은 미성이 들려왔다. 언제나 에밀라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목소리.
‘그래, 달라진 건 없어.’
아카데미는, 아니, 레벨린은 에밀라의 보금자리였다.
에밀라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레벨린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칭할 수려한 외모, 그리고 그녀를 상징하는 붉고 긴 머리칼.
그런데 그런 레벨린의 모습을 보자 역겨움이 치밀었다.
“에밀라 씨, 일찍 오셨네요?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으셨나요?”
레벨린의 목소리를 듣자 에밀라의 머리가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아닙니다.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에밀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은 되지만, 그만큼 급한 사항이니 그렇겠죠. 천천히 말씀해 보세요.”
레벨린이 싱긋 웃으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그녀다운 자애로운 태도였다.
‘대체 왜 이러지?’
소름이 끼쳤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에밀라가 침을 꿀꺽 삼키며 불손한 의심을 외면했다.
“……임무는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요?”
레벨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제가 알고 있는 그분은 에밀라 씨를 상대로 일 합을 견뎌 낼 실력도 없을 텐데요.”
“……에단 씨를 알고 계십니까?”
“네, 뭐…… 알고 있다고 말하기는 애매하지만, 이전에 아카데미에 시험을 치르러 왔을 때 한 번 뵌 적은 있었죠. 마무리가 좋지는 못했지만…… 그걸 떠나서도 워낙 유명 인사잖아요? 블란테의 망나니로.”
“……소문대로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가요? 그거 신기하네요. 제가 봤을 때의 모습은 소문과 정말 판박이였는데 말이죠. 다른 문제나 착오가 있던 것은 아니었나요? 가령 블란테에서 술수를 부렸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어조는 부드러웠으나 그 속내에는 에밀라를 향한 추궁이 포함돼 있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시험에 임했고, 패배했습니다.”
에밀라의 대답에, 레벨린이 에밀라를 말없이 바라봤다.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레벨린이 평소 같은 미소를 지었다.
“에밀라 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들어가서 쉬시죠.”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죠.”
에밀라가 고개를 숙이고 집무실 밖으로 나서려고 하자, 레벨린의 음성이 에밀라의 발목을 붙잡았다.
“에밀라 씨, 말씀하신 것 외에 다른 일은 없으셨죠?”
“네, 없었습니다.”
에밀라의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