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기사 수련
첸이 천천히 발을 내밀었다. 가토와 휴고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하지만 첸이 발을 내딛는 순간, 둘의 긴장은 무의미해졌다.
퍽!
순식간에 자리에서 사라진 첸이 검면으로 휴고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휴고가 허무하게 날아갔다.
가토가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뻗었지만, 그것도 의미가 없었다.
“자세가 훌륭하군.”
첸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단 한 걸음에 불과했지만, 첸은 가토의 사각으로 사라졌다.
‘미친!’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기분에 소름이 끼쳤다.
“집중해라.”
첸의 검면이 가토의 복부를 때렸다. 가토는 내장이 진탕되는 감각을 느끼며, 휴고와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았다.
쿠당탕탕!
“각오했다고 하지 않았나?”
첸의 목소리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무섭지만…… 익숙해.’
두렵고 몸이 떨렸지만, 처음 겪는 기분은 아니었다.
그간 에단이 시켜 온 훈련 덕분에 둘은 내성이 생겼다. 휴고와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두 사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먼저!”
휴고가 뛰어들었다. 탄력적인 근육이 엄청난 폭발력을 만들어 냈다.
체공 시간이 길었으며, 그만큼 빨랐다. 상당히 먼 거리를 한순간에 좁혔다.
‘느껴져.’
아직 온전히 파악하고 느끼지는 못했지만, 첸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마나가 느껴졌다.
첸이 어디로 움직일지, 또 어떻게 대응할지가 예상이 되는 것 같았다.
더는 마나의 기백의 짓눌리지 않았다.
“놀랍기는 하지만 허점이 많군.”
체공하는 동안은 방어에 취약하다.
그 순간, 휴고의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무게 중심이 바뀌며 휴고의 다리가 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좋은 시도야.”
첸이 휴고의 발목을 붙잡았다.
“미친!”
휴고가 비명을 질렀다. 불안한 예감이 치솟았다.
쾅!
“커억!”
휴고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가토가 첸의 뒤를 잡았다.
가토는 빠르고 은밀하게 첸의 사각을 노렸다.
쐐액!
‘감이 잡혀.’
가토 역시, 뜬구름을 잡는 것만 같던 첸의 말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마나의 흐름.
첸이 의도적으로 흘리는 마나가 느껴졌다.
난폭하나 흐름과 규칙이 있었다. 사나운 태풍의 중심은 고요하다. 가토가 태풍 같은 마나의 핵에 검을 밀어 넣었다.
신속한 찌르기.
수없이 연마한 기본기가 빛을 발했다.
챙!
하지만 첸은 사각에서 찔러 오는 검을 보지도 않고 검면으로 막아 냈다.
첸은 가토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시도는 좋았다. 오늘따라 칭찬을 자주 하게 되는군.”
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첸은 본래 칭찬에 매우 인색하기로 악명 높았다.
“더욱 정진하도록.”
첸이 몸을 틀면서 검을 휘둘렀다.
가토가 뻗은 찌르기와는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의 검격이 가토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마치 진짜 섬광은 이런 거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
퍼억!
“커헉!”
가토가 비명을 내지르며 또다시 벽에 처박혔다.
― 아주 임자를 제대로 만났구먼.
‘여기서 마나 수련을 안 하길 다행이군요.’
보기만 해도 몸이 아려 오는 것 같았다. 저렇게 고된 길과 비교하니 죽은 나무가 더 예뻐 보였다.
에단이 죽은 나무를 손에 넣지 못했다면, 저기 있는 건 휴고와 가토가 아닌 에단이 되었을 것이다.
“아쉽습니다. 도련님이 수련하신다면 제가 직접 지도했을 텐데 말이죠.”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네이드가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에단이 질색했다. 훈련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얻어맞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럼 슬슬 준비해야지.”
“어떤 걸 말씀입니까?”
“아카데미에 갈 준비.”
첫 취직인데 준비는 하고 가야지.
* * *
에단이 밖으로 나섰다. 에단이 처음 여관에서 눈을 뜬 날을 제외한다면 첫 외출이었다.
‘그건 타의적이었지만.’
에단은 조용히 별채를 나섰다. 딱히 귀족임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에단은 원래도 과시를 즐기지 않았으니까.
평범한 활동복을 걸친 채 네이드와 함께 시내로 나섰지만, 그곳까지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다.
블란테 가문이야 무력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니 산맥의 중턱에 자리하고 있지만, 일반 영지민들은 그곳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제아무리 블란테의 가호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본채의 인근은 너무 척박하고 위험했다.
‘나름대로 구색은 갖추고 있군.’
블란테의 주 수입원은 세금이 아니었다. 경호와 상업, 그리고 전쟁이 주 수입원이었지, 영지민들에게 거둬들이는 세금은 비중이 적었다.
‘그렇기에 표정들이 괜찮은 건가.’
발전된 도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작고 소박한 영지임에도 영지민들의 얼굴은 어둡지 않았다.
‘좋군.’
오히려 번잡한 도시에는 그림자가 드리우기 마련이었다. 에단은 이 마을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날 알아보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군.”
“그야 도련님께서 바뀌었으니까요.”
“흠…… 알아보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선은 부담스러운데.”
에단이 지나가면서 적지 않은 영지민들이 에단을 힐긋힐긋 쳐다보고 있었다. 경계나 적의가 담긴 시선이 아닌 묘한 눈빛이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뭐가?”
“살이 빠지신 도련님은 보기 좋습니다.”
“뭐, 잘생겼다고 아부라도 하는 거야?”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하자 네이드도 작게 웃었다.
“빈말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지나가는 아낙네들은 모두 도련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지 않습니까.”
“됐고, 볼일이나 보러 가자.”
에단은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이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오히려 페온이 못마땅한 말투로 한마디 던졌다.
― 쯧쯧, 이런 기생오라비 같은 놈이 뭐가 잘생겼다고……. 내 어린 시절이랑 비교하면…….
페온이 투덜거렸지만, 에단은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걷고 나서야 에단은 발을 멈추고는 네이드를 바라봤다.
“여기가 맞나?”
“네. 여기가 그분이 머무르는 장소입니다.”
“뭐, 나쁘진 않군.”
에단은 한 여관 앞에 서 있었다. 여관의 외관은 허름했지만, 관리를 열심히 했는지 깔끔해 보였다.
끼이익.
에단이 문을 열자 오래된 나무 특유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세요.”
에단과 네이드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앳돼 보이는 여자 종업원이 밝게 인사하며 맞이했다.
‘뭔가 익숙한데?’
에단이 말없이 여관을 둘러보자, 웃음을 머금은 네이드가 에단의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그 장소가 맞습니다.”
“제기랄.”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골라도 이런 곳을 고르다니.
난데없이 에단이 인상을 구기자, 종업원이 당황했다.
“제,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나요?”
“아닙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었다.
게다가 에단을 몰라보는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바뀌긴 했지.’
체지방으로만 성인 장정 하나를 뽑아냈다. 그때 가지고 있던 사납고 불퉁한 인상 대신에 날카롭고 차가운 모습만 남아 있었다.
“아, 그렇군요……. 혹시 식사를 하러 오신 건가요?”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한 종업원이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묻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일 자신 있는 것들로 준비해 주시길 바랍니다.”
“넵!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저희 아버지께서 주방장이신데 요리 솜씨는 자신할 수 있습니다!”
당찬 대답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럼 기대하죠. 그리고 찾는 사람이 있는데…….”
“찾는 사람이요?”
“이름은 아시려나 모르겠지만, 헨리 씨라고 들어 본 적 있습니까? 작은 체구에 갈색 머리를 한 여성입니다.”
“아, 헨리 씨요? 네. 저희 여관에서 반년 정도 머무르고 계신데, 혹시 지인이신가요?”
“뭐, 그런 셈이죠.”
“와…… 헨리 씨 정말 의외네요. 저번에는 굉장한 미인 친구도 데려오시고, 이번에는 미남까지……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칭찬 고마워요. 그러면 자리 좀 안내 부탁드릴게요.”
“앗, 내 정신 좀 봐! 죄송합니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후다닥 움직이며 자리를 안내해 줬다. 아직 화창한 낮이라 그런지 여관은 한산했다. 구석에서 낮술을 즐기고 있는 남자 몇 명만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분위기는 괜찮네.’
에단이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주변이 풍비박산이 나 있었지만, 지금은 멀끔한 모습을 되찾았다.
‘식탁이랑 의자들은 모두 바뀐 건가.’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벽과 마룻바닥과 달리, 의자랑 식탁 등의 가구들은 모두 깨끗했다.
“그럼 식사는 금방 준비해 드릴게요. 아, 헨리 씨는 점심을 조금 늦게 드시는 편이라 이따가 내려오실 거예요!”
종업원이 쾌활하게 대답하자 에단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태도를 말없이 바라보던 네이드가 웃음을 머금었다.
“꽤나 예의 바르시군요.”
“그럼 내가 뭐 망나니 새끼라도 되는 줄 알아?”
“하하, 아니었습니까?”
“조용히 해.”
에단과 네이드가 계속해서 티격태격하는 사이, 차례차례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에단은 말없이 음식을 입에 넣으며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맛이 괜찮군.”
“그렇군요.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블란테 가문에서 먹던 호화스러운 음식들과는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충분히 맛있는 음식들이었다.
에단과 네이드가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자, 여관의 객실 위에서 한 여자가 비척대며 내려왔다.
“으아아…….”
비틀거리는 여자의 얼굴은 초췌했다. 윤기 나던 갈색 머리는 푸석했고, 번들거리던 피부도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헨리 씨, 다시 뵙는군요.”
에단이 헨리를 반갑게 부르자 그녀의 고개가 뻣뻣하게 돌아갔다.
“……히익!”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기를 일으키는 모습에 에단이 웃음을 머금었다.
“왜, 귀신이라도 보셨습니까?”
* * *
불편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헨리는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쭉 빠져 있었다.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자, 잘 지냈습니다…….”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헨리의 대답이었지만, 에단은 개의치 않았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무슨…… 아, 그 제안은 감사하지만…….”
헨리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을 하려고 하자 에단이 헨리의 대답을 저지했다.
“지금 대답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삼 일 뒤에 이동할 거니까요.”
“이, 이동이요? 어디로 말씀입니까?”
“어디긴요. 당연히 아카데미죠.”
당연하다는 듯한 에단의 대답에 헨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 하지만 아직 아카데미 측의 회신이…….”
“어차피 기정사실 아닙니까? 시간은 아끼면 아낄수록 좋죠.”
“그, 그래도…….”
“이미 결정된 사항입니다. 준비하실 게 따로 있으십니까?”
에단의 확고한 의지에 헨리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아니요……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여행을 위한 물품과 마차는 제가 준비할 테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에단이 씩 웃으며 다시 식사를 재개하자, 눈치를 살피고 있던 헨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굉장히 실례되는 질문이긴 한데,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편하게 말씀하시죠.”
“사실 제가 이 여관에서 머무른 지 반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렇군요.”
에단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대답하자 헨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술에 잔뜩 취한 날, 방에서 자고 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나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밀었거든요…….”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군요.”
“그, 상당한 거구의 남자가 주변을 다 때려 부수더군요. 엄청 화를 내면서 말이죠. 저는 겁을 집어먹고 바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추후에 난장판이 된 여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이 바로 에단 님이라고…… 그래서 말인데요. 그 돼지 새…… 아니, 거구의 남성이 정말 에단 님 맞습니까?”
헨리의 질문에 에단이 이마에 손을 얹고, 네이드가 웃음을 흘리며 식기를 놓았다.
“네. 그 돼지 새끼가 바로 접니다.”
에단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