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뿌려둔 씨앗 (2)
“크흡!”
이번에 사레가 들린 것은 휴고와 가토였다.
둘은 내색하지 않으려고 곧바로 음식을 밀어 넣었지만, 한번 냉각된 분위기는 쉽사리 수습되지 않았다.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설마요. 제가 헨리 씨를 놀릴 이유가 있나요?”
“……그건 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밖에 받아들여지지 않네요.”
“왜죠? 제가 말한 것 중에 틀린 사실이 있던가요? 아카데미의 처우가 너무한 것은 사실 아닙니까?”
“그래도 제 직장입니다. 아카데미를 떠나면 저는 뭘 먹고 살라고요?”
헨리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아, 제가 이 말씀을 먼저 안 드렸군요. 헨리 씨는 제가 고용하도록 하죠.”
“……고용이요?”
“네. 제가 고용하겠습니다. 아, 물론 당장은 아닙니다. 갑자기 그만둔다고 말하면 아카데미 측에서도 좋게 보지 않을 테니…… 천천히 고민하시죠.”
“그 말은 블란테의 일원이 되라는 말씀인가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헨리 씨는 블란테가 아닌, 저의 직원이 될 테니까요.”
“에단 씨의 직원이요?”
에단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슨 의도지?’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두 배.”
“네?”
“지금 받는 급여의 두 배를 약속드리죠.”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에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헨리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마저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없어?!’
어느새 그 많던 고기와 음식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 * *
“도련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횟수 끝내고 물어봐.”
“넵.”
휴고가 재빠르게 스쾃을 이어 나갔다. 에단이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벨을 바라봤다.
‘만족스럽네.’
― 특이한 운동법이지만 효과는 있어 보이는구나.
‘아직 보여드릴 게 많습니다.’
― 허, 솔직히 말하거라. 어디서 이런 것들을 배운 게냐?
‘영업 비밀입니다.’
에단의 입지가 커지고 처음으로 가문의 야장들에게 직접 주문 제작한 운동 기구였다.
첫 제작이라 아직 미숙한 부분은 있었지만, 마감이나 무게 중심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원판을 벌써 300킬로를 넘게 끼웠음에도 바벨이 휘지 않고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휴고도 많이 성장했군.’
휴고가 구슬땀을 흘리며 운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벌써 횟수가 열 자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체력을 테스트할 겸 시킨 것이었지만, 휴고의 성장은 언제 봐도 놀라웠다.
‘때가 된 건가.’
에단의 시선이 이번에는 가토를 향했다.
가토는 휴고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근력 측면에서는 휴고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토는 좌절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저런 애가 이름조차 나오지 않던 엑스트라인 게 이해가 안 되는군.’
재능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의지력이었다. 그런 점에서 가토는 휴고에게 밀리지 않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오십!”
휴고가 바벨을 놓으며 소리쳤다.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고르던 휴고가 에단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물어봐도 괜찮죠?”
“그래.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그래?”
“그전에 온 헨리 씨 때문에요. 굳이 도련님의 사비를 써 가면서 데려올 이유가 있나요?”
헨리의 질문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그러는 너는 쓸모가 넘쳐 보여서 내가 데려왔고?”
“그, 그건…….”
“헨리 걔는 쓸모 있지.”
“그, 그런가요?”
휴고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봤다. 가토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의식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여운 새끼들.’
에단은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저런 감정이 성장에 있어서는 중요한 동기 부여가 된다.
“물론 너희들만큼은 아니지만…… 그 녀석도 쓸모가 있지.”
“그렇죠?! 하지만…… 과연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올까요?”
휴고가 반색하며 물었다.
“아마 올걸?”
사실 아마가 아니라 확신이다. 헨리는 곧 아카데미를 떠난다.
원작의 스토리가 그랬다.
‘거기에 내가 숟가락을 얹는 거지.’
헨리의 가치는 과소평가되어 있었다.
‘지금은 그다지 쓸모가 없지만.’
나중 가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언제까지 쉬게?”
에단의 눈총에 휴고가 재빨리 바벨을 잡았다.
* * *
“인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네.”
“그만큼 대련의 내용이 놀라웠던 탓이겠죠.”
“대련이 아니라 시험이라니까.”
“시험치고는 꽤나 격렬하더군요.”
“나도 그 정도로 격렬할지는 몰랐지.”
에단은 네이드와 가문의 본채로 향했다. 가주의 호출 때문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에단의 용무 때문이었다.
본채의 복도를 거닐면서 많은 수행원과 기사들을 지나쳤다.
시선이 에단에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경멸 어린 시선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동경, 경외 따위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대놓고 묻지 않아도 체감이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다.
류태신이 에단의 몸을 차지한 지 채 몇 달이 지나지도 않았다.
‘이제 시작이야.’
이건 고작 걸음마에 불과했다. 앞으로 닥칠 사건들에서 살아남으려면 한참 부족했다.
“요즘엔 녀석들이 안 보이는군.”
“카론과 모룬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둘은 최근 훈련에 매진한다고 하더군요.”
“큭큭, 쓰기 좋은 핑곗거리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네이드와 실없는 대화를 하며 걷기 시작하자 어느새 영주실 앞까지 도착했다.
영주실 앞에 섰을 뿐인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 쓸데없는 무게를 잡는구나.
이번에는 에단도 페온의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에단이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곧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에단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무거운 압박감이 쏟아졌다.
― 마나를 운용해라. 훈련 때처럼 흘린다고 생각하면 수월하다.
에단이 마나를 천천히 퍼트렸다.
급하지 않게 은은한 물결처럼 마나를 운용하니,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게 각자의 마나인가.’
‘죽은 나무’의 힘으로 마구잡이로 흡수한 마나의 결들이 느껴졌다.
마나에는 각자의 개성이 나타나고 있었다.
‘위험한 이유도 알겠군.’
확실히 한계까지 쌓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갈 것 같았다.
에단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빈센트가 말을 건넸다.
“실력이 늘었구나.”
“정진하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숨기는 게 많군.”
“언제나 3할은 숨겨 두는 게 제 지론이라.”
“흥, 좋은 마음가짐이긴 하다만, 숨기는 게 3할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짐작은 자유입니다.”
“쓸데없이 말주변도 늘었군.”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가벼운 설전이 오갔지만 에단의 태도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빈센트가 눈살을 좁히며 에단을 바라봤다.
“원하는 대로 되었구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카데미로 가야죠.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블란테의 이름은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호오…….”
“블란테의 입장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괜히 소음을 만들어 내고 싶지는 않군요. 아카데미 측에서도 잘된 일이죠. 악명 높은 블란테의 망나니라는 게 안 밝혀질 테니.”
“기억은 하는 모양이군.”
“잘 기억은 안 납니다.”
시치미 떼듯 대답하는 에단의 태도에 빈센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좋다. 아카데미에는 혼자 갈 생각이더냐?”
“그럴 리가요. 제 사람은 데리고 가야죠. 휴고와 가토 둘을 제가 데려갑니다.”
“네이드는 필요 없겠지?”
“네이드는 당연히 따라와야죠. 제 직속 집사 아닙니까?”
“욕심이 많아.”
“일개 집사에 불과할 텐데요.”
빈센트와 에단의 시선이 부딪쳤다.
“……좋다. 요구 사항은 그뿐인가?”
“블란테를 드러내지 않는 건 저로 족하지 않습니까?”
“머리를 굴리는구나.”
“굳이 감출 필요를 못 느끼는 거죠. 블란테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으려면 슬슬 마나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의 수준이야 아버지가 더 잘 아실 테고.”
“허, 아주 고혈까지 빨아갈 기세야.”
“엄살이 심하십니다.”
“그래, 그것도 허락하마. 시험에서도 승리하였으니 임시로 기사 임명권을 주도록 하마. 둘의 마나 수련도 바로 가능하도록 조치해 주지.”
“스승도 고를 수 있겠죠?”
“……또 뭘 원하는 거냐.”
“첸 경을 붙여 주시죠.”
“……하아, 좋다. 첸을 붙여 주도록 하지. 다만 알아둬라. 이 정도의 특혜는 다신 없다는 것을.”
“이게 왜 특혜입니까.”
에단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합당한 보상이지.”
* * *
빈센트와의 협상이 끝나고 에단은 곧바로 별채로 돌아갔다.
‘조용하군.’
적의 가득한 시선과 시비를 거는 자들이 사라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는 하루하루가 시끌벅적했다.
‘근성 없기는.’
몇 번 짓밟히자 그들은 에단의 시선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에단이 혀를 차며 별채로 돌아오자 휴고와 가토는 여전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다.
“끄아! 맛있다!”
“끄으으윽……! 너무 맛있어!”
쇠를 들면서 신음을 흘리는 둘을 보자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쟤네 왜 저러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들어 운동하면서 이상한 추임새를 넣기 시작하더군요.”
한숨을 내쉰 에단이 다가섰지만 둘은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 무시하냐?”
“죄송합니다. 이것만 끝내고……!”
“기사 안 시켜 준다?”
에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쇳덩이가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다.
“바닥이…….”
네이드의 살벌한 시선이 둘에게 꽂히자, 휴고와 가토의 몸이 움찔했다.
“고, 고의가 아니라…….”
가토가 급하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에단이 귀찮은 듯 손을 흔들었다.
“됐고, 기사로 임명해 줄게.”
“가, 갑자기 말씀입니까?”
“저, 저도요?”
가토와 휴고가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기사라니.
그것도 평범한 기사가 아닌, 블란테 가문의 기사였다.
수많은 기사들이 선망하는 대상이자, 수습 기사들의 염원.
그런 꿈같던 목표가 이뤄진다고 생각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가토의 다급한 표정에 에단이 피식 웃었다.
뭘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
‘귀여운 녀석.’
이런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학생 같아 보였다.
“그래 준비하고,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해라. 야, 너도 따라갔다 와.”
에단이 멀뚱거리는 휴고를 밀어냈다. 휴고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토를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