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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43화 (43/398)

◈ [43화] 뿌려둔 씨앗 (1)

에밀라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이유가 뭐지?’

레벨린에 대한 의구심을 조금도 품지 않은 이유.

자신을 구해 줘서?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부분도 의심스럽다.

귀족이 음지에 숨어 있는 어쌔신 길드를 괴멸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단이 던진 말이 에밀라에게 의심의 씨앗을 품게 만들었다.

“크윽……!”

에밀라가 두통을 호소했다. 에단이 말없이 에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흘러가네.’

에밀라에게 심어진 암시.

대단한 건 아니었다. 정교한 세뇌 작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단순한 암시에 불과했다.

‘후반부에 풀릴 떡밥이긴 하지만.’

레벨린을 향한 에밀라의 충성심은 과할 정도다.

‘당연히 뒤가 구리지.’

후반부에 풀릴 떡밥? 개연성 붕괴?

알 게 뭐냐. 얻을 수 있는 이점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크게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과할 필요는 없다.

의심의 씨앗, 그거면 충분했다.

“무슨 속셈이야……!”

에밀라는 혼란을 부정하기 위해, 원망할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별 의미는 없는데?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어. 악명 높은 새벽의 달이 어떤 사람의 명령을 받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

에밀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에단은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것인가?

“정곡인가 보네?”

에단이 웃었다. 저 표정으로 에밀라는 자신이 새벽의 달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꼴이 됐다.

에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리고 있었다.

전투에서도, 전투를 제외한 외적인 부분에서도 에밀라는 에단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에단이 그녀 앞에서 쪼그려 앉았다. 그의 얼굴이 에밀라에게 가까워졌다.

“대체 뭘 원하는 거지?”

“원하는 게 없다니까, 왜 자꾸 의심하지? 내가 이상한 건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블란테로 온 이유는 시험을 위해서 아닌가? 나는 이겼고, 시험을 통과했지. 다른 건 사족에 불과해. 필요가 없다고. 결과주의, 실력주의, 아카데미가 원하는 게 그거 아닌가?”

에단이 에밀라의 뺨을 툭툭 쳤다.

“넌, 아니, 이제 직장 동료니까 에밀라 씨라고 불러야 하나? 에밀라 씨는 저에게 졌지 않습니까? 그것도 두 번이나.”

“…….”

에밀라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다. 애초에 에밀라가 에단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터였다.

에밀라의 패배가 모든 것을 자초했다.

‘내가 무능해서.’

실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수많은 학생과 교수들이 에밀라를 추켜세웠다.

부족하다며 채찍질을 해 왔지만, 어느 순간부터 안도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가볍게 눌러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시도 모두 패배로 돌아갔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블란테 가문에서 블란테의 자제를 암살하려 들다니.

세간에 이 일이 밝혀지면 정말 엄청난 파장이 일어나게 될 것이었다.

‘면목이 없어.’

에밀라의 상사라고 볼 수 있는 레벨린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레벨린이 쌓아 올리던 탑이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그 주범은 에밀라였다. 에밀라는 그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 줄게.”

그때 구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밀라가 떨군 고개를 들었다.

에단이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소름 끼쳤다.

“대신 조건이 있어.”

“무슨…… 조건이지?”

불안감이 치밀었다. 하지만 에밀라는 어떠한 조건이 붙더라도 이 협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불합리하다고 불평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이 모든 상황은 에밀라가 자처한 것이었다.

“별건 없고. 그냥 내가 시키는 일을 두 번만 해 줬으면 해.”

“……그게 전부인가?”

“왜, 부족해? 세 번으로 늘려 줘?”

“…….”

에밀라가 의심의 눈빛으로 에단을 쳐다봤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뭐 이상한 거 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걱정 말고. 자아도취에 빠진 공주님은 취향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아, 당연히 교수 취임 후에는 나를 좀 도와줘야겠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

에밀라가 눈을 끔뻑였다.

* * *

― 정말 그걸로 충분하겠느냐?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에단의 목적은 아카데미의 입성이다. 사건을 키운다면 레벨린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봐야 딱 그것뿐이다.

레벨린은 에밀라라는 꼬리를 자를 것이고,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갈 것이다.

그 이후로 레벨린이 에단을 경계하게 된다면 더욱 골치 아파진다.

앞으로의 행보에 걸림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니까.

‘그럴 수는 없지.’

주인공만 따라가도 온갖 기연이 수저를 들고 떠먹여 준다.

천천히 기연을 얻어먹다가 사건이 전개되기 직전, 그때부터 손을 써도 충분하다.

괜히 골치 아픈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에단이 바닥을 둘러봤다. 격전의 증거였다. 잠을 자기는 힘들어 보였다.

‘방을 옮겨야지.’

별채는 넓었고, 빈방은 많았다.

* * *

“에밀라 씨!”

늦은 새벽, 하염없이 찾던 에밀라가 돌아오자 헨리가 화들짝 놀랐다.

“대체 어디를 다녀오신 거예요!”

“……저는 괜찮습니다. 혼자 있고 싶네요.”

에밀라의 힘없는 대꾸에 헨리가 멈칫했다.

“무슨 일이…….”

“혼자 있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알겠습니다.”

헨리가 자리를 뜨면서 에밀라를 힐긋 바라봤다.

옷차림부터 모든 게 바뀌어 있었다. 의구심이 샘솟았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하아.”

에밀라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뒤늦게 통증이 찾아왔다.

전신에 멀쩡한 곳이 없었다. 다리부터 복부, 얼굴까지 모든 곳이 아려왔다.

“골고루도 때려 놨군…….”

에밀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이가 없었다. 그간 가져온 자신감이 송두리째 무너진 기분이다.

‘그래, 모든 건 사족이지.’

에단을 향한 심증과 의심. 그 모든 건 의미 없었다.

결국 에밀라는 패배했고, 패배하게 된 이상 에단의 교수 임관을 막을 명분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모르겠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에단과 레벨린, 두 사람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에밀라가 침대에 몸을 눕혔다.

* * *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이른 아침 에밀라는 초췌한 안색으로 빈센트 가문을 떠날 채비를 했다.

마중을 나온 사람은 에단과 네이드, 헨리뿐이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에밀라가 떠나는 시간이 일렀기 때문이다.

네이드는 묘한 시선으로 에밀라를 응시했지만, 에밀라는 그 시선에 일일이 반응할 기력이 없었다.

“조만간 보자고. 일 처리 좀 빨리 부탁하지.”

웃음기 서린 에단의 목소리에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렸고, 헨리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보고는 하지 못했지만, 그나마 다행인가.’

통신 수정구를 통한 보고 대신에 에밀라가 직접 개별로 보고하겠다고 나섰다.

헨리로서는 정말 안도되는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에밀라가 걱정되었다.

‘어제 그런 격전을 치르고 바로 돌아간다니.’

헨리는 아직 블란테 가문에 잔류해 있어야 했다.

에밀라가 윗선에 보고를 끝내고 지시가 내려오면 헨리가 그 뒤처리를 해야 했다.

‘집에 가고 싶다…….’

마음이 울적해졌다. 하릴없이 영지에서 시간을 때우던 때가 그리워졌다.

“그럼 이만.”

에밀라가 몸을 돌려 말 위에 올라타려 할 때, 에단이 입을 열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직장 동료일 텐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

에밀라는 대답 없이 말을 몰았다. 말 위에 탄 에밀라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헨리 씨.”

“네, 넵……?”

갑작스러운 물음에 헨리가 화들짝 놀라며 에단을 바라봤다.

“밥이나 먹고 가시죠.”

“……알겠습니다.”

그녀는 얼떨결에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 * *

식사 시간은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근데 이거…… 귀족 식탁 맞지?’

불편함과는 별개로 식탁의 구성이 난생처음 보는 형태였다.

여기저기 고기가 보이니 호화로운 식사라 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가 너무 과했다.

‘……도축이라도 했나?’

그런 의심이 들 정도로 고기가 가득했다.

헨리가 주변을 둘러봤다. 주변에 있는 사람은 에단과 에단의 수행원으로 보이는 남자 두 명이었다.

둘의 체형도 에단에 뒤지지 않을 만큼 건장했지만, 그렇다 해도 고작 세 명뿐이었다.

헨리를 포함한다고 해도 네 명에 불과했는데 음식의 양이 과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다.

“……이걸 다 먹는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헨리 씨가 갑자기 오셔서 평소보다 양이 부족하네요……. 죄송해서 어쩌죠?”

휴고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대답을 들은 헨리의 입이 벌어졌다.

‘이거…… 나 놀리는 거지?’

그러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헨리의 표정을 바라보던 에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밥들 먹죠.”

“잘 먹겠습니다!”

휴고가 해맑게 웃으며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근데 이건 먹는 게 아니라…….’

고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토는 비교적 점잖게 먹고 있었지만, 입에 넣는 즉시 고기가 식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에단도 말없이 전투적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축제라고 착각할 만큼 쌓여 있던 음식의 산이 순식간에 줄어들고 있었다.

“이따 운동하려면 빵도 먹어라.”

에단이 음식을 입 안에 잔뜩 머금은 채 말하자, 휴고와 가토가 동시에 빵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간의 경험으로 인해, 운동 전에 빵이나 감자 따위를 먹지 않으면 그날의 운동이 더욱 고되게 느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 나도 먹어야 해.’

처음에는 엄두도 안 나던 음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자 헨리는 조바심이 생겨났다.

헨리도 급하게 참전해서 꾸역꾸역 음식을 위장으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헨리 씨, 직장 생활 좆같죠?”

“커헉, 커헉!”

음식을 밀어 넣던 헨리가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처음 들어갈 때 생각한 건 이게 아닐 텐데 말이죠. 원치도 않는 오지에 발령이나 받고,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안 그런가요?”

에단은 말을 하면서도 쉬지 않고 음식을 넣고 있었다.

헨리도 눈을 깜빡이며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그러다 목이 메는지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입을 열었다.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슬프네요.”

헨리의 표정이 음울해지자 에단이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그것 참 안타까운 사실이군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설마요. 이전에 일은 단순한 비즈니스였습니다. 너무 마음에 담지 말아 주세요. 사과의 의미로 제안 하나를 드리고 싶군요.”

“제안이요?”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카데미. 그만두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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