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교수의 정체 (1)
“하아.”
헨리가 음울한 한숨을 내쉬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던 에밀라가 에단에게 패배한 것이다.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뛰어난 기량으로 교수 중에서도 상위권에 위치하는 에밀라가 블란테의 망나니 따위에게 패배하다니.
‘소문이 사실이었나?’
망나니가 달라졌다는 건 헛소문이 아니었다. 애초 에밀라는 패악질을 일삼는 망나니 따위가 이길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 에밀라를 이길 정도면 그냥 교수 시켜도 되는 거 아니야?’
억울했다. 아카데미의 교육 방침은 개개인의 역량과 실력을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검술에 문외한인 터라 검술 쪽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전투 실력만큼은 나무랄 곳이 없어 보였다.
‘조금 안 좋은 인식은 있겠지만……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점점 행복 회로가 돌기 시작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옅어졌다.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을 부정하기보다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 에밀라 님이 일어나면 한번 말해 보자. 그런데 상처가 꽤나 심각해 보이던데…….’
에밀라의 얼굴은 정말 처참했다.
뼈가 부러진 곳은 없었지만, 에단의 사정없는 주먹에 피가 튀고 살이 뭉개졌다. 아름답고 고왔던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블란테 측의 사람들도 탄식을 금치 못했다.
분명 블란테의 승리를 축하해야 하는 것은 맞았지만, 에단의 손속이 너무 과하다고 느껴지는 탓이었다.
‘끔찍했지…….’
멀리서 지켜보던 헨리도 입을 막을 정도였다. 예상 못 한 결과였다. 결과는 잔혹했다.
‘보고는…… 모르겠다.’
헨리가 문을 열었다. 당장 중요한 것은 에밀라의 건강이었다. 에밀라는 아카데미의 중요한 자산이었으니까.
“에밀라 님…… 어라?”
회복을 하고 있어야 할 에밀라가 자리에 없었다.
* * *
에밀라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 잘못이다.’
따로 상부에 보고는 하지 않았다. 레벨린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은 탓이었다.
만약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아카데미의 명예에 먹칠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위험한 녀석이다. 처리해야 해.’
블란테의 적통이 죽는다면 적잖은 파장이 생길 것이 분명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도 될 만큼 에단이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알고 있어.’
자신에 대한 정보는 모두 삭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안일한 판단이었다. 그 녀석은 분명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자신의 평정심을 흔들며 도발했다.
에밀라가 옷가지를 갈아입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는 두건을 싸맸다.
의복은 검게 통일했다. 빛도 투과되지 않을 정도의 검은색이었다.
평소의 단정하면서도 화려한 검사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죄송합니다, 레벨린 님.’
과거로 돌아온 에밀라의 안광이 서늘하게 빛났다.
* * *
― 무언가를 알고 있던 것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 흥,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느냐.
“하하, 별거 아닙니다.”
에단이 시치미를 떼자 페온이 인상을 구겼다. 에단은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 일부러 그렇게까지 한 것이냐?
“다시 말하지만 봐줄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 흥, 누구 눈을 속이려느냐. 그 애송이 가주보다 내가 더 오래 살았느니라.
“기다려 보시죠. 아직 모든 걸 보여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뿐이니까.”
에단이 창문을 바라봤다. 땅거미가 드리웠다. 완연한 밤이 되었고, 보이는 빛이라고는 은은한 달빛뿐이었다.
슬슬 손님이 찾아올 때가 됐다.
“눈치채지는 못했습니까?”
― 뭘 말이더냐?
“에밀라는 검사가 아닙니다.”
― ……뭐라고? 그럼 대체 뭐란 말이냐? 나이에 비해서 검을 쓰는 실력이 꽤나 상당하던데.
“글쎄요. 그건 지켜보면 알게 되겠죠.”
― 허, 재수 없는 놈.
슬슬 올 때가 되었다. 에단은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온다.’
이건 확신이다. 원작에 묘사된 에밀라의 성격과 에단의 도발, 모두 지금을 위한 것이었다.
에단이 슬며시 눈을 흘겼다. 그림자 같은 은영이 보였다.
“역시 왔네.”
― ……저 녀석은.
찾아온 손님을 발견한 에단이 입꼬리를 올렸다.
검은 의복으로 몸은 전부 가리고 있었지만, 체격과 풍기는 분위기가 에밀라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점은, 호흡과 발걸음 따위의 습관까지도 모두 달라졌단 것이다.
이는 원작에도 묘사되지 않았다.
검을 쓰는 에밀라와 본모습으로 돌아간 에밀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역시 뭔가를 알고 있군.”
“집착하는 여자는 매력 없는데.”
에단의 우스갯소리에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싸늘하던 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다.
“명을 재촉하는구나.”
“글쎄? 나는 아무래도 장수할 것 같은데.”
에단이 이를 드러내며 웃자, 그 모습을 본 에밀라가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쐐액!
단검이 빠르게 쏘아져 왔지만, 에단이 고개를 젖혀 피해 냈다.
일전 시험의 반복 같았다. 그때의 전투도 방금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흠, 신분 세탁한 쓰레기라는 것 정도?”
“……뒤에는 누가 있지? 블란테인가?”
“하하, 블란테가 그렇게 한가하지는 않는데 말이야. 뭐, 네 위에 있는 녀석이 꾸미는 짓이라면 좀 흥미가 있긴 하지만.”
에밀라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가 에단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전의 대결 때와는 몸놀림이 완전히 달랐다. 에밀라가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 위험하다!
페온이 다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에단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사라지는 건 착각이다.’
에밀라는 마법사가 아닌 어쌔신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한 눈속임이었다.
해결 방법은 상대의 속도와 이동 경로를 예측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고, 담이 커야 했다. 자칫 오판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할 게 분명했으니까.
‘재밌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에단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에단이 몸을 낮추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에밀라의 다리를 포착한 에단이 그대로 들러붙었다.
에밀라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에단이 미련 없이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옷가지가 떨어져 나갔다.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위험하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하하, 아까도 그 소리를 하지 않았나? 매력 없는 악당이나 지껄일 것 같은 대사를 하고 있네.”
에밀라가 다시 발을 내디디려 했지만, 이번에는 에단이 먼저 움직였다.
한 걸음 내디딤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단검을 끄집어냈다.
쐐액!
에단이 단검을 집어던졌다. 이전에 보였던 막무가내 방식이 아니었다. 에단은 마나를 정밀히 컨트롤했다.
에밀라의 눈이 커지며 단검을 좇았다.
그 순간, 에단이 다가갔다.
“좀 익숙해졌지?”
에단이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공중으로 피하기에는 방이 좁다고 생각한 에밀라가 몸을 숙였다.
그녀는 그대로 단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에단의 무릎이 더 빨랐다.
후웅―
에밀라의 허리가 크게 휘며 거리를 벌렸다.
에단은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따라붙으며 주먹을 뻗었다.
빠른 주먹 연계에 에밀라의 눈이 빠르게 굴러갔다. 하나하나가 위협적이었다.
‘망나니 따위가 아니야!’
주먹에는 마나가 서려 있어, 한 번이라도 공격을 허용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집중 안 해?”
에단이 그녀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빠악!
“크윽!”
에밀라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에단이 다시 머리채를 쥐려고 하자 에밀라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엔 에밀라가 에단에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죽을 바에야!’
후회와 회한이 밀려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뭐, 좀비라도 됐어? 동귀어진하게?”
무협지를 많이 봤네.
에단이 씨익 웃었다. 단검이 움직이는 경로에는 에단의 왼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꽈드득!
에단의 왼손이 단검을 짓뭉갰다.
‘독이 묻어 있었나 보네.’
속으로 생각한 에단이 쥐고 있던 단검에 더욱 힘을 줬다.
그 순간 에밀라는 빠르게 판단했다. 찌그러진 단검을 놓은 뒤 허리춤에서 새로운 단검을 꺼냈다.
“세계수의 가호.”
에단이 작게 중얼거렸다.
차고 있던 목걸이에서 빛이 흘러나오며, 흡수했던 에밀라의 마나가 보호막으로 바뀌었다.
지잉―
성스러운 보호막이 형성되었다. 세계수의 보호막은 에단의 주위에 있는 위협이 될 만한 모든 요소를 자체적으로 판단해 배제한다.
한마디로 에밀라를 밀어낸다는 것이다.
쩌엉―!
에밀라가 반탄력으로 튕겨 나갔다.
에단은 곧바로 따라붙어 에밀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단의 악력은 평범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에밀라가 단검을 놓쳤다. 그녀의 가녀린 팔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에밀라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그녀는 남은 손으로 복면을 뜯어냈다.
에밀라가 고통을 무시하면서 달라붙으려 하자, 곧장 에단의 무릎이 마중 나왔다.
퍼억―! 퍼억―!
에밀라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에밀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키스 시도가 너무 격렬한데?”
에단의 무릎이 멈췄다. 마지막 기회였다.
평소의 에밀라라면 갑자기 생긴 빈틈에 의심을 품었을 테지만, 그녀는 지금 한계에 내몰렸다.
에밀라가 입을 크게 벌리며 에단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이것도 독이겠지.’
공격 수단이기도 하겠지만, 자살행위이기도 했다. 저 공격을 하고 나면 에밀라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밀라가 다가오려 하는 순간.
휘리릭―!
에단의 상체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에단의 다리가 구렁이처럼 에밀라를 옭아맸다.
삼각 조르기.
일명 트라이앵글 초크.
꽈아악!
에단의 허벅지가 그녀의 경동맥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미 완벽하게 잠겼기에, 파훼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밀라의 얼굴이 당혹과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하하.”
에단이 웃으며 에밀라를 바라봤다. 에밀라가 잠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압력으로 인해 에밀라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3초가량.
“하나, 둘, 셋. 잘 자라.”
에단이 에밀라의 이마에 딱밤을 날림과 동시에 그녀는 눈을 까뒤집었다.
이내 에밀라가 완전히 정신을 잃자 에단이 몸을 일으켰다.
찌뿌둥한 허리를 풀며 에단이 말했다.
“언제까지 구경할 생각이지?”
에단의 말에 어둠 속에서 네이드가 슬며시 나타났다. 문이 열리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에밀라가 나타난 이후 소란이 적지 않았다.
미리 소리를 차단했다면 모를까, 네이드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이 정도의 소리를 포착 못 할 리가 없었다.
네이드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자, 에단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무단 침입한 주제에 말은.”
“도련님.”
“보이는 대로야. 암살 시도지, 뭐.”
“감히 블란테에게…….”
네이드가 낮은 목소리로 분노하자, 에단이 에밀라를 툭툭 건드리며 물었다.
“같은 어쌔신 출신인데 뭐 짚이는 거 없어?”
“……!”
그 순간 네이드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