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아카데미 측의 시험 (2)
에밀라의 과거가 어떠한지 에단은 알고 있었다.
‘모르는 게 더 우습지.’
에밀라도 주인공과 연계되는 캐릭터 중에 하나였다.
과거의 상처를 잊지 못한 에밀라가 주인공의 심성에 감화되어 아픔을 치유한다는 설정이었다.
‘토악질이 쏠리는군.’
에단의 성격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로? 치유?
그래, 깎아내리거나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에단이 그러지 않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당근보다 채찍을 선호했다.
“왜, 아픈 게 익숙하지 않나? 이거 이상한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별 의도는 없고…… 구를 만큼 굴렀잖아? 왜 이렇게 고고한 척을 하나 궁금해서 말이지.”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그리 크지 않았기에 에밀라에게만 들렸을 것이다.
“……나에 대해 알고 있나?”
“모를 리가. 아카데미의 설화(雪花), 뭐 그런 이름으로 불리지 않나?”
에단이 능청스럽게 웃자 에밀라의 눈에서 살기가 맴돌았다.
“……죽여주마.”
검을 드는 순간 에밀라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가 달라졌다.
애초 에단이 원하는 바였다.
이번 결투에서 이기고 난 후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물론 이래야 더 재밌기도 하지.’
에밀라가 마치 쏘아진 화살처럼 돌진했다.
에단은 재빨리 고개를 젖히며 검을 피했으나, 그 즉시 에밀라의 몸이 회전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의 검은 당장에라도 에단의 목을 베어 버릴 기세로 다가왔다.
그걸 지켜보던 첸의 발이 움찔거렸다. 이대로는 에단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에단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었다.
경로는 예측되고, 그녀의 검이 다가오는 것이 또렷이 보였다.
하니 자신의 검을 밀어 넣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쾅!
물론 그것을 견디는 것은 오직 에단의 근력이었다.
에단이 발을 더 내디디며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콰드드득!
“같은 수법에 안 넘어간다.”
에밀라의 눈이 빛나며 주변의 마나가 일렁였다.
“무섭네.”
에단이 이를 드러냈다. 물론 그도 마나를 운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의 마나 총량이 부족하다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에단의 마나 컨트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 이상으로 마나를 근력에 집중한 덕분에, 에단의 검이 조금씩 에밀라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득!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걸 알아차린 에밀라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러섰다.
힘으로 안 되면,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전략으로 바꾸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샤샤사사사삭!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른 검격이 이어졌다.
저 속에 들어가면 몸이 갈려 나갈 듯한, 폭풍 같은 검격이었다.
퉁! 퉁!
에밀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흐름이 끊긴다.’
빠른 공세는 적에게 방어를 강요하다 보니, 흐름과 기세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공격 흐름은 툭툭 끊기고 있었다. 공격이 매끄럽게 연계되지 않았고, 지점마다 에단의 검이 경로를 헝클어 놨다.
그 탓에 조금씩 에밀라의 기세가 수그러들었고, 그 순간.
퍽!
에단의 프론트 킥이 적중하며 에밀라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연이어 에단이 웃으며 킥을 날렸다. 빠르게 몸을 빼려고 했지만, 연이은 복부의 충격에 그녀의 발이 굳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검을 든 에단이 그녀를 향해 휘둘렀다.
“안 쫄아도 돼.”
에단의 검은 상당히 느렸다. 그녀는 에단이 의도적으로 검의 속도를 늦췄다는 걸 알아차렸다.
으드득.
굴욕감에 이를 갈았다.
“……감히 나를 조롱하는 건가요?”
“지금 ‘감히’를 붙일 처지는 되고?”
“후회할 겁니다.”
에밀라가 마나를 전력으로 끌어 올렸다.
에단이 어떤 자인지는 감이 잡혔다.
소문과는 달리 에단은 무능한 망나니가 아니었다.
어금니를 숨긴 야수였지.
‘죽인다.’
에단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다. 원래라면 건방진 콧대를 눌러 주고 말 생각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살아 나갈 수는 있어.’
주변에 블란테의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에단을 죽이게 되면 저 늑대들이 자신을 가만둘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밀라에게도 안전장치 하나쯤은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밀라는 지금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상태였다.
― 이건 위험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단이 웃었다. 에밀라를 도발한 보람이 있었다.
에밀라의 기세가 달라졌다. 에단이 고개를 돌려 첸을 바라봤다.
첸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빈센트가 보이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
에밀라가 움직였다. 순간 신형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보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측의 영역이었다.
에단이 고개를 숙이자 검이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그대로 하단에서 에밀라를 향해 검을 그었다.
간결하나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흥!”
하지만 에밀라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뻗었다. 에밀라의 검에는 푸르스름한 장막이 씌워져 있었다.
서걱―
검이 잘려 나간 걸 본 에단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다.
“아니, 이럴 수가!”
“이제야 표정이 볼만해지는군요. 하지만 늦었습니다.”
에밀라가 검을 뻗었다. 이제 에단을 죽이고 이 자리를 탈출하면…….
“……이럴 줄 알았냐?”
입꼬리를 뒤틀며 그녀를 바라본 에단이, 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고는 눈빛으로 자신의 하고픈 말을 전달했다.
‘가만히 있어요. 지금부터 재밌는 순간이니까.’
에단이 뻗어지는 에밀라의 검을 왼손으로 쥐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에밀라의 검에 감도는 푸른빛.
그 말인즉, 에밀라가 마스터를 목전에 두고 있는 강자라는 소리였다.
한데 에단은 저 검을 맨손으로 쥐려고 하고 있었다.
‘멍청하긴.’
에단의 바보 같은 선택을 비웃은 에밀라가 검에 힘을 실었다.
콰드드득!
불똥이 튄다. 피가 아니라 불똥이 튀고 있었다.
에단의 손에서 쇠가 갈리는 파열음이 울렸다.
손에 마나를 싣고 있었다. 에단은 아직 마나를 방출할 수 있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뼈와 근육을 질기게 만들고, 순간적인 폭발력을 만들어 낼 자신은 있었다.
‘성능 확실하군.’
― 이런 무모한…….
페온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설마 저 장갑을 저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제가 쓸모 있다고 한 게 하나 더 있죠.’
에단이 목걸이를 바라봤다. 사용법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흐트러트려!’
에단이 무기고에서 들고 나온 목걸이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세계수의 목걸이.
여러 효과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효과는 마나 실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를 충전해야 하지만.’
에단은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지 않았다.
이렇게 좋은 공급 대상이 있으니 자신의 마나가 필요할 리가 있나.
마나가 형상화되어 검으로 표출되는 이 순간이야말로 세계수의 얼마나 좋은 먹잇감인가.
대치의 균형이 무너졌다. 에밀라는 아직 마스터에 이르지 못했다.
마나의 운용 자체도 버거웠다. 그런 마나가 강제적으로 추출을 당하고 있었다. 속이 진탕되는 것은 당연하다.
“커헉!”
에밀라의 몸이 비틀거렸다. 균형이 넘어가자, 에단이 손에 쥔 검을 그대로 끌어당겼다.
비틀거리는 에밀라가 에단의 품에 안겼다.
“이거 어쩌지?”
이제 시작인데.
퍽!
에단의 무릎이 에밀라의 명치에 꽂혔다.
“커헉!”
에밀라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큰 일격이었다.
‘의지력이 좋네.’
에밀라가 거리를 벌리려고 들었다. 느낌은 확실했다.
실상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에밀라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전같이 기민한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에밀라의 발은 움직였다.
하지만 에단은 그녀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빠악!
에단의 발이 그녀의 정강이를 후렸다. 이미 대미지가 쌓인 상태였다.
에단의 프론트 킥을 얻어맞자 에밀라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에단이 그녀의 중심으로 파고들었다.
퍽! 퍼벅! 퍼버벅!
리버샷으로 포문을 연 펀치의 연계. 에단이 즐겨 사용하던 펀치 콤비네이션이었다.
대망을 장식하는 어퍼컷에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그 순간, 에단이 에밀라의 은빛 머리칼을 붙잡아 당겼다.
에밀라가 힘없이 당겨졌다.
에단의 잔혹한 손속에 관중들이 침음을 흘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단은 에밀라를 그대로 감아 메쳤다.
쿵!
먼지가 뭉게뭉게 퍼질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룬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이전의 트라우마가 상기된 것이다. 하지만 에단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에밀라의 정신력은 우습게 볼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지만, 아직 눈은 살아 있었다.
‘편하게 보내 줄 수도 있지만.’
조르기 같은 종류의 기술을 이용한다면 고통 없이 기절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서브미션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에단이 에밀라의 몸 위에 올라탔다. 에단의 허벅지가 에밀라의 갈비뼈를 압박했다.
“끄어어억…….”
에밀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압박감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또다시 충격이 이어졌다.
에단의 주먹이 에밀라의 얼굴을 노렸다.
쾅!
주먹이 사정없이 꽂히며 피가 터져 나왔고, 자비 없는 공격에 에밀라의 눈에서 흰자위가 떠올랐다.
에단이 멈추지 않고 다시 파운딩을 이어 나가려고 할 때.
척.
첸의 검이 에단의 앞에서 멈췄다. 그제야 에단이 공세를 멈췄다.
“거기까지입니다.”
첸의 저지에 에단이 히죽 웃었다.
“말리는 게 너무 늦습니다. 이러다가 사람 잡겠네.”
“…….”
시험이 막을 내렸다.
* * *
시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에단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간 에단이 보여 준 파격적인 행보와 패배를 모르는 전투가 인상적인 탓이었다.
에단이 모룬에게 승리를 거뒀을 때에도 적지 않은 파장이 일어났다.
에단의 평판은 수직으로 상승했고, 에단의 입지는 크게 높아졌다.
블란테 가문이 에단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시험에 대해서는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교수.
블란테는 폐쇄적인 가문이 아니다. 변방에 위치해 있지만, 대륙 내에서도 입김이 강하기로 유명한 가문이었다.
당연히 최근 아카데미가 어떤 평판을 받고 있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각국의 기재들이 모이는 전도유망한 집단.
그곳의 교수라면 응당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하여 이번에는 패배를 예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에단이 만용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괜히 일을 벌여 블란테라는 이름에 먹칠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예측은 빗나가 버렸다.
에단은 승리했다.
교수는 생각보다 뛰어났으며, 마스터를 목전에 둔 강자였다.
하지만 그런 강자를 상대로도 에단은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줬다.
그 모습이 블란테의 기사들에게는 큰 자극제가 되었다.
야만적이고, 손속 없는 그 모습이 가슴에 불을 지핀 것이다.
“……놀랍더군.”
“별거 아니네요.”
에단이 히죽 웃으면서 말하자 빈센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칭찬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손속이 과했어.”
“봐줄 만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저도 목숨을 위협받기는 했고요.”
“……그 점에서는 할 말이 없군. 확실히 과한 것은 상대도 마찬가지였지. 만일 네가 큰 상처를 입었다면 아카데미도 무사하지 못했을 게다.”
빈센트의 안광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멀리서 지켜봤기에 빈센트도 알고 있었다. 대결 후반부에 에밀라의 공세에 살의가 담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과가 잘됐으니까 된 거죠, 뭐.”
에단이 씨익 웃었다. 빈센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책임을 물을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빈센트가 에단을 호출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그 손은 어떻게 된 거지?”
빈센트가 에단의 왼손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단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