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첫 번째 기연 (2)
별채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느닷없이 찾아온 평화는 익숙하지 않았다. 가토와 휴고는 여유로움이 달갑기는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류태신이 에단의 몸으로 눈을 뜬 뒤, 그들의 생활 양식은 오직 고강도 트레이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반드시 에단이 있어야만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토와 휴고는 이미 운동 중독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루라도 운동을 하지 않으면 만족이 되지 않았다.
“……열다섯, 이제 끝이잖아. 교대해.”
“잠깐만, 조금만 더 쥐어짜고.”
휴고가 승모근에 쇳덩이를 짊어진 채 몇 회 더 앉았다 일어섰다.
긴 쇠막대에 거대한 쇳덩이가 끼워져 있는 독특한 형태였는데, 에단은 이 물건을 ‘바벨’이라고 칭했다.
‘호오, 역시 실력이 대단하네. 첫 작품에서 이 정도의 퀄리티가 나올 줄이야.’
물건을 받자마자 에단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반면 휴고와 가토는 별다른 감상을 느끼지 않았다. 독특한 모양새이긴 했지만, 특별해 보이지는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직접 운동을 시작하자 전혀 다른 자극을 느낄 수 있었다.
중량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게 되니 운동 효과도 배로 늘어났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문의 야장들은 모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것이다.
에단이 주문한 물건을 받아 보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빨리 비키라니까. 체온 떨어지잖아.”
가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휴고를 재촉했다. 하지만 휴고는 싫다는 듯 바벨을 놓지 않았다.
장비의 여유가 부족하다 보니, 이런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고는 했다.
결국 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벨을 내려놨다. 바벨이 지면에 떨어지면서 큰 굉음을 일으켰다.
“아, 큰일 났다…….”
“너…… 괜찮아. 도련님은 안 계셔.”
에단은 바벨을 함부로 던지는 것에 굉장히 예민했다.
“그런데 요즘 도련님은 뭐하고 계시지?”
“글쎄, 연무장에는 잘 안 보이는 것 같던데.”
훈련 중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단이, 최근 들어서는 연무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지?”
휴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음…….”
에단은 말없이 나뭇가지를 세워 두고 있었다.
평범하게 세워 두는 것은 아니었다. 나뭇가지를 하나하나 지정한 위치에 던져서 세워 두고 있었다.
그러고는 조약돌을 던져 나뭇가지를 쓰러트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마나 수련의 진수를 알려 줄 것처럼 말하더니, 페온은 전혀 다른 훈련을 시켰다.
뭔가 허송세월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 의심하지 말거라.
에단의 생각을 읽었는지 페온이 입을 열었다.
― 마나는 단순히 육체의 움직임에 국한되지 않는다. 너는 육체의 강인함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 지금은 그게 큰 장점으로 작용하겠지만, 추후에는 너의 목숨을 위협할 것이야.
“뭐 별말은 안 했습니다만…….”
에단은 별다른 말 없이 조약돌을 던지며 나뭇가지를 쓰러트렸다.
실력은 점점 늘어 갔다. 단순히 힘껏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닌, 손가락 하나하나의 감각으로 돌을 던지고 있었다.
마나를 싣고, 마나를 통제한다.
대충 무슨 감각인지는 알 것 같았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뭔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것 같았다.
에단이 잠시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 갑자기 어딜 가느냐?
“떠오른 게 있어서요.”
생각대로라면 조금 더 재밌는 방법이 될 것 같았다.
* * *
샥― 샥― 샥― 샥― 첨벙.
에단이 찾아간 장소는 호수였다.
‘역시 되네.’
에단이 가볍게 손을 풀었다. 에단의 손에는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가 들려 있었다.
기교를 부릴 필요는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마나의 세심한 컨트롤이었다.
에단이 손목의 스냅과 손가락의 힘만을 이용하여 돌멩이를 던졌다.
쐐액―
돌멩이가 비행하며 물 표면과 접촉했다.
마치 물 위를 유영하듯, 돌멩이는 부드럽게 한참을 나아가다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 …….
페온은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히 에단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요.”
에단이 피식 웃으며 다시 돌멩이를 쥐었다. 지천에 널린 것이 돌멩이 따위였다. 훈련 도구 걱정은 필요 없었다.
* * *
“……그렇게 된 겁니다.”
헨리가 눈을 굴리며 말을 끝냈다. 최대한 억울함을 피력하며 불합리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에밀라는 그런 헨리의 속사정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 그저 천천히 음식을 음미하고 있었다.
‘……제길, 콧대 높기는.’
헨리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카데미 교수.
각국의 인재들을 지도하는 만큼, 실력과 인성적인 측면에서 보증을 받은 자들만이 교수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명망 높은 직업이다 보니, 수많은 엘리트들이 아카데미의 교수를 지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원자들에게는 입학생의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아카데미는 그만큼 엄격했다.
‘귀족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카데미에서는 대부분 뒷배경을 비밀에 부치지만,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은 그 어떤 명마보다 빠르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에밀라의 대한 소문은 어떠한 것도 떠돌지 않았다. 에밀라는 그저 묵묵히 학생들을 지도할 뿐이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뜬금없이 나타나 뛰어난 실력과 아름다운 외모로 학생들을 휘어잡자, 에밀라를 시기하는 시선도 자연스레 많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에밀라의 뒤를 조사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소득은 얻지 못했다.
‘몰락한 귀족이거나 비슷한 거겠지, 뭐.’
에밀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함부로 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말투는 까칠하고 날이 서 있었지만,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았다.
“……식사 중에는 조용히 하셨으면 좋겠군요.”
“네? 아…… 알겠습니다.”
헨리는 결국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에밀라는 음식을 먹으면서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마치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여기에 변변한 장소가 별로 없어서.”
“……아니요. 괜찮습니다. 어서 식사나 마치시죠. 그건 그렇고 내일 블란테 가문으로 찾아가면 되는 건가요?”
“아, 넵. 내일 오전에 찾아가는 것으로 협의를 끝냈습니다.”
“아카데미를 무시한 건방진 망아지를 혼내 주고, 빨리 돌아가고 싶군요.”
에밀라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그만큼 아카데미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
헨리는 안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식사를 마친 에밀라가 위로 올라갔다. 헨리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무 의자에 푹 쓰러졌다.
“후, 진이 다 빠지네……. 뭐야, 다 먹었잖아?”
맛없다는 기색으로 먹은 것치고는, 에밀라는 접시에 있는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비워 냈다.
정작 말하기 바빴던 헨리는 얼마 먹은 것도 없었다.
“저, 저기요, 음식 몇 가지 주문 더 가능할까요?”
“미안한데 이제는 안 돼요. 재료가 다 떨어져서.”
“아…….”
하루 종일 먹은 것도 없는데…….
서러워진 헨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 * *
다음 날, 에단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평소 에단은 화려한 의복보다 몸을 움직이기 편한 연무복을 주로 입었다.
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대접하는 만큼, 단색의 연무복보다는 조금 더 화려한 옷을 들어 올렸다.
“……사건이 끊이지가 않는군요.”
옷을 입는 것을 기다려 주던 네이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활기가 생긴다는 것이지.”
에단이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답했다.
말은 태평하게 했지만, 적어도 이번 상대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걸 에단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뛰어난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귀도 밝네.”
“……모룬 님과는 또 다를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하하, 지금 날 걱정해 주는 건가?”
에단이 웃으며 네이드를 바라봤다. 에단의 몸은 이미 완성이 되어 있었다. 연무복 사이로도 오밀조밀한 근육의 윤곽이 드러났다.
전사의 몸이었다. 그걸 슬쩍 쳐다본 네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 걱정이 필요 없다는 소리이신가요?”
“아니. 나는 그런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기다려 봐. 결과로 증명해 줄 테니까.”
“허허.”
네이드가 힘 빠진 웃음소리를 내었다.
자신의 걱정이 무시당해서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감이 들었다.
‘도련님은 이번에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주실는지.’
에단의 성장은 눈부셨다. 적지 않은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천재를 만나 온 네이드도, 에단 같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괴물을 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성장이 아닐 수도.’
에단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한 경지를 이룬 네이드는 그것을 간파할 통찰력이 있었다.
“아, 네이드. 검 하나만 준비해 줘.”
이번에는 조금 색다르게 갈 생각에 입꼬리를 올리는 에단이었다.
* * *
“설마 또 결투가 벌어질 줄이야.”
이번에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결투가 아니었다.
사실 결투가 아닌 시험이었지만, 블란테에서는 그런 구분을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외지인과의 대결이라는 것이었다.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감정싸움이자 이권 다툼이 아니었다. 같은 블란테끼리라면 누가 이기더라도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이는 외부인이며, 블란테는 높은 자존심을 자랑하는 검술 가문이었다.
외부인에게 당하는 패배는 큰 치욕이었다.
그렇기에 분위기는 한층 더 엄숙해졌다.
많은 기사들이 모였고, 그들이 풍기는 기도는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그 사이에는 휴고와 가토도 있었다.
“도련님도 대단하시군…….”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에단의 행보는 보면 볼수록 기가 질렸다.
승부욕 같은 감정은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그런 사사로운 감정을 느끼기에는 에단이 너무 높았다.
“동감이야……. 그런데 너는 어제 어디 갔다 온 거야?”
“알고 있었어?”
“저녁부터 무장을 하고 갔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도련님이 호출하셔서.”
“도련님이?”
“어. 나도 처음에는 이유를 몰라서 준비를 하고 나갔지.”
“뭘 했는데? 나 몰래 무슨 특별훈련 같은 거 한 거 아니야?”
휴고가 섭섭하다는 얼굴로 묻자 가토가 피식 웃었다.
처음에는 서먹서먹한 사이였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말도 섞기 싫어하던 둘이었지만, 어느덧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아니더라고.”
“그럼 뭔데?”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너도 짐승 같지만, 도련님은 정말 괴물 같다는 게 느껴지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나도 설명하기 힘들다니까. 잔말 말고 그냥 보기나 해.”
가토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의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진짜 무서운 사람이야.’
가토가 기억을 상기했다.
며칠 전 밤, 에단의 부름에 따라나섰을 때였다.
당시에는 의아함이 먼저 들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그때 에단의 손에는 투박한 검이 한 자루 들려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가토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가토는 에단과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