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명가 격투천재-35화 (35/398)

◈ [35화] 짜여진 판 (2)

헨리는 정신없이 산을 타고 내려갔다.

저택으로 올 때는 안락하게 마차를 얻어 타고 왔지만, 지금은 그러한 시간적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사실은 조금도 괜찮지 않은 상황이다. 암담하다. 하지만 이러한 암시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버티지를 못할 것 같았다.

정신없이 내려와 마을에 도착한 헨리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급하게 뛰어 내려오느라 꼴이 엉망이었다. 먼지와 낙엽 따위의 것들이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털어 내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지금은 한시가 급했다.

“하아…….”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이 사건을 전달했을 시 어떤 소리를 듣게 될지 가늠이 되지가 않았다.

헨리가 질끈 감았던 눈을 뜨고 수정구에 암호 코드를 입력했다.

“안 받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교신이 되지 않는다면 변명거리가 생겨나지 않을까, 하는 의미 없는 기대를 걸어 봤다.

하지만.

― 뭐가 안 받았으면 좋겠다는 거죠?

그와 동시에 통신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헨리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수정구 너머를 응시했다.

― 갑자기 연락한 이유가 뭔가요, 헨리 씨?

목소리에는 날이 서 있었다.

레벨린.

분명 자신과 입사 동기였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고속 승진을 거듭해 지금은 쳐다보기도 어려운 상관이 되었다.

‘언젠가는 저 높은 콧대를 눌러 주고 싶었는데.’

암울함이 차올랐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일을 수습해야 했다. 헨리가 최대한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블란테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그게 정말인가요?

레벨린이 반색했다. 하지만 목소리 너머에서는 의심이 조금 묻어났다.

레벨린은 헨리와 입사 동기였다. 당연히 이번에 주어진 임무가 성사시키기 어려운 임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레벨린은 그의 상관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기에 의문이 들었다.

아카데미를 향한 블란테의 입장은 언제나 초지일관이었다.

대놓고 부정하거나 적대하지는 않았지만, 고운 시선을 보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당황과 의심이 함께 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말이 맞다면.

헨리가 거둔 성과는 적지 않았다. 블란테의 이름은 결코 가볍지 않았으니.

― 정말 잘됐군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교수로는 누구를 초청하기로 했죠?

“…….”

레벨린의 질문에도 헨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멘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레벨린의 미간이 좁혀졌다.

―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요? 헨리 씨, 대답을 해 주시죠.

레벨린이 연달아 재촉하자 헨리가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단입니다.”

― 뭐, 블란테 가문이 아무나 교수진으로 보내진 않겠…… 뭐라고요?

레벨린이 마치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헨리의 고개가 더더욱 숙여졌다. 바닥을 뚫을 것 같은 기세였다.

“에단 블란테입니다.”

* * *

“하아…… 이런 사고를 일으키다니.”

레벨린은 치밀어 오르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눌렀다.

사고를 쳐도 너무 큰 사고를 쳐 버렸다. 이번 일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레벨린의 고민이 깊어지는 순간, 은발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아름다운 외모와 대비되는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

“에밀라 씨, 괜찮겠습니까?”

“네. 제가 가고 싶습니다. 블란테라고 했죠?”

“네. 상황이 피곤해질 뻔했는데, 에밀라 씨라면 믿고 맡겨도 안심이 될 것 같네요.”

“아카데미를 상대로 저런 행패를 부리는 걸 묵과할 수 없을 뿐입니다.”

에밀라의 눈이 차게 식었다.

* * *

“호오.”

블란테 가문의 무기고 앞에 선 에단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격투기 선수로서 전 세계를 누비면서 웬만한 관광 명소는 전부 가 봤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훌륭한 구조물이었다.

금속으로 된 거대한 문과 그에 수놓아진 화려한 문양들.

언뜻 봐도 엄청난 거금이 들었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얻을 건 얻어야지.’

에단이 상대하게 될 교수진.

그중에서 상대가 누군지 정확하게 알 방도가 없었다.

에단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원작의 흐름과는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하지만 대략적인 예측은 가능하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미 에단은 자신의 무력을 밝혔다.

그러니 아카데미 측은 더욱 안전을 기할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목록에 올라오는 대상이 몇 명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지만.’

누가 오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면 될 뿐이다.

에단은 상대가 누가 되었든 질 생각이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력의 강화가 필요했다.

‘얻을 거는 정해 두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들었다. 대충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것들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무기고였다.

저 중에 하나만 가져올 수 있다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나밖에 안 되겠죠?”

에단의 물음에 빈센트가 눈살을 좁혔다.

“욕심이 과하구나. 원래라면 그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해 본 소리입니다.”

에단은 빠르게 체념하고 문 앞에 섰다.

무기고 앞에 서자 마나가 에단에게 흘러들어 왔다.

― 오랜만에 보는구나.

페온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과거의 감상에 빠진 것 같았다. 당연히 에단은 그런 페온을 배려해 줄 생각이 없었다.

‘괜찮은 거 있으면 말 좀 해 봐요.’

이미 뭘 꺼내 올지는 결정했지만, 혹시 몰래 빼돌릴 만한 것들이나 예상보다 좋은 물건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럴 리는 없겠지.’

소설의 내용 자체가 주인공 몰아주기였는데, 그런 떡밥이 이 상황에서 풀리기를 기대하는 건 욕심이었다.

‘애초에 그게 필요하기도 하고…….’

“그곳에 피를 한 방울 떨어트려라.”

빈센트의 말에, 에단이 허리춤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손바닥을 그었다.

‘언제 적 감성인지 모르겠군.’

에단의 피가 문양에 떨어지자, 화려하게 수놓아진 문에 빛이 감돌았다.

끼기긱.

소름 돋는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담담하게 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한번 당부하마. 가져오는 것은 하나다.”

빈센트의 거듭되는 경고에 에단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무기고 안에는 수많은 무기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무기를 보는 안목이 부족한 에단이 보기에도 하나같이 뛰어난 상등품이었다.

가치 높은 무기에는 저마다의 기품이 있었다.

화려한 장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무기 고유의 분위기.

‘볼 건 없군.’

에단은 소설 내용 중, 무기고의 초입에는 눈여겨볼 게 없다는 부분을 떠올렸다.

하여 에단은 천천히 발을 옮기지 않았다.

무기들을 훑어보는 걸로 그만이었다.

― 잠깐!

그때 페온의 목소리가 에단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 잠깐 저쪽으로 가 보자꾸나.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에 에단이 얼굴을 구겼지만, 페온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 ……역시 맞구나.

페온의 얼굴에서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은데 어쩌죠.”

― 너는 인간이 맞긴 하느냐…….

에단의 칼 같은 반응에 페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저 장갑 한 짝을 들어 봐라.

에단은 페온이 가리킨 장갑을 바라봤다.

검은색 가죽 장갑에 먼지가 소복이 올라가 있었다.

나머지 한 짝은 어디 갔는지, 장갑은 왼손용 하나만 남아 있었다.

“별로 가져가고 싶지 않은데요.”

에단이 단칼에 거절 의사를 내비치자, 페온이 역정을 냈다.

― 예끼! 그냥 들라면 좀 들어!

페온의 반응에 에단이 큭큭 웃음을 흘리며 장갑을 들었다.

쌓인 먼지를 대충 털어 냈지만, 평범한 외관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껏 봐 온 무기들은 각자 저마다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 장갑은 아무리 봐도 별달리 특별한 게 없었다.

― 이걸 써 봐라.

“가져갈 생각 없다니까요.”

― 잔말 말고 껴 보기나 해.

결국 에단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왼손에 장갑을 착용했다.

“오…….”

에단이 장갑을 끼자, 장갑이 손에 착 달라붙더니 이내 피부에 흡수된 것처럼 스며들어 보이지 않게 되었다.

― 내가 쓰던 녀석이다. 원래라면 두 짝이 한 쌍이어야 하지만…… 이런 곳에 있었군.

에단이 말없이 사라진 장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러면 하나 더 챙겨도 모르겠네.”

―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구나. 그래 맞다. 그러니까 일단 챙기라고 한 소리다. 그 장갑은 설사 마스터가 와서 보더라도 간파하지 못해. 그건 이미 너에게 생착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이 장갑은 뭐죠?”

― 나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우연히 가게 된 곳에서 정말 우연하게 얻은 물건이야. 받을 때 듣기로는 타이탄의 물건이라고 하던데, 정확하지는 않다.

“……타이탄?”

― 믿기 힘들면 믿지 않아도 된다. 나도 듣고 넘긴 얘기니까.

하지만 에단은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타이탄의 단서가 여기서 나온다고?’

타이탄은 소설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설정이었다. 아직 제대로 밝혀지진 않았지만, 주인공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기 전에야 풀리는 떡밥 정도로 생각했다.

‘이상한데…….’

원작 소설은 먼치킨 소설이다.

당연히 온갖 기연과 기회, 영약과 무기들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되어 주인공의 발판이 된다.

그런데 타이탄이라는 엄청난 설정이 블란테에 숨겨져 있었다. 주인공도 얻지 못한 무기를 에단이 얻게 되었다.

‘페온도 소설과 다르게 갑자기 나타났지.’

블란테 에피소드에서도 휴고만 조금 등장했을 뿐, 페온이나 다른 것들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었다.

원작 소설을 끝까지 읽지 못한 에단으로서는 그 이상 알 수가 없었다.

뭔가가 거슬렸다. 단순히 불쏘시개용 소설이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거슬리는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알아내기는 힘드니까.

“그래서 기능은 뭐죠?”

에단의 물음에 페온이 씨익 미소 지었다.

― 이제야 그걸 물어보는구나. 그 장갑은 타지 않는다.

“……그게 전부입니까?”

― 그런 반응을 할 줄 알았다. 끝까지 들어라. 타지 않고, 얼지 않으며, 찢어지지 않는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 무투의 방어가 해결된다는 소리다. 그 어떠한 마법 공격도, 그 장갑이 보호하는 부분에는 피해를 주지 못한다. 마나를 두른 검과 창도 장갑이 보호하는 부분에는 생채기를 내지 못해.

“허.”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 이런 미친 게 여기서 나와?’

대충 들은 것만으로도 이 장갑이 얼마나 미친 성능을 가진 것인지 유추할 수 있었다.

‘단순히 스펙을 올리는 게 아니다.’

피해를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그 범위가 왼손에 국한되기는 하겠지만, 그마저도 엄청났다.

― 짝이 없는 게 아쉽구나. 그 장갑은 한 쌍이어야 제대로 된 가치가 드러나는데 말이지…….

페온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합니다.”

예상 못 한 뜻밖의 수확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동굴에서 페온을 데려온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었다.

에단은 다시 원래의 목표물을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더 걸어 들어가고 나서야 에단이 멈춰 섰다.

그러고는 주저하지 않고 무언가를 곧장 집어 들었다.

― ……설마 이걸 가져가려고 하는 게냐?

페온은 에단이 꺼내 든 것을 보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단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습니다.”

필요한 것은 얻었다.

이제 남은 건 결투의 대비뿐이다.

‘설레는데.’

싸움에 나서기 전은 언제나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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