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짜여진 판 (1)
헨리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이 모든 것이 이미 짜여진 판이었다는 것을.
지금 타이밍에 에단이 등장하는 것, 헨리의 반응과 대화의 흐름까지.
모두 사전에 준비되어 있던 것이다.
헨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에단도 미리 고지를 받은 상태였다.
‘애초에 모를 리가 없지.’
헨리는 원작에서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비중은 있었다.
‘이유는 뭐 차차 나오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헨리의 성향.
‘모질지 못하고, 나쁜 말도 못 하지만. 자신의 소신은 있는.’
신념 있는 소시민.
이 단어가 딱 헨리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미 굴러간 눈덩이는 더 이상 크기를 키우기 힘들 정도로 커진 상황.
이 상황을 모면하기도, 부정하기도 힘들다는 사실을 헨리는 알고 있을 것이다.
에단이 헨리와 눈을 마주쳤다.
에단의 인상에 헨리는 어째서인지 주눅이 든 모양새로 목을 움츠렸다.
‘이게 블란테의 돼지 망나니라고? 듣던 거랑은 너무 다르잖아!’
아무리 소문이 믿을 게 못 된다고 할지라도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다른 정도가 아니었다.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에단은 단기간에 몸을 완성했다. 이미 불필요한 지방 덩어리는 모두 걷어졌고, 옷으로는 에단의 근육질 몸을 모두 가릴 수 없었다.
혹독히 단련된 전사의 몸이었다. 그와 더불어 블랙 오우거를 처치하면서 얻은 피어의 힘 덕분에 위압감 또한 은은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에단의 시선에는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 자신감은 근거 없는 거만이 아닌, 스스로의 믿음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그 기백에 헨리는 주눅이 들었다.
에단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며 손을 건네자, 당황하던 헨리가 손을 맞잡았다.
‘……거칠어.’
에단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
피부가 거칠었다.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한 손이었다.
한 번도 몸을 단련한 적 없는 헨리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전사의 손이었다. 검을 버리고 술과 음식을 탐하는 주정뱅이의 손 따위가 아니었다.
에단은 맞잡은 손을 놓고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그러고는 헨리를 향해 나름의 정중한 손짓으로 앉으라고 권유했다.
“상당히 당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에단은 여유로운 어투를 잊지 않았다. 빈센트는 그런 에단의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어디 한번 해 보거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에단은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헨리 님은 입이 무거우신가요?”
에단의 물음에 헨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여기서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단은 헨리의 대답을 잠시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저와 가문 모두 헨리 님을 신용하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우리 블란테 가문은 아카데미에 대해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째서이죠? 아카데미는 수많은 국가에서 모두를 위한다는 취지로…….”
“그게 문제죠. 권력자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단순히 그런 이유로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권력이 모이는 곳은 언제나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에단은 다리를 꼬면서 말을 이었다.
“뭐, 이건 우리 가문의 개인적인 견해이니,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헨리 님을 보아하니 아직 부패한 것 같지는 않군요.”
“아…… 감사합니다.”
― 미친 능구렁이 같구나.
페온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간 페온은 에단이 미친놈처럼 싸우기만 하는 모습만 지켜봐 왔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협상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당연히 그간 느낀 에단의 모습과는 심한 괴리가 있었다.
그러한 감상을 하는 것은 빈센트와 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빈센트와 첸도 뭔가 잘못 먹은 것처럼,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뛰어난 전사는 평화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저희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시던 말씀입니다.”
헨리의 시선이 빈센트에게로 향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런 대답을 할 수는 없기에, 빈센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하지만…… 평화 속에서도 뛰어난 전사를 만들기 위한 준비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간에 퍼진 저에 대한 소문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달라졌음을 주장하고 싶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았고요. 물론 과거에 저지른 치부를 모두 덮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증명해야죠.”
에단의 눈이 가라앉았다.
“제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 아카데미를 이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신가요?”
헨리는 스스로 말을 내뱉고도 놀랐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얼굴 위로 후회의 기색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단은 웃음기를 머금은 채 답변했다.
“왜, 안 됩니까?”
“……네?”
“고작 그런 일로 시도하면 안 되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블란테는 언제나 고고해야 합니다. 거슬리는 먼지가 있다면 털어 내야 하는 법이죠. 설마 지금까지 블란테를 향한 아카데미의 존중이 모두 거짓이었다, 그런 말씀은 아니시겠죠?”
에단의 안광이 서늘해졌다. 의도적으로 피어도 조금 풀자, 헨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 대화를 할 때 나는 없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의 분위기를 에단이 조성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그런 생각은…….”
“그렇다면 그만한 증거가 필요한 법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저는 가문 내에서 그 어떤 형제보다 강합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헨리의 시선이 빈센트를 향했다. 빈센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일세. 최근 장남인 모룬과 결투해서 승리했지.”
“……그럴 수가.”
모룬의 대해서는 헨리도 알고 있었다. 빈센트 가문을 섭외하기 위해 온 파견이었으니, 그 정도의 조사야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충격이었다. 망나니로만 알고 있던 에단이 그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니.
‘믿을 수가 없어……. 거짓말일 수도…….’
헨리가 에단과 빈센트, 그리고 첸을 번갈아 봤다.
저들의 표정에서는 거짓의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들이 거짓말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블란테의 적통이자 최강자인 제가 아카데미에 교수로 함께한다는 것은 아카데미 측에 최대한의 예우를 한다는 증거입니다. 한데…… 아카데미 측의 입장은 다른 것 같군요.”
“…….”
“그렇다면 저희 측도 대응을 할 생각입니다. 블란테는 당한 치욕을 배로 갚습니다.”
“……지금 협박하시는 것입니까?”
“협박이요? 협박이란 이런 게 아닙니다. 이건 단순한 경고죠. 제가 만약 협박을 한다면…….”
에단은 살기를 일순간 끌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여동생이 있더군.”
“……!”
헨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심약해 보이기만 하던 흐리멍덩한 동공이 살기로 채워졌다.
‘마음에 드는군.’
만일 이 도발에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면 진정으로 실망했을 것이다.
“지금 하시는 말의 의도가 뭡니까?!”
헨리가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지만, 에단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앉으시죠.”
“……실수한 겁니다.”
“아직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얘기를 듣고 결정하시죠.”
“……일단 들어 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블란테의 입장에 당황하신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물러설 수는 없군요. 이미 저는 아카데미에서 한 번 굴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정도의 성의 표시와 대응까지 했는데, 다시 말을 바꾼다면 섭섭한 정도로는 끝나지 않겠죠.”
“……그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뭔가요.”
“블란테에 관해 알고 있다면 그 악명도 잘 알고 있겠죠. 당황하신 것은 알지만, 감정적인 대응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 제가 찾아온 것이죠. 단순한 협상을 합시다.”
“협상?”
“이전에 말씀하셨듯, 아카데미에서는 실력이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진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레벨린 씨와는 입사 시기도 비슷한 것 같은데, 벌써 직급 차이가 꽤 나지 않습니까?”
“윽…….”
“심지어 뒤늦게 임용된, 그 유명하다는 에밀라 씨와도…….”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이 뭐죠?”
“검술 교수 한 명을 불러 주시죠.”
“네?”
에단이 이가 드러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교수를 쓰러트리고 제 실력을 증명하겠습니다.”
* * *
대화가 끝난 뒤 헨리는 부리나케 저택을 떠났고, 에단은 빈센트와 독대하고 있었다.
“……나를 많이 놀라게 하더구나.”
“놀라실 것까지야.”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 언변은 어디서 배운 거지? 평소 네 행실을 보면 책을 많이 읽을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하, 농담도 재밌군요. 이런 걸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알아서 터득하는 거죠.”
거짓은 아니었다.
류태신으로 살던 시절, 격투기 단체와 각종 매체 언론들은 단순한 능구렁이 수준이 아니었다.
온갖 정치질과 금전적인 장난질을 통해 류태신을 조종하려고 들었다.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협상하는 법도 알고 있어야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지, 언변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무시무시한 놈…….
충격을 받은 것은 페온도 마찬가지였는지, 아직도 이 소리를 하고 있었다.
“좋다. 이것도 그냥 넘어가 주도록 하지. 그렇다면 하나만 묻겠다.”
“말씀하시죠.”
“아카데미에 가려는 이유가 뭐냐?”
빈센트의 표정에서는 복잡함이 묻어났다.
그 이유는 대충 알 것 같았다.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에단의 대답에 빈센트는 물론이거니와 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는 알고 있겠지?”
“결투에서 한 번 이겼다고 모든 것을 가져갈 생각을 하면 그게 도둑놈 심보죠. 더 이상 귀찮은 일에 연루되는 것은 사양이고…… 아시지 않습니까, 편지.”
“……정말 그게 이유라고?”
“네. 그게 이유입니다. 괘씸해서 잠을 잘 수가 없네요. 기대되지 않습니까?”
“뭐가 말이지?”
“그토록 혐오하던 오빠가 검술 전담 교수로 갔을 때 리사가 지을 표정이.”
“허…….”
빈센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끝까지 속을 숨기는구나, 능구렁이 같은 녀석.’
하지만 빈센트는 그런 에단의 모습이 괘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빈센트가 작게 웃었다.
“확실히 조금 기대가 되긴 하는군.”
빈센트는 에단의 의도대로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큭큭, 그렇죠?”
“……제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자 에단이 물었다.
“첸 경은 기대 안 됩니까?”
그 물음에 굳어 있던 첸의 입가가 휘어졌다. 첸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차가운 인상인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리니까 어딘지 모르게 기괴했다.
“그럴 리가요.”
첸의 대답에,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헨리는 멍한 표정으로 응접실 밖을 나왔다. 응접실 밖에서는 여전히 살벌한 기색을 뿜어내고 있는 기사들이 헨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헨리는 샐쭉한 표정으로 복도를 지나갔다.
“저희가 영지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괘,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갈게요.”
기사의 권유를 마다한 헨리가 빠른 발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빨리 가야 해…….’
상황에 휘둘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다니…….
헨리는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려 했지만, 암담한 상황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