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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명가 격투천재-33화 (33/398)

◈ [33화] 대가 (2)

“그게 정말인가요?”

헨리의 얼굴에 활기가 생겨났다.

‘드디어 나에게도 기회가 생기는구나.’

아카데미 직원으로서 근무를 시작한 지도 어언 3년째.

근무 연차는 제법 쌓였다고 볼 수 있지만, 그녀를 향한 대우는 상당히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처사지…….’

작위와 인맥을 보지 않고 실력과 성과만을 따지는 것이 아카데미의 신조였지만, 현실은 달랐다.

‘작위와 인맥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으니까.’

봐주는 뒷배가 있는 동기들은 수많은 지원을 등에 얹고 벌써 날개가 돋친 듯 성장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아직도 말단 직원이었다.

말단 직원이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배를 곯을 일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오지 파견 근무를 보내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성과가 없으면 업무 난이도가 점점 낮아져야 하거늘, 점점 높아지고만 있었다.

1년 전 마지막으로 배정받은 임무만 봐도 그랬다.

블란테 가문 소속 기사, 아카데미 검술 교수 초청.

‘이게 말이 돼?!’

블란테가 어떤 가문이던가.

철혈의 기사가 가주로 있는 검술 명가로서 대륙에서 내로라하는 무력 집단이었다.

드높은 위명과 함께 악명도 엄청났다.

듣기로는 적의 목을 참수하고, 그 피를 그 자리에서 마신다는 소문도 있었다.

폐쇄적인 집단인 만큼 무수한 소문이 뒤따랐다.

악랄하고 살벌한 풍조를 지녔다고 알려진 블란테.

그런 피도 눈물도 없는 사자 무리에 자신을 던져 놓았다.

애초에 블란테 가문은 아카데미의 존재 자체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아카데미의 교수 초빙이나 시연 같은 온갖 청탁에도 무시로 일관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한데 헨리는 블란테 가문과 원활한 협의를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임무의 기간도 없었다.

그 탓에 1년째 기약 없이 마을에서 하루하루를 술로 축내며 살아갔다.

블란테의 저택에 들어선 적은 한 번 있었다.

물론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지만…….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찾아와 달라고 하시더군요. 언제가 편하시겠습니까.”

차가운 인상의 기사의 물음에 헨리는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지,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어떻게, 바로 준비하면 될까요?”

헨리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미 알딸딸해진 몸은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바로잡은 헨리가 기사를 바라봤다.

우왕좌왕하는 헨리의 모습에도, 기사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바로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마차는 밖에 준비해 놨으니. 곧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네, 넵! 바로 가겠습니다!”

기가 죽은 헨리가 소심하게 대답하자, 기사는 그 말을 끝으로 주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서워.’

이전에 블란테 가문에 방문했을 때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같은 사람인지 의심되는 괴물 같은 기사들의 시선을 받을 때면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일만 성사가 되면.’

드디어 임무의 달성이다.

아카데미는 철저하게 성과 위주로 평가했다. 성과와 결과를 그 누구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당연히 블란테 가문을 교수진으로 초청하는 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다.

이번 일을 무사히 끝마친다면 헨리의 입지도 상당히 높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꼭 잡아야 해!’

헨리의 눈에 불같은 열정이 타올랐다.

* * *

꿀꺽.

헨리가 침을 삼켰다. 블란테 가문의 저택은 산맥의 중심부에 있었다.

험지가 있는 저택이었다. 헨리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위치 선정이었다.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건 따로 있었다.

험지에 자리 잡았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웅장한 크기의 문.

그 문 앞에 선 헨리는 압도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괜찮아. 이미 한 번 겪어 봤잖아.’

처음보다는 괜찮았다. 헨리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기회가 찾아올지 알 수 없었다.

헨리는 마차에서 내려 정문 앞에 섰다.

앞장서 있던 기사가 내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거대한 문이 열리면서 쇠가 맞물리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헨리는 그 소리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문이 열리자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들이 대열을 갖춘 채 서 있었다.

모든 기사들의 시선이 모두 헨리를 향해 있었다.

헨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 * *

“그래, 내가 시킨 건 모두 했겠지?”

빈센트의 말에 첸이 작은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네. 말씀하신 것은 모두 준비해 뒀습니다. 아마 표정이 볼 만할 겁니다.”

“큭큭, 오줌을 지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준비된 기사는 빈센트의 지시하에 이뤄진 작업이었다.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무력시위.’

상대방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행위였다.

지금부터는 협상의 자리였다.

제아무리 블란테 가문이 검술 명가로 위명 높다고 한들, 아카데미는 대륙 국가들이 힘을 합해 만든 집단이기 때문에 겁박으로 타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말이지.’

겉으로만 할 수 없을 뿐이지, 세상은 원리와 원칙대로는 흘러가지 않는다.

표면상으로는 규칙에 얽매여 있지만, 그 규칙은 사람이 수행한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넓어진다.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한다. 하지만 단순히 무력만을 숭상해서는 이렇게 세력을 확장할 수 없었다.

무력을 활용한 정치.

‘무서운 놈.’

본래 빈센트는 에단에게 이렇게까지 전폭적인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아카데미의 파견 직원을 호출한 후, 권유가 먹히지 않는다면 그걸로 끝을 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이 뒤에 붙인 말 때문에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블란테 가문이 그 정도 일도 못 하는 건 아니겠죠? 거래로 얻은 보상인데 최선을 다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빤한 도발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빈센트는 그 도발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휘둘릴 줄이야.’

괘씸한 감정도 들었지만, 그렇게 나쁜 감정이 치밀지는 않았다.

“이제 곧 들어오겠군.”

“그럼 준비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빈센트와 첸이 은연중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물론 살기까지 끌어 올리지는 않았다.

범인에게 살기를 분출했다가는 생명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거래에 앞서 상대의 기를 죽여 놓을 심산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치기에는 아카데미 파견 직원의 반응이 너무 강렬했다.

“히이이이익!”

들어오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듯 비명을 내지른 파견 직원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명의 마스터가 은연중에 내뿜는 마나와 기백은 장난이 아니었다.

* * *

“여기까지가 저희 아카데미가 보장해 드리는 내용입니다……. 혹시 다른 질문 사항이 있으신가요?”

빈센트는 말없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고 있었다.

반면 헨리의 얼굴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빈센트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보이기라도 하면 첨언이라도 하겠지만, 빈센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흠…….”

빈센트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콧숨만 내쉬었고, 그런 반응이 헨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헨리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너무 무서워.’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마스터와 대면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아카데미 직원으로서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이골이 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마스터의 기백을 마주하자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교수진은 이미 아카데미 측에서 결정을 하고 온 것인가?”

“네, 넵? 아닙니다! 저희 아카데미는 블란테 가문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있습니다. 검술 가문으로 명성이 자자한 블란테 가문에서 보내 주시는 분이라면, 누구든 충분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신뢰합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빈센트의 입가에 작은 호선이 그려졌다. 빈센트가 처음으로 긍적적인 감정을 드러내자 헨리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어떤 이를 교수로 보내든 우리 마음이라는 말이지?”

“물론입니다! 저희 아카데미는 빈센트 가문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원래라면…… 은퇴한 기사들을 보내 주려고 했지만…… 아카데미 측의 입장이 상당히 마음에 드는군. 예상외야.”

빈센트의 말에 헨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야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우리 블란테에서도 그만한 호의로 대답하는 것이 예우겠지.”

“감사합니다!”

“그래, 그렇다면 교수로는 에단을 보내도록 하겠네.”

“넵! 그럼 바로 당사자분과 계약서를…….”

헨리가 말을 잇다 말고 순간 멈칫했다.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에단…… 에단이라고?’

떠올랐다.

블란테 가문의 미친 돼지 망나니.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온갖 패악질을 일삼는 구제 불능의 쓰레기.

많은 사람들이 욕하지만, 블란테라는 배경 탓에 함부로 거론하지 못하는 아카데미에서도 유명한 망나니였다.

‘분명 입학시험에도 떨어지지 않았나?’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누구든 입학시험에 합격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정 입학과 편법을 방지하기 위해, 응시생은 직위와 가문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만 했다.

하지만 에단은 그 규칙을 모두 무시했다.

시작부터 자신의 가문을 나불대더니 시험 자체도 개판으로 치러 치욕을 당했으며, 시험이 끝난 이후로도 온갖 협박질로 아카데미를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그런 에단을 교수로?’

헨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이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

“잠시만요. 그건 문제가…….”

“설마 이제 와서 교수 초청 건 자체를 무른다는 것인가?”

“그게 아니라…….”

“그건 우리 블란테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이해해도 되겠지?”

“아, 그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에단 님 같은 경우는 세간의 평가도 있고, 이미 입학시험을 치른 경험이…….”

“설마 블란테의 적통인 에단을 무시하는 건가?”

빈센트의 얼굴이 노기로 물들었다. 은연중에 흘리던 기운에 조금씩 살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헨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다 못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그, 그게 아니라…….”

헨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접객실의 문이 열렸다.

“대화 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헨리가 고개를 돌렸다.

야수 같이 굵은 선을 가진, 하지만 아직 앳된 티를 모두 벗지 못한 미남자가 접객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블란테의 가주와의 자리였다.

이렇게 함부로 난입하는 행위는 큰 무례였으나, 정작 가주인 빈센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마침 잘 찾아왔구나. 온 김에 네가 직접 인사하거라.”

에단이 헨리를 바라보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블란테 가문의 둘째, 에단 블란테입니다.”

평범한 인사였다. 격식을 차리긴 했으나 과하지 않은 평탄한 인사.

‘뭐든지 첫인상이 중요한 법이지.’

계획을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은 성격을 감출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교수로 합격하면 모난 성격이 알아서 드러날 테니까.

‘어떻게 시작할까.’

인사하는 에단의 입가에는 음흉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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