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대가 (1)
‘……엄청나게 먹는군.’
비단 에단을 대상으로 한 소리는 아니었다.
휴고와 가토 또한 걸신이 들린 것처럼 눈앞의 음식들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더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이드가 시선을 던지자 하녀 한 명이 고개를 숙이며 나갔다.
벌써 추가 주문을 몇 번이나 넣은 상태였지만, 에단은 별다른 말 없이 묵묵히 음식들을 입에 밀어 넣고 있었다.
‘식욕도 영향이 있었나?’
원래 음식은 잘 챙겨 먹는 편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만한 운동량을 소화해 낼 수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에단은 아직 성장기인 상태이다 보니, 영양 과잉을 걱정할 때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먹는 양이 늘었다.
이렇게 많이 먹었음에도 아직도 에단의 위장은 음식을 더 먹고 싶다는 듯 꼬르륵거렸다.
‘맛이 없는 건 아니지만.’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평소에 먹던 한식이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런 투정을 부릴 어린아이가 아니었기에 에단은 묵묵히 식사를 지속해 나갔다.
그 뒤로 몇 번의 접시를 더 비우고 나서야 식사 시간이 끝났다.
접시가 산처럼 쌓였고, 그것을 바라보는 하녀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후.”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포만감과 함께 나른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래서 용무가 뭐였지?”
“……이제야 물어보시는군요. 대련 직후에는 왜 가주님을 찾아뵙지 않은 겁니까?”
“급할 게 없으니까.”
“……오만하시군요.”
“저자세로 나갈 필요성을 못 느끼는 거야. 저자세로 나가 봤자 목줄밖에 더 묶여?”
에단은 수많은 능구렁이들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현대의 지구에는 계급이나 작위는 없었지만, 그보다 더 심한 구렁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때 깨달은 점은.
‘휘둘려서는 안 되지.’
자기가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저자세로 나가게 되면 끝까지 상대에게 붙잡히게 된다.
에단은 가주의 제안을 모두 완수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 보상을 얻느냐뿐.
‘그게 문제지.’
즐거운 고민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는 사안이었다.
“후……. 편지가 하나 왔습니다.”
“편지?”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가토와 휴고의 얼굴에도 궁금한 기색이 드러났다.
에단이 말없이 받아 든 편지 봉투를 뜯고 내용물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문자였다. 하지만 에단의 기억 때문인지 글을 읽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발신인이…… 리사.’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주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주인공의 히로인 중 하나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붉은 장미라는 아명을 지닌 아카데미의 꽃 중 하나이자, 블란테 가문의 셋째였다.
에단은 편지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편지의 내용은 최대한 격식을 갖춘 내용이었지만, 실상의 내용은 정반대였다.
[나는 가문의 도움을 받고 싶지도 않고, 관계되고 싶지도 않다. 한 번 떨어진 에단 오라버니는 이곳에 올 생각도 말고, 카론이 오더라도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아버지에게는 심심한 안부를 전한다.]
― 당찬 여자애로군.
페온이 허허,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에단은 말없이 편지를 바라보다가 네이드에게 건넸다.
“네이드.”
“네, 도련님.”
“내가 아카데미 시험을 본 적이 있나?”
“3년 전 입학시험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결과는 떨어졌을 테고.”
“참담했죠.”
네이드가 덤덤하게 대답을 하자 에단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시험 내용은 뭐였지?”
“……정말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니, 대충은 나. 그런데 뭔가 좆같은 기분이 들어서, 제대로 들어야겠어.”
“시험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괴성을 지르시면서…….”
“거기까지.”
에단은 어지러움을 느끼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읽어 봐.”
에단이 편지를 네이드에게 건네줬다.
“……역시 리사 님이시군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버르장머리 없는 동생,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지.”
계획이 정해졌다.
다음 행선지는 아카데미였다.
* * *
“그렇게 결투가 끝났습니다.”
“허…… 듣고도 믿을 수가 없군.”
허리를 세우고 첸의 말을 듣던 빈센트가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빈센트의 얼굴에는 아직도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남아 있었다.
“……경지를 뚫고, 나이를 먹으면서 감정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결투를 보니 다시 느껴지더군요.”
“무슨 말인가?”
“승부욕이라는 감정이 들었습니다. 눈앞의 상대가 가주님의 피를 이으신 도련님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블란테 가문의 가신이 아닌, 그저 한 명의 기사로서 검을 뽑고 싶더군요.”
“……허허.”
빈센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첸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함께 검을 수행해 왔고, 가문 안에서 수많은 일을 함께 겪었다.
빈센트가 아는 첸은 결코 가볍게 말을 내뱉지 않는다.
하니 그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그러한 생각이 들었다는 거겠지.
‘……역시 갔어야 했군.’
체면을 신경 쓰지 말고 결투를 직접 참관할 걸 그랬다.
에단의 건방진 모습 때문에 괜히 자존심을 세웠다.
아니면 차라리 자신이 직접 결투를 주관해도 괜찮았을 테다.
‘건방진 녀석.’
에단은 아직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 점이 영 못마땅했다.
자기가 정리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그 맹랑한 모습에 기가 찼지만, 에단은 모든 발언을 직접 증명해 냈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그것이 바로 블란테의 방식이지.’
하지만 동시에 작은 걱정도 들었다.
‘검을 쓰지 않는다라…….’
정확히 말하자면 블란테가 검을 숭상하는 것은 아니다.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하는 강자존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블란테 가문이 검술 명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에단이 검을 소홀히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과거 검을 멀리하고 외도를 택한 블란테 가문의 사람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 끝이 좋지 않았기에, 빈센트는 에단이 검을 쥐기를 바랐다.
똑똑.
그때 때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왔습니다.”
들려오는 것은 에단의 목소리였고, 빈센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가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들어오너라.”
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춘 뒤 몸을 돌려 영주실을 나가려 했다.
영주실을 나가면서 에단과 눈이 마주쳤는데, 첸의 눈빛은 마치 타오르는 것 같았다.
에단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미소를 머금고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늦었구나.”
“급하게 올 필요는 없었으니까요.”
“허…….”
한마디도 지지 않는군.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건을 수습하라고 했다만, 수습이 아니라 사건을 더 커지게 만든 것 같더구나.”
“저를 둘러싼 의혹을 떨쳐 냈으니 됐습니다.”
“후폭풍은 신경 쓰지 않는 게냐.”
“누가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애송이를 일일이 신경 씁니까?”
“크하하하하! 말 한번 가관이군. 네 형이 애송이라는 말이더냐?”
“네. 뭐, 보셨다면 아셨을 텐데 아쉽네요.”
에단이 히죽 웃으며 답했다.
빈센트는 블랙 오우거의 처참한 사체를 보고 이미 느꼈다.
에단은 여전히 망나니였다. 하지만 힘과 가치관을 지닌 망나니였다.
“좋다! 그 정도는 되어야 블란테의 혈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래, 그래서 견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냐?”
“아니요. 신경 씁니다. 그러니까 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대륙 연합 아카데미. 그곳에 들어가야겠습니다.”
에단의 말에 빈센트의 이마에 주름이 생겨났다.
“갑자기 거길 가려는 이유가 있더냐?”
“편지가 왔더군요.”
에단이 자신의 손에 들린 편지를 흔들었다.
“편지?”
“리사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읽어 보시겠습니까?”
에단이 편지를 건네자 빈센트는 말없이 편지를 읽어 나갔다.
편지를 읽어 나가던 빈센트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어이가 없군.’
편지를 다 읽은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그래서 동생한테 이딴 소리 좀 들었다고 아카데미까지 찾아간다고?”
“네. 보시다시피 제가 속이 좀 좁아서요.”
물론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기 위해서는 결국 원작 주인공과 얽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주인공이 있는 아카데미 인근으로 가는 것은 필수였다.
‘원래라면 조금 더 천천히 가 보려고 했지만.’
편지를 읽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의 허락을 바라는 게냐?”
“설마요.”
“그럼 뭘 원하는 거지?”
“전폭 지원해 주시죠.”
“허, 전폭 지원? 아카데미에서는 신분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블란테’ 아닙니까. 그 정도의 영향력은 행사해 주실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편법을 써서라도 네 입지를 만들어 달라고 말하는 게냐?”
“그게 제 요구 사항입니다.”
빈센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그는 본래 아카데미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검을 수련함에 있어서는 블란테 자체적으로도 충분했고, 실전 경험도 충분히 쌓을 수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의 주요 목적은 인재 양성도 있지만, 결국 국가 간의 화합과 친목이 우선시되었다.
그중에는 정치적인 요소도 다분히 포함되어 있었고, 빈센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계급의 높낮이가 없고, 가문의 배경이 의미가 없다고는 하지만, 결코 의미가 없지 않다는 사실도.
그렇기에 의문을 가졌다.
빈센트와의 내기에서 이긴 지금이 에단에게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바닥을 치던 입지가 넓어졌고, 확실시되던 승계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에 아카데미에 입학이라니, 빈센트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정 입학을 원하는 거냐?”
“아니요. 시험은 치릅니다. 하지만 학생으로 갈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 나랑 말장난을 하자는 게냐?”
“말은 끝까지 들으시죠. 학생이 아니라 교수로 갑니다.”
“……뭐라?”
에단의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 겁니다, 아버지.”
대화를 끝낸 에단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아, 오늘 중으로 무기고도 열어 주시죠. 그건 별개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에단이 영주실 밖으로 나갔다.
“……어이가 없군.”
폭풍이 몰아친 것 같았다.
에단의 요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단의 나이는 아직 10대.
아카데미의 신입생 중에는 20대도 적지 않았다.
대륙 각지의 인재들이 모이는 장소이니 전혀 이상할 것 없었다.
당연히 아카데미의 주축을 담당하는 교수진도 매우 호화롭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거 블란테 가문에도 교수직 권유가 들어왔었다.
검술 교수와 자문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하지만 빈센트는 거절했다.
블란테 가문은 검술 가문이었다.
굳이 정치색이 얽힌 아카데미에 발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리사가 가문을 떠나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에단도 멋대로 시험을 치렀다가 가문에 먹칠을 하고 돌아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라고는 생각했지만, 다시 아카데미에 입학을 한다고 했을 때는 실망의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에단은 전혀 뜻밖의 소리를 덧붙였다.
교수로 들어가겠다니…….
고작 10대의 나이에 불과한 녀석의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다.
하지만…….
‘불가능하진 않지.’
평소라면 고민도 해 보지 않을 사항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빈센트와의 내기 끝에 자신의 요구를 주장할 권리를 챙겼다.
막무가내로 요구했다면 거들떠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나 들어오도록.”
빈센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사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영지에 머무르고 있는 아카데미의 관계자를 불러야겠어.”
제의를 받아들이려면 당사자를 불러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