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압승
― ……미친놈.
절로 침음이 흘러나왔다.
페온은 무투가다.
검의 이점을 버리고 무투를 택한 만큼, 모룬을 향한 에단의 공격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걸 독학으로 깨우쳤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이건 혼자서 수련하고 써먹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펼친 무리수가 아니란 말이다.
철저한 계산을 통해 확신했기에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이었다.
상대의 무릎을 작살내고, 중심을 무너뜨리고, 그대로 전투를 끝내는 일련의 과정.
에단의 전투는 극히 단조로웠지만, 그만큼 실전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실전성이라는 것은 이론으로 확립할 수 없는 종류였다.
‘물어본다고 한들 의미는 없겠지.’
대체 어쩌다가 블란테 가문에서 이런 녀석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페온은 생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장해 왔다.
냉병기가 판치는 시대에 무투술은 소외됐고, 그만큼 페온은 많은 고난 끝에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남들과 같이 검을 들었다면, 진즉에 넘어섰을 벽이었다.
그렇기에 페온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자신의 후손이었지만, 살아생전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이를 먹으니 쓰잘데기 없는 생각이 드는군.’
페온은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 냈다.
에단은 말없이 모룬을 바라봤다. 죽지는 않았지만 모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시체처럼 몸이 축 늘어진 데다가, 벌어진 가랑이 사이에서는 누런 액체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린내가 연무장 내에 퍼졌지만, 아무도 코를 막지 않았다.
여기서 불쾌한 티를 내고 나서의 후폭풍을 견뎌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모룬을 발로 밀어냈다.
모룬의 몸이 힘없이 밀려났다.
“얘, 계속 패?”
“……아.”
에단의 물음에 첸이 정신을 차렸다.
에단은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나마 보이는 감정이라고는 미약한 불쾌함뿐이다.
첸은 그 모습에 떨떠름하게 검을 올렸다.
“제가 보증한 이번 결투의 승자는 에단 도련님입니다.”
간략한 승리사였다.
그러나 기사단장인 첸이 보증한 승리의 증명이었다. 가주를 제외한다면 첸의 보증을 반박할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단은 목을 풀며 걷기 시작했다.
인파가 갈라지며 길이 열렸다.
그들의 얼굴은 당혹과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쯤 있을 텐데.’
에단이 고개를 돌리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안 올 녀석이 아닌데.
‘찾았다.’
에단의 눈꼬리가 휘었다. 사람 사이에 몸을 숨겼지만, 숨겨질 존재감이 아니었다.
에단이 카론을 향해 다가갔다.
카론이 헛숨을 들이켜며 뒷걸음질을 쳤다.
에단이 발걸음의 속도를 올리며 카론의 면전까지 다가갔다.
“나,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결백을 주장하는 그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어, 그러겠지.”
에단은 카론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는 거야. 계속 지금처럼만 하라고.”
에단이 카론의 어깨를 툭 치고 몸을 돌렸다.
카론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보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분명 자신의 분풀이 대상이던 망나니였지만, 어느새 처지는 뒤바뀌어 있었다.
카론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이제 더 이상 반론의 여지도 없었다.
에단은 더욱 강해졌다. 형제 중 가장 강하다는 모룬도 에단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저 자리에 서 있는 게 카론이었다면, 더욱 끔찍한 꼴을 당했을 것이었다.
* * *
에단은 별채로 돌아왔다.
이제 별채에서 지낼 이유는 없었으나, 본채의 어수선함이 싫었다.
별채는 조용했다.
하녀 몇 명과 그를 총괄하는 네이드.
그리고 에단의 휘하에 있는 가토와 휴고가 전부였다.
‘바로 가주를 만나서 협상을 해도 되지만…….’
그 전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앞으로의 행보는 신중함을 기해야 했다.
‘여기서 정체되면 안 된다.’
그럼 개죽음밖에 되지 않는다.
블란테 가문에서 가만히 있는다면 조금 더 강해지겠지만, 가문이 몰락하며 함께 무너져 내릴 터였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서 가문을 살릴 방법을 찾는 한편, 원작 주인공의 기연을 뺏어야만 했다.
판을 바꾸기 위해서는 판의 중심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때마침 원작 흐름상 큰 에피소드가 벌어질 시기였다.
‘하나하나 준비를 하고 싶지만…… 망할 원작이.’
원작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흘러가는 내용이 심각하기 그지없어도, 온갖 기연을 독식하는 주인공이 우연찮게 상황을 해결하고, 히로인의 애정을 얻게 되는 내용으로 진행이 된다.
원작에서의 사건과 에피소드는 주인공을 조명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짜증이 나는군.’
정보가 부족했다. 결국에는 몸으로 부딪쳐야 했다.
알고 있는 정보는 주인공이 가져가게 될 기연과 아이템들.
‘내가 먹는다.’
비록 완결까지는 읽지 못했기에 모든 걸 알고 있진 않았다.
‘스토리로 따지면 80프로 정도 읽은 거 같은데.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지.’
하지만 원작 주인공이 착실히 빌드 업을 하는 부분은 충분히 나와 있으니,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뭐,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남이 자신을 앞서 나가는 꼴을 볼 생각도 없었다.
에단은 정상에 올라가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런 성향은 류태신이었던 선수 시절에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있는 모습을 볼 생각은 없었다.
“운동이나 할까.”
머리가 복잡할 때는 역시 근육을 혹사해야 했다.
* * *
연무장에서는 휴고와 가토가 대련 중이었다.
둘은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곁에 에단이 있어 그 빛이 바랜 감은 있지만, 블란테 가문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둘의 성장은 매우 빨랐다.
쉬익!
가토의 목검이 휴고의 앞을 지나갔다. 한 번의 공격을 흘린 휴고가 다시 달려들려 했지만, 가토는 쉽사리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휴고가 목검을 피하느라 젖혀진 허리를 세우며 달려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토의 찌르기가 휴고의 미간을 노렸다.
하지만 그런 것에 당하지 않겠다는 듯 휴고가 몸을 크게 젖히며 텀블링했다.
단순한 텀블링에도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다.
“……짐승이냐.”
“죽을 뻔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속도 그대로 목검에 찔렸다면 아무리 휴고라도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히 피할 줄 알고 한 거지.”
가토가 씨익 웃자, 휴고도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밥은 먹고 하냐?”
에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휴고와 가토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람은 결투의 결과를 궁금해하며 에단에게 다가갔다.
에단이 이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별채에는 소문이 잘 퍼지지 않았다.
소문에 발이 달리려면 사람이 필요했는데, 상주하고 있는 이가 부족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련의 결과는…… 역시 이기셨군요.”
에단이 말없이 웃어 주자, 가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었다.
‘괴물 같은 사람.’
눈앞의 휴고도 괴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에단을 볼 때면 휴고가 일반인처럼 보였다.
그만큼 에단이 짧은 시간 내에 판도를 많이 바꿔 놨다.
“몸이나 풀어 볼까?”
“저희 대련 지금 끝났…….”
“그래서?”
휴고가 소심한 반발 의사를 내뱉으려 하자, 에단이 그의 말을 딱 잘라 냈다.
“……하겠습니다.”
애초에 거절 따위는 상정하지 않았다.
연무장에는 다양한 크기의 쇳덩이들과 바위들이 산재해 있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조금 더 제대로 된 장비들로 구색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블란테 가문의 야장들은 뛰어났지만, 철저한 규칙 아래서 무기를 만들었다.
수련용 검 하나를 가져오려고 해도, 절차가 까다로웠다.
그런데 현재 가문 내 에단의 입지로는 바벨이나 원판 따위를 주문하기는 어려웠다.
‘이제 달라졌지만.’
이번 보상을 받기 전에 제대로 된 운동 장비도 구비를 해 둘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는 아쉬운 대로 이렇게라도 운동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해.”
휴고와 가토가 인상을 찌푸리며 눈앞의 바위를 번쩍 들었다.
“하나.”
에단의 구호에 맞춰 둘이 동시에 앉았다.
“둘.”
“끄어어억!”
휴고와 가토가 신음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흠.”
에단의 구호가 멈췄다.
가토와 휴고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얘네가 머리를 굴리네?”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저 목소리가 진짜 힘들 때 나오는 곡소리인지, 아니면 조금 더 편하게 가려고 하는 수작질인지.
두 사람에게는 애석하게도, 에단은 수작질을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자, 잠깐…….”
가토가 뒤늦게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에단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아직 바위의 여유분은 남아 있었다.
에단이 바위 하나를 번쩍 들더니 휴고가 들고 있던 바위 위에 얹었다.
“꺼헉!”
이번에는 제대로 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에단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토의 바위 위에도 추가로 바위를 얹어 줬다.
“끄허억!”
가토의 입에서도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해, 안 앉고?”
가토와 휴고는 에단의 목소리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 악마 같은 녀석.
‘이 정도는 해야 훈련이 되죠.’
에단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애초 이런 훈련쯤은 휴고가 충분히 견딜 수 있다.
태생부터 다른 녀석이다. 이 정도는 혹사라고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의외는 가토였다.
가토는 소설 내에서 등장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엑스트라 1.
그런 녀석이 이렇게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는 것에 내심 놀랐다.
‘기회를 잡았다는 건가.’
그만큼 준비가 됐다는 뜻이겠지.
에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견딜 수 있다는 것은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둘을 경험한 에단이 보장할 수 있었다.
“하나!”
에단의 구령 소리가 살벌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새 연무장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한층 성장한 체력 덕분에 어지간한 대련으로는 지치지 않던 휴고와 가토도 그대로 지면에 널브러졌다.
어느 정도 훈련 강도가 올라가자, 에단도 홀로 운동을 진행했다.
에단의 팔 위에는 바위 네 개가 올려져 있었다.
강해진 근력 때문에 이 정도가 아니면 훈련이 되지 않았다.
‘밸런스도 잡히고 나쁘진 않지만…….’
비효율적이었다.
후웁!
마지막 세트를 끝낸 에단이 바위를 살포시 내려놨다.
괜히 집어던졌다가 연무장이 손상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강해지시는 걸까…….’
휴고는 존경 반, 두려움 반이 담긴 눈으로 에단을 응시했다.
처음에는 이 정도로 멀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득히 멀어져 있는 기분이 들었다.
‘많은 게 달라졌어.’
자신은 하인 중에서도 천대받던 하인이었다.
천애 고아로 블란테 가문에 거둬진 것 자체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에단이 자신의 삶을 뒤바꿔 주었다.
에단의 삶도 휴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지만, 에단은 가문 내에서 버림받은 자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에단이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단 하루도 훈련을 소홀하게 한 적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갑자기 튀어나온 휴고의 감사 인사에 에단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 뭐 실수했냐?”
에단의 반응이 너무 덤덤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헤헤, 아닙니다. 그냥 그러고 싶었습니다. 아무래도 운동이 힘들어서 그랬나 봅니다.”
“싱겁기는.”
에단이 웃으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도련님.”
때마침 네이드가 찾아왔다.
이제 슬슬 다시 움직일 시간이 다가왔다.
“마침 잘 왔네. 밥부터 먹자.”
운동 후 단백질을 거를 수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