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형제의 질투 (2)
블란테 가문 내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연무장.
주로 직계 혈족들과 정식 기사들이 단련하는 장소였다.
일반 기사나 수습 기사들은 올 수 없는 곳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대연무장에 도착한 에단은 주변의 모습을 확인하고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역시나.’
대연무장은 평 기사도 특별한 사유 없이는 오지 못하는 곳이다.
규정상 막아 둔 것은 아니었다.
직계 혈족과 그들의 직속 기사 위주로 모여 있는 특성 탓에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에단과 같이 토벌에 참가한 토벌대원들.
가토를 제외한 수습 기사들의 얼굴이 보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
사실대로 증언한다 한들, 가문의 사람들은 믿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
블란테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며, 가문에 먹칠하기를 일삼던 망나니가 블랙 오우거를 처치하다니.
이미 모룬을 중심으로 이뤄진 가문의 권력 구도에 균열이 생겨났다.
대부분은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처치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토벌대원이라고 한들 그들은 검 한 번 휘둘러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에단은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저들은 자신의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에단은 뒤통수를 얻어맞고도 웃어넘길 만큼 머저리가 아니었다.
“어이, 재밌어 보이네?”
에단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인기척을 느낀 자들이 고개를 돌렸고, 에단의 모습을 확인한 모룬의 미간에는 주름이 잡혔다.
“네가 여긴 무슨 일이지?”
“그걸 몰라서 묻나?”
“큭큭, 뒤늦은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 건가?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변명? 내가 변명을 하려고 온 거 같아?”
에단은 더 이상 모룬을 향해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참을 생각도 없었고.
에단의 가시 돋친 언행에 모룬의 얼굴에도 힘줄이 돋아났다.
“변명이 아니라면 뭐 하러 온 거지? 이미 모든 증언은 끝났어. 너는 명예로워야 할 토벌에서 거짓말과 수작질로 가문의 명예를 실추했다.”
“거짓말과 수작질이라. 쟤네가 그러든?”
모룬을 바라보던 에단의 시선이 수습 기사들을 향했다. 수습 기사들은 고개를 숙이며 에단의 시선을 피했다.
“흥, 쓸데없는 짓 마라. 이제 와서 다시 저들을 겁박하려는 거냐? 저들은 너 따위 거짓말쟁이와 달리 명예를 아는 자들이다.”
“거짓말쟁이라……. 그 말 책임질 자신은 있고?”
에단의 싸늘한 눈이 모룬에게로 향했다. 서늘한 기운을 느낀 모룬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미 다 끝났는데 무슨 책임을 진다는 말이지?”
“병신, 겁먹었냐?”
“……뭐라고?”
“쫄았냐고, 덩치만 큰 머저리 같은 새끼야.”
에단의 언행은 거침이 없었다.
모룬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끌어내기에는 이게 제격이었다.
류태신은 트래시 토크라면 이골이 나 있는 선수였다.
― 무서운 놈…….
페온은 에단의 언행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귀족가 자제란 녀석이 어찌 칼 밥 먹고 다니는 용병보다도 입이 거칠었다.
“왜 거짓말쟁이가 지껄이는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을까?”
에단이 고개를 들이밀며 비아냥거렸다. 모룬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동생이라고 봐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얼씨구, 봐주는 거 맞아? 겁먹은 게 아니라? 밑에도 쪼그라든 것 같은데.”
“너 이 자식!”
폭발한 모룬이 주먹을 휘둘렀다. 감정이 실린 탓에 동작이 컸고, 군더더기가 많았다.
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에단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 모룬의 주먹을 이마로 받아 냈다.
모룬은 건장한 덩치에 걸맞게 주먹도 컸다.
당연히 실린 힘도 적지 않을 터.
에단은 그만한 각오를 하고 주먹을 받아 냈다.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그런데 생각보다 충격이 덜했다. 아니, 덜한 정도가 아니었다. 머리로 정타를 받아 냈음에도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 없었다.
모룬의 주먹이 약한 것은 아니었다.
‘맷집이 괴물이 됐군.’
― 설마 이런 효과도 생길 줄이야…….
페온이 말을 잃었다.
블랙 오우거의 생명력을 흡수하면서 맷집 또한 덩달아 상승한 것 같았다.
모룬의 주먹을 이마로 받아 낸 에단은 입꼬리를 올린 채 모룬을 바라봤다.
“덩치랑 안 맞게 솜 주먹이네?”
에단의 비릿한 미소에 모룬은 이를 갈았다.
빠드득.
“……그렇게도 죽는 게 소원이라면 들어줘야지.”
모룬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검치고는 그 크기가 거대했지만, 시퍼렇게 서 있는 날은 진짜였다.
“결투를 신청한다.”
모룬의 말에 에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아.”
한편 심상치 않은 둘의 분위기를 보며 네이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멍청한 선택을 했군.’
본래대로라면 이 말은 에단에게 해야 하는 말이었다.
가문의 장자인 모룬의 힘은 결코 얕잡아 볼 것이 아니었으니.
카론과는 경우가 달랐다. 카론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한들 모룬의 털끝에도 스칠 수 없었을 테니까.
반면에 에단이 카론을 이긴 것은 반쯤은 요행에 가까웠다.
창의적인 공격과 허점을 노리는 변수로 카론을 몰아붙여 얻어 낸 승리였다.
정상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면 에단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네이드는 기억을 상기했다.
다시 생각해도 충격이었다.
천재라고 칭송받던 수많은 자들을 조우해 왔지만, 겉만 번지르르 한 녀석들이 대다수였다.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일정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하지만 도련님은 다르다.’
철없는 망아지라고만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에단을 봐 온 네이드의 생각이었다.
갱생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망나니.
검을 무서워하는 검술 가문의 자제.
하지만 에단은 한순간에 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바뀐 뒤에 보여 준 모든 행보가 파격적이었지만, 역시 가장 컸던 것은.
‘블랙 오우거.’
만용이라고 여겼다. 몇 번 쟁취한 승리에 도취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정신을 차리고 겸손이란 걸 배우게 할 심산이었다.
블랙 오우거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괴물인지를 알고 있던 네이드는 자신의 생각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너지고 말았다.
에단은 마나를 사용했다.
어설프게 사용한 것도 아닌, 능숙하게 다뤘다.
위기의 순간에도 목숨을 담보 삼아 블랙 오우거를 순식간에 제압했다.
범인이라면, 아니, 닳고 닳은 전사들도 자신의 목을 함부로 내놓지 못한다.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마무리하는 순간, 네이드는 전율을 느꼈다.
그렇기에 네이드는 이번에 벌어진 일에 탄식했다.
‘안타깝구나.’
수습 기사들의 처지를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은 돌이킬 수가 없었다.
* * *
“결투는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모룬과 에단을 향해 다가오는 자는 첸이었다.
‘아버지가 올 줄 알았는데, 의외군.’
확실히 이런 자리에 가주가 매번 얼굴을 비추고 개입하는 것도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첸의 등장에 모룬이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열었다.
“단장님.”
“원래라면 직계 가족 사이의 결투는 허가할 수 없지만, 이번만 예외로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아버지의 결정입니까.”
“그렇습니다.”
“……알겠습니다.”
모룬은 가라앉은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첸은 에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결투를 승낙하시겠습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감이 넘치시는군요.”
첸이 피식 웃으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고저 없는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했다.
“이 결투는 지금부터 제가 보증합니다. 제가 지켜보는 한 이 결투에서는 그 어떠한 부정행위도 벌어질 수 없습니다.”
첸은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첸의 시선을 받은 자들이 하나같이 몸을 떨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이가 하는 단언에는 그만한 강제력이 있었다.
의지력이 실려 있는 말이었다.
그 누구도 여기서 부정행위를 저지를 수 없게끔 하는 경고.
“준비는 되셨습니까?”
무심한 듯한 말투에 에단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미 준비됐습니다.”
그 모습에 첸은 헛웃음을 지었다.
‘저 태도가 말뿐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겠지.’
첸은 에단의 잠재력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모룬을 넘는 것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
하지만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블랙 오우거를 잡을 수 없었다.
‘원래라면 성립조차 안 되는 결투지만…….’
보지 않아도 예상이 되는 결과였다. 가문의 장남인 모룬은 이미 완성된 전사였다.
불같은 성정과 감정적인 성격 탓에 단점이 명확하긴 했지만, 가문 내에서도 수위에 드는 검사였다.
‘벽을 뚫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아직 꽤나 먼 얘기였다. 하지만 첸은 확신하고 있었다. 모룬이라면 마스터의 벽을 뚫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다만, 그 기간을 예측할 수는 없었다. 마스터라는 경지는 결국 하늘이 점지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에단 도련님은…… 모르겠어.’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제 더 이상 에단은 구제 불능의 망나니가 아니었다.
얼마 전 결투에서 보란 듯이 카론을 제압했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이번 토벌에서도 자신을 증명해 냈다.
더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고, 형제들을 겁내지 않았다.
자신의 영역을 위해서라면 송곳니를 드러냈다.
에단은 이제 어엿한 포식자였다. 첸은 에단의 그 변화가 썩 달가웠다.
‘지켜보마.’
가주님은 애가 타겠군.
결투를 직접 보지 못해 몸이 달아 있을 빈센트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기는 필요 없습니까?”
“보다시피 들고 있는 게 없군요.”
에단이 양팔을 들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몸짓이 여유로워 보였는지 모룬이 으르렁거렸다.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는지 지켜보마.”
에단은 여기서 모룬을 더 긁어 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생각을 접었다.
결투가 시작되려는 조짐이 보였다.
‘옥타곤에 올라온 것 같군.’
어느새 훈련 중이던 기사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살아 있는 쇠창살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전부터 느껴 왔지만, 이 감각은 상당히 중독성 있다.
‘상황은 불리하고.’
체급 차이도 심한 데다가 상대는 이미 완성된 전사였다. 반면 에단은 쥐고 있는 무기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들 생각이 있다면 손에 쥘 수도 있었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지금은 맨몸이 좋아.’
첸이 검을 뽑았다.
에단과 모룬 사이에서 서늘한 예기를 뿜어내던 검 끝이 이내 하늘로 향했다.
따로 지시는 없었지만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투 시작이다.
곧장 모룬이 뛰어왔다.
마치 황소가 돌진하는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불리한 상황이다. 이 정도면 아무리 에단이라도 긴장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의외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같잖군.’
에단보다 한참은 큰 모룬이, 지금은 어쩐지 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