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형제의 질투 (1)
“……아버지.”
빈센트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봤다.
“왔구나.”
빈센트의 눈은 차가웠다.
그 눈빛에 모룬은 흠칫 몸을 떨었다.
빠득.
하지만 이내 저절로 이가 갈리며, 모멸감이 치밀었다.
앞으로 다가섰다. 다른 수행원들도 따라 나서려 했지만, 모룬은 팔을 들어 저지했다.
“어떤 생각이 들더냐.”
“……믿을 수 없습니다.”
블랙 오우거가 입은 상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는 깊었고, 하나하나가 치명상이었다.
그렇기에 모룬은 더욱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에단은 아직 마나를 다루지 못합니다. 이런 상처는…….”
빈센트는 실망스러운 눈으로 모룬을 바라봤다.
그걸 눈치챈 모룬은 결국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됐다.”
빈센트는 더 이상 모룬에게 묻지 않은 채 몸을 돌려 산을 내려갔다.
모룬은 고개를 숙였다. 주먹 쥔 손에 피가 맺혔다.
‘……저걸 잡았다고?’
모룬이 고개를 들어 블랙 오우거의 사체를 바라봤다.
이미 생을 달리했음에도 묵직한 위압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일대를 호령하던 폭군의 기운이었다.
‘나는 잡을 수 있을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하고 싶었지만, 이성은 정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뒤편에 서 있던 카론이 모룬을 향해 다가왔다.
카론은 꽤나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마나 유저의 예민한 청각 덕분에 빈센트와 모룬 사이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자…… 아니, 에단 형님은 분명 달라지긴 했지만, 마나는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카론이 검을 뽑았다.
잘 벼려진 칼날은 서늘한 한기를 뿜어냈다. 블란테의 혈족이 가질 만한 명검이었다.
카론이 마나를 끌어 올리자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맴돌았다. 강대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어린 나이임을 감안하면 훌륭한 성취였다.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린 카론은 그대로 검을 내리그었다.
쾅!
검과 블랙 오우거가 맞부딪히자 굉음이 일었다.
“이것 보십시오.”
카론이 모룬을 바라봤다. 블랙 오우거의 가죽에는 작은 크기의 자상이 새겨졌다.
“마나를 실은 검을 휘둘러도 이 정도 상처를 내는 게 고작입니다. 하물며 에단 형님은 검을 제대로 쥔 적도 없는데, 이 녀석을 쓰러트리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그래, 네 말이 맞다.”
잠자코 카론의 말을 듣고 있던 모룬의 안광이 형형하게 빛났다.
“감히 우리 둘을, 아니, 가문을 기만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 * *
에단이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물론 별채에서 눈을 뜬 것이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만 봐도 이곳이 어디인지 예상이 갔으니.
― 드디어 눈을 뜬 건가?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에 에단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 ……표정을 너무 안 숨기는 것 아니냐?
적잖이 상처를 받은 듯, 페온의 목소리에서 풀이 죽은 게 느껴졌다.
“눈을 뜨니까 어지러워서 그랬습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하면서 에단은 몸을 일으켰다.
꽤나 오랜 시간 누워 있었는지 몸이 상당히 굳어 있었다.
우드득.
대충 몸을 풀자, 근섬유와 뼈마디가 아우성을 쳐 댔다.
몸이 조금 달라진 것 같은 기분에 에단이 눈살을 좁혔다.
― 알아차렸냐?
“……그 녀석 때문이군요.”
― 쯧, 눈치도 빠르구나, 재미없는 놈. 그래, 블랙 오우거의 생명력을 그렇게 포식했으니 몸이 변화하는 것도 당연하지.
에단이 손을 들었다. 외관상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블란테의 피가 지닌 잠재력은 뛰어났다. 뼈는 단단했고, 근육은 질겼다.
하지만 지금은 차원이 달랐다.
전반적인 신체 능력이 대폭 상승한 것이 느껴졌다.
‘신기하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당장 손에 돌덩이를 쥐면 단번에 으깨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시작이지.’
헛웃음이 나왔다.
원작 주인공은 온갖 기연과 특전을 독식하며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뤘다.
그중에 죽은 나무는 아주 사소한 기연일 뿐이다.
한데 이것만으로 이렇게나 바뀌다니.
‘절반은 가져가야지.’
원작 주인공이 얻을 걸 모두 다 뺏을 수는 없었다. 절로 기연과 특전이 눈앞에 굴러떨어지던 주인공과는 다르게, 에단은 직접 발로 뛰어야 했다.
게다가 직접 뛴다고 무조건 얻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려면 먼저 가문을 나가야겠지.’
최소한의 자격은 얻었다.
블랙 오우거를 처치했으니, 이번 토벌의 성과로는 충분했다.
모룬이 몬스터의 개체 수를 얼마만큼 줄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블랙 오우거의 이름값과 비교하기는 힘들 터였다.
“제가 며칠이나 이러고 있었죠?”
― 딱 3일 흘렀다.
“오래 누워 있었군요.”
― ……그것도 굉장히 빨리 회복한 거다. 너는 네가 무슨 마스터의 경지에라도 이른 줄 아는 게냐? 그만한 변화를 받아들이려면 몸도 좀 시간을 가져야…….
“몸이나 풀어야겠군.”
페온의 말이 길어지려는 기색이 보이자, 에단은 말을 끊고 발을 옮겼다.
― …….
건물 밖으로 나가 연무장에 들어서자, 휴고와 가토가 보였다.
둘은 대련 중이었다. 에단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가토는 날이 서지 않은 수련용 검을 들고 있었고, 휴고는 팔목 보호대를 두르기만 했을 뿐 맨몸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밀어붙이는 쪽은 휴고였다.
거리가 벌어지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휴고의 공세는 맹렬했다.
가토는 연신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눈은 침착하게 휴고의 공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장했군.’
휴고도 성장했지만, 에단이 유의 깊게 보는 이는 가토였다.
가토는 지금 찰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휴고는 격렬한 공세 끝에도 성과가 보이지 않자, 승부수를 띄우려는 것으로 보였다.
가토의 눈빛이 바뀌었다.
아무리 휴고가 기민하다고 해도, 큰 공격에는 그만큼의 사전 동작이 필요했다.
가토가 그 순간을 노리고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가토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휴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때, 휴고의 허리가 크게 젖혀졌다. 무척추동물을 연상케 하는 유연성이었다.
휴고는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면서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쯧.”
가토는 아쉬움을 느꼈는지 혀를 찼고, 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둘의 대련을 바라보고 있던 에단은 감탄 섞인 휘파람을 불었다.
“도련님?”
그제야 에단의 존재를 눈치챈 둘은 에단에게 다가갔다.
둘의 표정은 미묘했다. 전투 당시 에단이 보여 준 잔혹한 손속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그나저나 실력이 많이 늘었는데.”
에단의 말에 휴고는 뒷머리를 긁으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지만, 가토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저 괴물 새끼랑은 비교하지 말고.”
휴고는 태생이 웨어울프였다. 순수한 인간인 가토와는 가지고 있는 잠재력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진짜 괴물 같은 건 저 녀석이 아닌데 말입니다.’
가토는 그날을 상기했다. 블랙 오우거를 상대로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던 그 모습.
비견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검을 쥔다면 최고를 숭상한다.
가토의 목표도 다르지 않았다. 블란테 가문에 충성을 다하기로 다짐했지만, 그럼에도 최고를 꿈꿨다.
하지만 그날의 자신은 무력했다. 에단의 토벌대원으로서 큰 성과를 함께 했지만, 가토는 그 영광이 불편했다.
자신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는 생각에 그날 부러진 검을 아직도 수리하지 않았다.
‘젠장, 생각해 보니 검이 부러졌지.’
가토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그날 부러진 검 때문에 아직 감정이 상해 있는 것 같았다.
‘지출이 더해지겠군.’
그래도 블랙 오우거라는 성과를 얻었으니, 검 하나 더 달라고 해도 상관은 없겠지.
“그럼 몸 좀 풀어 볼까.”
“저는 이미 훈련이 끝나서…….”
휴고가 슬그머니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에단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땀도 별로 안 흘렸네.”
휴고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 * *
다시 지옥 같은 훈련이 끝났다. 휴고와 가토는 연무장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에 반해 에단은 멀쩡했다.
구슬땀을 흘리기는 했으나 아직 호흡도 크게 가쁘지 않았고, 체력에도 여유가 있었다.
‘블랙 오우거의 생명력 때문인가.’
적게 잡아도 체력이 두 배는 늘어난 것 같았다. 이렇게 많이 움직였음에도 아직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가토와 휴고는 그런 에단을 괴물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누굴 보고 괴물이라고…….’
휴고는 억울했다. 자신이 보기에 진짜 괴물은 에단이었다.
“벌써 훈련입니까?”
에단이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의 입구에는 네이드가 서 있었다.
“어. 몸이 좀 무거워서.”
에단이 피식 웃으며 네이드에게 다가갔다.
“가주님께서…….”
“그만. 일단 밥부터 먹고.”
에단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아직 환자였다.
‘요양이 필요하다고.’
* * *
씻고 식사를 마친 에단은 곧바로 영주실로 향했다.
‘그날 걸리진 않았겠죠?’
― 걱정 말거라.
페온의 단언에도 왠지 모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더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들키면 들키는 거지.’
마음 편하게 생각한 에단은 발을 놀리며 네이드에게 다른 걸 물었다.
“그래서 토벌 결과는 어떻게 됐지?”
“……조금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
문제가 생길 게 없었을 텐데?
에단이 인상을 찌푸리자, 네이드는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설명했다.
“……하여 그렇게 됐습니다.”
“그걸 믿어?”
에단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네이드가 쓰게 웃었다.
“저는 일개 집사일 뿐이니까요.”
쯧.
에단이 혀를 찼다.
네이드가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엿 같은 힘숨찐 클리셰.’
원작 소설에서 네이드의 존재 자체가 ‘힘을 숨긴 집사’라는 캐릭터성을 띠고 있으니 어쩔 수 있나.
‘일이 귀찮아지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힘을 시험할 기회이기도 했다.
영주실에 도착한 에단은 빈센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빈센트는 업무 서류를 응시하다 에단에게 슬며시 시선을 건넸다.
“몸은 괜찮더냐.”
“네. 덕분에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일을 벌였더구나.”
빈센트가 설핏 웃으며 에단을 바라봤다. 머금은 웃음 속에 있는 심중을 눈치챈 에단이 씨익 웃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처리할 자신은 있느냐?”
“처리해야 할 일이니까요.”
“건방진 건 여전하구나.”
“보상은 생각해 두셨나요?”
“보상?”
빈센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에단이 말한 의도를 깨달았는지 호탕하게 웃었다.
“큭큭, 좋다. 이번에도 선택은 너에게 맡기도록 하지. 뭐든지 좋다. 블란테는 언제나 모든 걸 쟁취해야 하는 법이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에단은 고개를 숙이고 영주실을 나섰다. 영주실 밖에는 네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네이드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취미가 고약하네.”
“도련님의 목청이 큰 탓입니다.”
“허.”
마스터라면 너무나도 쉽게 들었을 텐데…… 이제 위장은 안 하는 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네이드를 응시한 에단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빠른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대연무장으로 가자.”
지금쯤 모룬은 거기에 있을 거다.
‘나름대로 짱구를 굴렸다 그거지.’
모룬이 정치질에는 일가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가 버렸다.
에단의 토벌대는 큰 성과를 거뒀지만, 정작 대원들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성과의 실상이 밝혀지면 명예는커녕 조롱과 지탄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룬은 그들을 회유했다.
응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보상을 걸어 두고.
‘기사.’
모든 수습 기사들의 꿈이자 염원.
에단이라는 미래가 불분명한 차남의 말보다는, 모룬이라는 유력한 후계자가 제시한 기사 승격이라는 말이 더욱 달콤할 것이 당연했다.
‘그래도 괘씸하긴 하군.’
에단이 블랙 오우거를 토벌하면서 보여 준 모습은 모룬이 유력한 후계자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을 터.
하지만 수습 기사들은 결국 에단이 아닌 모룬을 택했다.
하는 짓들이 귀여웠다.
‘상큼한 새끼.’
뒈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