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블랙 오우거 (2)
어둠은 긴장을 유발한다.
시야의 확보가 어려워지면 자연스럽게 몸이 굳는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던 것들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한 걸음, 한 걸음이 피로로 누적된다.
가뜩이나 아침부터 토벌에 참가하여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한 자들이다.
블란테 가문의 수습 기사로서 혹독한 단련을 이겨 낸 이들이기에 앓는 소리 없이 에단을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강행군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거친 노면과 어두운 시야, 그리고 무엇보다 블랙 오우거를 찾으러 간다는 사실이 그들을 더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반면 에단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 녀석과의 거리가 얼마 안 남았다. 안 좋은 사실이라면…… 자는 중이 아니라는 거지. 대책은 있나?
“네. 대책은 있죠. 그 전에 시험할 것도 있지만.”
에단이 뒤를 바라봤다.
토벌대의 표정은 복잡했다.
열의, 흥분, 긴장, 원망, 의심.
그들은 각양각색의 표정들로 에단을 따라나서고 있었다.
신분 상승의 기회와 드높은 명예.
모두 기사라는 부푼 꿈을 안은 자들이 놓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구석에 있는 의심과 원망과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에단의 입지는 딱 그 정도였다.
눈앞의 달콤한 과실에 속아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막상 확신하기에는 애매한.
에단은 마스터도 아니었고, 유력한 후계자도 아니었으니까.
얼마 전까지 구제 불능의 망나니이던 자를 믿어도 괜찮을까, 하는 감정들이었다.
에단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딱히 그러한 걸 풀고 가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이곳에 와 소정의 목적은 이뤘다.
죽은 나무.
입지는 사실 없어도 그만이다.
어차피 자신은 아카데미로 향할 것이다.
여기서도 기연을 얻을 방법은 있겠지만, 가장 좋은 것은 주인공의 곁에서 뜯어 내는 것이다.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 결국에는 내가 상대해야 하는 녀석이기도 하고.’
에단은 소설 전반에서 등장하는 흑막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전반적인 판을 쥐고 흔들려면, 그 판의 중심에 들어갈 필요성이 있었다.
블랙 오우거는 그걸 위해 필요한 초석일 뿐이었다.
‘주인공한테 밀릴 생각도 없고.’
주인공이 아카데미에 오기 전에 얻은 칭호가 바로 ‘오우거 슬레이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한 명칭이 뒤따르긴 했지만, 초반에 얻은 칭호로도 주목을 받기에는 충분했다.
반면 에단은 블란테 가문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탐욕스러운 돼지이자, 구제가 불가능한 망나니였다.
여러 가지로 대비되는 입장이었다.
그렇기에 주인공을 질시하고, 방해하며, 주인공이 더욱 주목받게 만드는 제물이 되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였다.
‘내가 먼저다.’
귀찮은 일까지 도맡을 생각은 없었고, 명성에 목을 맬 생각도 아니었다.
하지만 엑스트라로 만족할 생각도 없었다.
류태신은 언제나 주인공이었고, 챔피언이었다.
부와 명예.
그걸 위해서 살아간 건 아니었지만, 놓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의심하는 녀석들을 거둘 생각은 없어.’
에단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수습 기사를 바라봤다.
* * *
“진짜 사라졌다고?”
“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토벌에서 공적을 얻을 확률은 극히 드물…….”
“조용히 해 봐.”
카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타오르는 장작불을 바라봤다.
지금 보고받은 게 전부라면 에단은 실수를 저지른 게 확실했다.
카론은 어리고 감정적이었지만, 멍청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나오면서 산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에단이 간 쪽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이 아니기는 해.’
애초에 정기 토벌은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기 직전, 사전에 개체 수를 조절하기 위해 매년 진행하는 정기 행사였다.
당연히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밀집 지역을 위주로 부대가 움직이게 되었다.
카론은 토벌대의 선두에 있었다.
그간 받은 스트레스와 분노를 풀기 위해 직접 자원한 것이었다.
그간 망신만 당했지만, 카론의 재능은 진짜였다.
그간 받은 울분을 해소하기 위해 카론은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다른 병사들이 겁에 질릴 정도로 광기에 젖은 모습이었다.
카론은 확실히 분이 풀리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정말 그게 끝이라고?’
에단은 바뀌었고, 그 사실은 누구보다 카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방심하거나 얕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모두가 에단을 무시하고 깔보고 있었다.
‘답답해서 미치겠네.’
뭔가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는데 딱히 증거가 없었다.
심증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정황은 에단이 실수하고 오판을 벌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가슴이 무거운 것일까.
‘단순한 기분 탓인가?’
이번 일로 에단의 입지가 다시 줄어들면 카론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빠득.
카론이 다리를 떨었다.
날은 저물었고, 밤의 산은 위험했다.
지금 에단의 토벌대를 쫓는 건 무리였다.
“일단 자도록 하지.”
하루 종일 몬스터를 잡았으니 당연히 피로가 쌓여 있었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마음 한편이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서 무언가를 하기는 힘들었다.
* * *
에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던 토벌대원들도 걸음이 멎었다.
‘이 앞이군.’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사나운 야성, 압도적인 존재감.
여기까지 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에단은 어딘지 모르게 지금 감각이 익숙했다.
‘휴고 때문인가?’
그가 웨어울프로 변했을 때 지금 같은 누린내가 느껴졌다.
에단이 휴고를 바라봤다.
휴고의 표정은 딱딱했고, 온몸에서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흡이 가빠지며 동공이 커졌다.
‘본능적으로 알고 있나 보네.’
위협적인 포식자의 등장을.
에단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저 앞에 있죠?”
에단은 페온만 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 그래…… 저 앞에 있군. 상태를 보아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은 모양이야. 자신의 구역에 외부인이 들어왔으니까.
이 말은 비단 에단 일행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기 토벌.
거리가 꽤 떨어져 있긴 했지만, 블랙 오우거 정도의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거슬리고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 오우거는 영리했다.
인간들의 군대, 그것도 군데군데 강자가 포진해 있는 군대를 함부로 습격할 수는 없었다.
습격했다가는 자신이 사냥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자신이 있는 영역 근처에 인간들이 찾아왔다.
블랙 오우거가 환영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에단이 뒤를 돌아봤다.
네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눈치챘고.’
네이드는 한 발짝 떨어져서 에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할지 지켜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에단은 그런 네이드를 보며 피식 웃고는 고개를 꺾었다.
‘잘 지켜보라고.’
이번에도 놀라게 해 줄 테니.
* * *
크르르.
천둥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소리는 발 빠르다.
거친 호흡이 정지했다.
토벌대원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이게 오우거구나.
그것도 블랙 오우거.
이제야 제대로 된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껏 만난 잔챙이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진짜 괴물.
몬스터 중의 몬스터.
최상위 포식자.
강단이 약한 대원은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이성을 유지하려고 해도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다리는 쉽사리 말을 듣지 않았다.
본능에 각인된 공포였다.
도망가야 한다.
저놈한테서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
사슴은 사자를 만나면 도망간다.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며, 당연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공포가 느껴졌다.
이건 정신력으로 승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숨 막히는 살기를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걸 사냥한다고?’
말도 안 돼.
애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최소한 마스터가 와야 상대할 수 있는 녀석이다.
“도, 도망가야 해.”
그중 정신이 무너져 가는 토벌대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미친 짓이야.”
“나, 나도 갈 거야.”
몇 명이 등을 돌렸다.
‘멍청한 새끼들.’
가토가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날은 어두웠고, 길은 험했다.
여기서 흩어지면 생존을 보장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뭉쳐서 싸워야 한다.
어차피 여기서 지면 몰살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에, 도망이라는 형편 좋은 가정은 지금 하등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승산이 느껴지지 않아.’
가토가 이를 악물었다.
숨 쉬는 것도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에단과 휴고는 달랐다.
휴고의 몸에서는 김이 나는 것 같았다.
어느새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는데, 털이 곤두서고 동공이 가늘어졌다.
언제든지 바로 전투에 임할 상태가 되었다.
반면 에단은 여전히 평온했다.
공포 따위는 느끼지 않은 것 같았다. 입가에는 작은 미소까지 걸쳐져 있었다.
‘미친놈들.’
가토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신은 미래가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그런데 지금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망나니 도련님보다도, 일개 하인보다도 못했다.
그 사실에 기분이 더없이 더러워졌다.
가토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주위 동료들이 가토를 바라봤다.
주위는 어두웠고, 동료의 눈만 보였다.
동료들의 눈은 겁에 질려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뭐라고 하는지 들려왔다.
‘지금 미쳤어?’
어, 미쳤다.
가토가 한 걸음 나섰다.
이제야 에단과 휴고와 나란히 서게 되었다.
― 쓸 만한 녀석이 하나 더 있구나.
페온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가토를 바라봤다.
에단이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제대로 된 사냥을 시작할 차례였다.
* * *
크르릉!
블랙 오우거는 지금 심기가 매우 좋지 못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혼자였다.
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자신의 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것은 자신의 먹잇감이자 장난감에 불과했다.
이 산맥은 자신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영역이었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
이 단순한 행위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블랙 오우거의 행동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거침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 불청객이 찾아왔다.
블랙 오우거는 자연스럽게 자신에 영역에 침범한 놈들을 죽이려고 했지만, 그들의 숫자는 적지 않았다.
그리고 강했다.
강한 인간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블랙 오우거는 알 수 있었다.
눈에 띄면 안 된다.
그렇게 판단한 뒤로 산의 깊은 곳으로 숨어들었다.
처음 느끼는 감각이었다.
언제나 포식자이던 자신이 숨어들다니.
블랙 오우거는 그 사실에 심기가 거슬렸다.
그런데 또.
자신이 있는 곳까지 인간이 찾아왔다.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곤죽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크르륵.
냄새가 느껴졌다.
하나는 짐승의 누린내였고, 하나는 위협적인 냄새였다.
하지만 이번에 풍기는 강자의 냄새는 매우 미약했다.
냄새가 미약한 이유는 네이드가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숨기고 있어서였지만, 블랙 오우거는 알 도리가 없었다.
블랙 오우거가 몸을 일으켰다.
울창한 나무들이 주변에 있음에도 블랙 오우거의 거체에 비하면 왜소해 보였다.
블랙 오우거가 시선을 던졌다.
어둠 따위는 방해가 되지 않았다.
건방진 먹잇감들이 있는 장소가 한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