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죽은 나무 (3)
벨몬트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일대를 지배하던 우두머리였다.
비록 일신의 무력은 보잘것없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꾸준히 지능이 낮은 몬스터들을 수하로 삼아 세력을 키워 나갔다.
지능이 낮은 몬스터는 뱀파이어의 현혹에 면역이 없었다.
그 어떤 몬스터도 감히 위대한 밤의 일족인 벨몬트를 무시하지 못했다.
비록 현혹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뱀파이에 불과했지만, 벨몬트의 자존심까지 반쪽인 것은 아니었다.
벨몬트의 혈통은 고고한 뱀파이어의 것이었다.
그저 지금은 몸을 움츠리고 있을 뿐이었고, 이곳에서도 언제든지 기회만 생긴다면 도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꿈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것도 있었다.
하여 조금 전 역겨운 웨어울프를 만났을 때도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그가 생각하는 웨어울프는 무식하게 힘만 강한 짐승이었다.
위협은 될지 몰랐지만, 두려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목덜미를 붙잡은 이 인간은 뭔가가 달랐다.
무심하기 짝이 없는 눈.
언제라도 자신 따위는 소멸시킬 수 있다는 표정.
그 누구보다 욕망에 충실한 몬스터들도 이러한 표정은 보여 주지 않는다.
‘인간이 맞긴 한 건가?’
자신이 복종의 의사를 내비쳤을 때도 별다른 감흥이 없어 보였다.
벨몬트는 그런 에단의 태도에서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럼 흡수해 볼까.”
에단이 벨몬트의 마나를 흡수했다.
원래라면 죽은 자에게서만 추출할 수 있는 마나였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사자(死者)와 흡사한 마나를 사용했다.
‘소설에서 본 내용이지.’
아마 흡수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에단이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사용법은 배우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크아악!”
벨몬트가 비명을 질러 댔다. 에단은 표정 변화 없이 마나의 흡수에 집중했다.
‘죽이면 안 되지.’
이 뱀파이어는 아직 쓸모가 남아 있기에, 어느 정도 흡수를 끝내고는 붙잡고 있던 목덜미를 놓아주었다.
에단은 정신을 잃은 휴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느새 거대한 골격이 줄어들고, 전신을 뒤덮은 털들도 모두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부러진 뼈들은 모두 붙었군.’
경이로운 회복력이었다.
턱뼈가 산산조각이 난 상처였으니, 인간이라면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이었다.
하지만 인간으로 돌아온 휴고는 모든 상처가 아물어 있었다.
‘뼈도 붙고 있는 거 같은데.’
놀라웠다.
원작 묘사로 대충은 예상했지만, 직접 회복하는 걸 지켜보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지라 정확한 판단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외관으로 봤을 때는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적당히 있다가 깨우면 될 것 같고.’
휴고의 상태를 판단한 에단은, 이번엔 벨몬트에게서 갈취해 온 마나를 살펴봤다.
‘조금 다른 것 같은데.’
페온에게 빌려 온 마나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기운이었다.
― 그대로 사용하면 위험하다.
탁한 기운이 탐탁잖은지 페온이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 그래. 너는 정석대로 마나를 쌓지 않았으니, 천천히 흡수해야 할 것이다. 그 방법은 내가 알려 주지.
어딘가 거들먹거리는 태도였지만,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에단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에단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소화 못 할 기운을 집어먹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야.”
에단은 널브러져 있는 벨몬트를 불렀다.
벨몬트는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에단이 상상하던 흡혈귀의 복장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넝마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네, 네?”
겁에 질린 벨몬트가 몸을 움찔했다. 고고한 뱀파이어의 긍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지금은 에단에 대한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다.
“당분간 여기 있어.”
어차피 에단은 가문으로 복귀해야 했다.
경지에 오른 자들은 벨몬트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볼 것이 빤했고, 에단은 그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필요한 것은 얻었어.’
애초에 목표로 한 죽은 나무는 얻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이제 토벌을 시작해 봐야지.”
에단이 벨몬트를 바라보자,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너 여기서 오래 있었지?”
“그, 그렇습니다. 이 근방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습니다.”
책이라도 잡히는 줄 알았는지 벨몬트가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에단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기 근처에 좀 센 몬스터들, 싹 다 읊어 봐.”
이제 다른 성과를 얻을 시간이었다.
* * *
네이드는 초조한 감정을 감추지 못한 채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휴고와 에단이 동굴로 들어간 지 벌써 두 시간가량이 흘렀다.
날은 저물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울창한 나무들 탓에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주위가 더욱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네이드는 밤이 되면 몬스터들은 더욱 사나워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탓에 지금이라도 저 동굴에 진입해서 에단을 데리고 오는 것이 옳은 판단이 아닐까 고민했다.
하지만 동굴에 들어가기 전 에단의 태도는 확고했다.
에단이 확고한 의지를 내비친 이상, 네이드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야영을 준비할까요.”
네이드의 뒤에 있던 수습 기사 한 명이 물어 왔다.
싸늘한 시선으로 수습 기사를 흘겨보던 네이드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하도록 하죠.”
수습 기사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분주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에단의 토벌대에 들어온 수습 기사들은 네이드의 실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평범한 집사가 아닌, 힘을 숨긴 전사.
그들도 눈치가 있는 터라 네이드에게 집사 행세를 하고 있는 정확한 경위를 묻지는 않았지만, 최대한 예우를 갖추었다.
‘이 짓도 끝났군.’
네이드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수습 기사들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네이드는 집사라는 자신의 직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자신을 얽매는 지위는 불편한 옷을 입은 것과 같았다.
그저 한 발짝 뒤에서 관조할 수 있는 자리가 썩 마음에 들던 차였는데…… 에단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쥐고 있는 패가 적으니, 사용할 수 있는 수는 모두 사용해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네이드 같은 고급 인력을 단지 집사로 놔두라고?
에단이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도련님은 많이 변했어.’
줄곧 곁에서 지켜봐 왔기에 알 수 있었다.
에단은 달라졌다.
이제는 과거 망나니 때의 그와 동일시할 수가 없었다.
‘별문제는 없겠지만.’
바뀐 에단은 철저한 사람이었다.
가끔 보면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에단은 스스로를 입증해 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묘하게 불안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벌써 시간이 상당히 흘러, 몬스터가 득시글거리는 사나운 새벽이 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네이드 님, 저쪽에!”
네이드가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수습 기사 하나가 네이드를 불렀다.
네이드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 꽤나 괜찮은 녀석이 있군.
“뭐, 그렇죠.”
에단은 페온의 말에 가볍게 대꾸하며 야영지에 다가갔다.
수습 기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하나하나는 체계적이었다.
그들은 수습 기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지만, 아직 정식 기사로 임명되지 못한 탓에 가문 내에서도 궂은일을 모두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야영지를 만드는 것 정도는 능숙하게 소화해 냈다.
“그만.”
에단이 움직이는 수습 기사들을 멈춰 세웠다.
수습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무사히 귀환하셨군요.”
에단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수습 기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수습 기사들도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미 노선을 결정했다. 아직 알 수 없는 동아줄을 붙잡은 것이다.
그 동아줄이 썩었는지 아니면 미스릴로 이루어져 있는지는 아직 판명되지 않았다.
그런데 시작도 전에 에단이 잘못된다면 수습 기사들의 입장은 매우 난처해질 것이 빤했다.
이런 상황에서 에단이 무사히 돌아왔으니, 수습 기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동한다.”
이미 야영지는 거의 완성돼, 각자 자리 잡고 쉬기만 하면 될 정도였다.
그 상황에서 이동 명령이라니…….
에단의 말에 가토가 인상을 찌푸렸다.
“도련님, 이미 날이 저물었습니다. 시야도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동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가토가 정론을 얘기하자 주변의 다른 자들도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단의 행동이 무모하고 치기 어리다는 것에 동감한 것이다.
“그래. 그렇다면 너는 빠져라.”
에단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기사가 되고자 하던 것 아니었나?”
“…….”
수습 기사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에단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지금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어. 병신이 아니면 모를 수가 없지. 밤이 되면 몬스터가 더 흉포해지는 거? 시야의 확보가 어려운 거? 여기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머저리가 있나?”
“…….”
수습 기사들은 침묵했고, 에단은 주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여기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며 몬스터 몇 마리 잡겠다고 온 게 아니야. 여기까지 왔으면 적어도 성과는 내야지.”
“……성과라고 함은?”
가토의 눈빛이 변했다.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블랙 오우거.”
가토와 수습 기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녀석을 잡으러 갈 거다.”
이왕 잡을 거면 거물로 잡아야지.
* * *
블랙 오우거.
오우거들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우거라는 몬스터는 인간들에게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두꺼운 가죽은 창칼로도 상처를 내기 어려웠고, 강한 힘과 흉포함 때문에 숙련된 전사들도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기사는 오우거에게 제대로 된 대미지를 입히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오우거도 결국 생명체였고, 눈이나 입, 관절 부위 등을 집요하게 노리면 대미지를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막대한 피해가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블랙 오우거.
오우거 사이에서 드물게 나타나는 돌연변이.
일반 오우거보다 거대하며, 더 흉포하고 사납다고 전해졌다.
블랙 오우거는 마나를 깨우친 기사들이 합세해도 처치하기 힘든 몬스터였다.
그런데 에단은 그 이름을 거론하고 있었다.
“블랙 오우거 말씀입니까?”
“그래. 위치도 특정하고 있어.”
“……너무 무모합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에단이 피식 웃자 수습 기사들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에단은 지금 그들을 시험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승산이 없다.
하지만 그만큼 결과가 달콤해 보였다.
블랙 오우거의 퇴치.
드래곤 슬레이어급은 아니지만, 슬레이어라는 명칭이 붙어도 부족하지 않은 성과였다.
범람하는 몬스터 수십 수백을 퇴치하는 것보다도 큰 성과였다.
그리고 블랙 오우거는 그 부속물조차도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었다.
기사라는 목표에 목을 걸고 있는 수습 기사들에게는 놓치기 싫은 달콤한 과실이다.
수습 기사들에게서 그러한 기색을 본 에단은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에단의 토벌대는 규모가 작았다.
숫자적인 측면에서는 모룬의 토벌대와 비교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양보다는 질로 승부할 수밖에.
어쨌든 계획대로라면 이번 수확은 블랙 오우거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블랙 오우거는 시작일 뿐이었다.
놈을 잡고 얻을 마력과 가문에서 벌어질 사건들이 벌써부터 기대됐다.
“하겠습니다.”
“저도 하겠습니다.”
“저도 참가합니다.”
가토의 대답을 기점으로 모든 수습 기사들이 블랙 오우거를 사냥하는 것에 찬성했다.
독이 든 성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욕망은 그런 위험을 짓누를 정도로 강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있던 휴고가 불안해하며 에단의 옆에 다가와 속삭였다.
“저…… 도련님.”
“왜?”
휴고는 아직도 정신이 덜 깬 기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전신이 부서질 것처럼 아파 왔다.
가장 아픈 것은 턱이었다. 입을 벌리는 행위조차 힘들었다.
그런데도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블랙 오우거라는 놈을 찾아 이동할 것 같은데, 주변의 반응을 보아하니 간단한 일은 아닌 거 같았다.
그 탓에 고통을 누르고, 에단에게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블랙 오우거가 뭔가요?”
“우리 사냥감.”
에단이 휴고의 불안감을 가볍게 일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