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죽은 나무 (1)
에단이 턱을 매만졌다.
확실히 흥미는 생겼다. 하지만 주도권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고 생각하죠.”
― ……능구렁이 같은 놈.
진저리가 난다는 듯 말한 페온이 작은 설명을 덧붙였다.
― 편법으로 얻는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 기물도 같을 뿐이야. 죽은 자의 사기(死氣)를 계속해서 취하면 너는 점차 이성을 잃게 되겠지.
“그렇군요.”
― ……반응은 그게 다더냐?
“뭐, 어쩔 수 없죠.”
어떤 것이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는 치러야 하는 법이다.
이성을 잃게 되는 페널티? 그것보다 당장의 생존이 우선이었다.
지금 여기서 에단이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 한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에단이 마나를 어느 정도 깨우치고 두각을 나타낼 때면 주인공 일행은 이미 스토리의 후반부에 달려갈 터였다.
‘대책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이 얻은 물건 중 정신 강화에 특화된 것들도 있었다.
계획을 어느 정도 수정할 필요는 있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상당히 귀찮을 뿐.
― 이, 이익!
에단의 반응이 심드렁해지자 페온이 다시 분통을 토해 냈다.
― 이 정도 정보를 알려 줬으면 그에 걸맞은 감사를 표해야 하는 것 아니더냐!
“아, 음…… 감사하군요.”
― 이, 이런 괘씸한! 하, 됐구나. 엎드려 절 받기도 정도가 있지……. 하지만 내 말은 장난이 아니다. 그 능력은 분명 너를 파멸로…….
‘말이 많네.’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에단은 슬슬 흥미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걸 느꼈는지 페온도 말을 멈추고, 슬쩍 본론을 꺼냈다.
― ……나도 데려가면 안 되겠나?
“……굳이요?”
― 구, 굳이 라니…….
페온이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그간의 삶에서 이 정도의 처우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페온은 고민했다. 여기서 자신의 가치를 구차하게 설명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이대로 소멸을 당하는 게 맞는지.
두 가지 선택지를 놓고 저울질을 시작했다.
페온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더 고수할 자존심도 없거니와, 페온에겐 목적이 있었다.
― 이대로 가면 나는 얼마 되지 않아 소멸될 예정이다. 그 기물의 힘이 나를 붙잡고 있던 것이니, 소멸을 맞이할 시간은 더욱 빨라지겠지.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지만 여기서 소멸을 맞이하기에는 아직 해야 할 것이 남았다.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이제야 좀 바뀌었군.’
고자세를 유지하던 에단의 태도가 드디어 바뀌었다.
“도와드리죠. 단 대가가 있습니다.”
물론 공짜로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 * *
쾅!
휴고는 짐승처럼 뱀파이어를 몰아붙였다.
독보적이던 탄력과 유연성은 배가 되었고, 여린 심성은 늑대의 야성으로 바뀌었다.
길어진 손톱은 단단한 바위도 두부처럼 잘라 버렸다.
뱀파이어는 속수무책으로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비천한 혈통 주제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애송이는 반쪽짜리였다. 웨어울프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뱀파이어이기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반쪽치고는…….’
쾅!
휴고가 벽을 후리자, 지진이 난 것처럼 큰 진동이 울렸다. 단단한 동굴의 벽면이 크게 파였다.
뱀파이어 벨몬트는 침음을 흘렸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스치기만 해도 끝장이다.
지금은 어떻게 방어 일변도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조만간 승부가 난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벨몬트는 휴고에게 제대로 된 피해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벨몬트는 뱀파이어였다. 하지만 가진 힘은 볼품없었다.
뱀파이어의 신체 능력도 뛰어나긴 하지만, 그건 인간과 비교했을 때 뛰어난 수준이었다.
뱀파이어의 진가는 마력과 현혹에 있다. 하나 벨몬트에게는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첫째, 벨몬트는 지금 부릴 수 있는 마법이 없다는 것이었고.
둘째로는 그나마 자신 있는 현혹이 휴고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현혹 같은 정신 계열 마법은 상대의 격이 자신보다 낮고, 지능도 낮아야만 통했다.
하지만 휴고는 지금 지능을 논할 만한 정신이 없는 상태이며, 그 격도 벨몬트에게 뒤지지 않았다.
현재로써는 승산이 없었다.
‘도주도 불가능해.’
이미 모든 수족을 잃었다. 대피를 위한 방도가 몇 가지 있었지만, 휴고는 틈을 주지 않고 벨몬트를 거칠게 몰아붙였다.
작은 기회도 없었다.
벨몬트는 숨통이 조여 오는 기분이 들었다.
분이 치밀었지만, 제대로 된 반격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회의감도 함께 들었다.
‘저런 애송이에게!’
휴고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웨어울프의 피를 깨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놈이었다.
하지만 벨몬트는 그런 녀석에게 밀리고 있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쉬익!
그때, 휴고가 달려들며 팔을 휘둘렀다.
벨몬트는 간신히 상체를 젖혀 공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공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휴고가 몸을 숙여 바닥에 팔을 디뎠다.
지면에 디딘 팔을 중심 삼아 휴고의 몸이 크게 움직였다.
원심력이 실린 휴고의 발이 벨몬트의 배에 꽂혔다.
“커헉!”
벨몬트의 입에서 진한 선혈이 솟구쳤다. 일격을 허용했을 뿐인데도 상당한 충격을 입었다.
휴고가 그 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재차 달려들려 했다.
“멈춰, 휴고.”
바로 그때,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고의 누런 눈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동굴의 저편에서 에단이 걸어오고 있었다.
에단의 발걸음에는 여유가 있었다.
― 호오, 웨어울프구나. 꽤나 괜찮은 녀석이군.
“제가 키운 놈이죠.”
에단이 자부심이 담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원작에서의 휴고는 자신의 힘을 감당하지 못했다.
야성화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지만, 그만큼 신체에 큰 부하가 걸린다.
골격과 근육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때문에 웬만한 내구도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에단과 함께한 고된 훈련이 신체에 걸리는 부하를 감당할 수 있게 만들었다.
육식 동물은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사냥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신체가 부하를 견디자 휴고는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에단은 잠시 휴고를 바라봤다.
“음, 역시 못 알아보는 거 같은데.”
이거는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이 정도로까지 성장했을 줄이야.
“뭐, 방법은 있겠죠?”
에단이 페온에게 물었다. 에단의 낙관적인 태도에 페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 ……어쩌다가 이런 놈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것 같은 한숨 소리에 에단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이 없는 거 같은데요.”
휴고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런 안광에서는 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휴고는 포식자였다. 이 일대에서 가장 강한 우두머리였다.
에단은 상대를 가늠할 줄 알았다.
‘필패.’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이 됐다.
어린아이가 아무리 발악해도 성인을 이길 수는 없다.
이건 그보다 더했다.
휴고는 평범한 짐승보다 월등히 강했으니까.
― 잠깐 몸을 빌리마.
“내키지 않는군요.”
에단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
몸의 주도권을 넘기는 건 에단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페온이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묻자, 에단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힘만 빌려주시죠.”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페온은 지금 사념체에 가까운 상태였지만, 내포하고 있는 힘은 적지 않았다.
에단은 그 힘을 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 건방지구나. 아직 마나도 깨우치지 못한 놈이 다룰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페온은 에단의 겁 없는 치기가 건방지게 느껴졌다.
“싫으면 여기서 끝이고요.”
에단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페온은 백기를 들었다.
― 허…… 알겠다. 다만, 네가 위험하다고 느껴지면 바로 내가 개입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좋습니다.”
이번에는 에단도 수긍할 수 있었다.
페온이 최대한 양보한 결과였다.
‘궁금하네.’
야성을 일깨운 휴고를 마주하자 간만에 몸이 근질거렸다.
― 조심해라. 몸이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니까.
반투명한 페온의 손이 에단에 어깨에 얹어졌다.
서늘한 느낌 뒤로 정체 모를 기운 밀려들어 에단의 몸에 흘렀다.
― 내 마나를 강제로 주입하고 있다. 원래라면 거부 반응이 나타나는 게 정상이지만…… 같은 피가 흘러서인지 큰 부작용은 없어 보이는구나.
페온은 덤덤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내심 크게 당황한 상태였다.
에단은 끝없이 페온의 마나를 탐하고 있었다.
페온은 죽은 자였다. 당연히 품고 있던 마나 대다수가 소실되었고, 남은 것도 극히 일부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단은 아직 마나를 깨우치지 않은 몸이었다.
아무리 몸에 흐르는 피가 같다고 한들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흠, 이런 거군.’
에단은 자신의 몸에 들어오는 묘한 감각을 최대한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원작의 묘사랑 흡사하네.’
원작에서는 몸에 흐르는 피가 느껴지는 기분이라고 묘사했다.
‘대충 어떻게 쓰는지 감이 와.’
주인공 녀석도 마나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실전에서 사용했다.
주변인들이 경악하며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고 칭송하던 모습이 기억이 났다.
묘한 승부욕이 들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 ……말하지 않아도 멈추려고 했다, 건방진 놈아.
페온은 고개를 저었다. 하마터면 마나의 대부분을 빼앗길 뻔했다.
어차피 일시적인 조치였기에 오래가지는 않을 테지만, 마나를 모두 뺏기면 페온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
에단이 고개를 꺾으며 몸을 풀었다.
“도망가진 말고.”
에단이 피식 웃으며 벨몬트를 바라봤다.
‘마나는 이렇게 실으면 되나?’
발에 기운을 집중하며 발을 내디뎠다.
쿵!
지면이 움푹 파였고, 에단은 쓰러져 있는 벨몬트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벨몬트의 눈이 커졌다.
“잠깐 기절해 있어.”
이 녀석에게는 아직 얻을 게 남았다.
에단은 벨몬트의 머리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바닥에 꽂았다.
쾅!
큰 굉음과 함께 얼굴이 지면에 처박히고, 이내 벨몬트의 몸이 축 늘어졌다.
‘조르기 따위로 천천히 기절시킬 여유가 없어.’
얼핏 봐도 도망칠 기색을 내비치기에, 조금 무식한 방법을 사용해 기절시켰다.
크릉!
에단이 근방으로 다가오자, 휴고가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에단에게 달려들었다.
‘빠르네.’
쐐액!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아도, 휴고의 움직임은 꽤나 효율적이었다.
에단의 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페온의 마나를 빌리긴 했지만, 말 그대로 임시적인 조치였다.
천천히 마나와 함께 성장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몸에 끼워 맞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에단의 몸은 지금 불협화음을 내고 있었다.
‘적당히 하면 되지, 뭐.’
이 정도가 딱 좋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필패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런 감상이 전혀 들지 않았다.
휴고의 움직임은 빠르고 사나웠지만 단순했다.
변칙이나 허초 없이 정직했다. 누런 안광이 노리는 대로 에단을 공격했다.
조금 전까지는 이게 단점이 되지 않았다.
단순한 공격도 압도적인 스피드가 더해지면 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총구가 어디로 향하는지 안다고 총을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지금은 휴고의 움직임에 반응할 수 있었다.
쐐액!
휴고가 날카로운 발톱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에단은 상체의 움직임 하나로 휴고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조급함을 느낀 휴고가 더욱 빠르게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휴고의 상체가 에단을 향해 쏠리자 에단이 몸을 뒤로 젖혔다.
그와 동시에 발을 뻗었다. 에단의 프론트 킥이 휴고의 명치에 꽂혔다.
“커헉!”
휴고의 입에서 처음으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