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천적의 만남 (3)
검술 명가 블란테.
소설에서는 악역으로 등장하는 가문이다.
악역이라고는 하나, 블란테 가문이 대륙을 위협할 음모를 꾸미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가문 사람들의 오만함과 거만함이 문제가 되었다.
블란테의 권위는 주인공에게 통하지 않았고, 그들의 운명은 애당초 결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에게 정의의 철퇴를 맞을 운명으로.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양쪽으로 처맞아서 문제지.’
주인공과 진짜배기 흑막.
주인공에게는 얻어맞고, 흑막에게는 이용당한 블란테는 이름값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다.
물론 그중에서 주인공의 히로인인 셋째 리사는 잘 살아남게 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
에단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블란테라는 가문은 대륙 내에서는 큰 입지를 가지고 있지만, 원작 스토리 내에서는 그다지 큰 비중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잘 쳐 봐야 3류 악역 포지션이다.
설정상으론 분명 대륙에서 손꼽히는 검술 명가로 높은 위상을 자랑했지만, 자식들이 문제였다.
에단을 필두로, 모룬, 카론까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캐릭터가 없었다.
딱히 주인공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문이 멸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순리였다.
에단이, 아니, 류태신이 소설을 읽을 때도 딱히 블란테의 비중이 있다고는 느끼지 못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딱 이 정도 감상.
하지만 에단은 지금 그 상황 속을 헤쳐 가야 했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모든 정보를 이용하고 있는데…….
― 왜 말이 없는 거지?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뜬금없는 설정이 여기서 풀린다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애초에 이 장소는 주인공 일행이 한차례 지나간 장소였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동굴의 심층부에 도착해 보상을 얻어 가는, 주인공 성장의 발판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러한 묘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죽은 나무를 얻은 장면이 끝이었고, 그걸로 충분했다.
에단이 생각했을 때, 죽은 나무가 가진 효용성은 충분히 엄청났으니까.
―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노기 서린 음성에 에단은 잡념을 털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역시 동굴의 안쪽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작은 한숨을 내쉰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저의 선조라고 하셨습니까?”
― 그렇다.
에단은 생각했다.
거짓말일 확률은?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이 세계는 몬스터와 마물이 존재하는 세상이었고, 이능과 이물이 비일비재한 세계관이었다.
망령 따위의 존재가 에단을 현혹하기 위해 농간을 피우는 것일 수도 있다.
에단의 의심을 눈치챘는지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 거짓이 아니다.
에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감상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무엇을 믿고?”
에단의 말이 짧아졌다.
본능적으로 알았다. 여기서는 강하게 나서도 된다는 사실을.
― 자, 잠깐만 내 얘기를 좀 들어다오.
에단의 태도가 돌변한 것을 느꼈는지 목소리가 조급해졌다.
그에 맞춰 에단의 분위기도 조금 부드러워졌다.
‘쉽게 믿기 힘들긴 한데.’
의심스러운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에단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 크, 크흠, 내 이름은 페온이다. 페온 블란테. 빌어먹을 레일라가 내 동생이지.
“레일라라면…….”
― 그래, 너라면 알겠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블란테의 가주였으…….
“모르겠네요.”
― 뭣이?!
페온의 어조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단의 지식은 어디까지나 원작을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하지만 소설에서 블란테 가문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내부에서는 머저리 같은 애들로 인해 붕괴되었고, 외부에서는 온갖 기연과 특혜를 독식한 주인공 무리에게 얻어맞다가 흑막에게 이용당하는 결말을 맞는다.
거기에는 딱히 풀어 나갈 설정도 뭣도 없었다.
당연히 에단의 지식도 블란테 가문의 선조까지는 닿지 않았다.
에단의 말이 단순한 떠보기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페온의 목소리가 음울해졌다.
― 이래서 요즘 애들은…….
“그래서 용무는 무엇이죠?”
에단의 목소리가 심드렁해졌다.
블란테의 선조라.
상당히 의외인 설정이긴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과거의 망령에 불과하다면 에단에게는 득이 없었다.
그리고 에단은 득 될 것 없는 일에 심력을 쏟을 생각이 없었다.
― 기, 기다리거라!
“이유는?”
에단의 말이 확연히 짧아졌다. 하지만 페온은 그것을 따지고 들 여유가 없었다.
― 너에게 힘을 주마! 움직임을 보아하니, 너 검을 쓰는 놈이 아니지?
“……더 말해 보시죠.”
에단이 다시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추기 시작했다.
― 후우, 이제야 내 말을 들을 생각이 들었구나. 시작은, 그래…… 과거의 나는 찬란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나…….
에단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이 길어질 예정이라는 건 서론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간절한 음성이 에단의 발목을 붙잡았다.
― 기, 기다려라!
간절함이 담긴 외침에, 망설임 없이 내딛던 에단의 발이 우뚝 멈췄다.
“아직 할 말이 남았습니까?”
싸늘한 목소리였다.
― ……너에게는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없단 말이냐……?
“그런가 봅니다.”
― 자, 잠깐! 이번에는 진짜 너에게 도움 되는 얘기를 해 주마!
에단의 발이 다시 멈췄다. 에단의 얼굴에는 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에단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페온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 격투술을 알려 주마!
“격투술…… 말입니까?”
전혀 뜻밖의 대답이었다. 묘한 감흥이 들었다.
기대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뜻밖의 기연이었고, 애초에 블란테 가문은 소설 내에서 큰 비중이 없었다.
말 많은 과거의 망자는 조금 흥미를 이끌긴 했지만, 에단은 현혹될 마음은 없었다.
수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필요한 것은 모두 가져갈 생각이었으니.
선조라는 자가 대충 가문의 비전이나, 보물 따위를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페온이 말한 것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에단의 반응이 심상치 않자, 페온이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 꽤나 솔깃하지 않더냐. 몬스터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눈치챘다. 너는 검을 쓰는 녀석이 아니지?
“그런가요?”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단의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 큰 크기는 아니었고, 살상력도 충분했다. 에단은 대부분의 적들을 이 단검으로 사살했다.
행동으로 특색을 추정할 수 있을 만큼 길게 싸우지는 않았다.
에단의 행동은 빨랐고, 단출했다.
최소한의 행동으로 몬스터를 죽였으니, 일련의 과정에서 무언가를 추측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 단검을 쓰는 솜씨가 초보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한눈에 알 수 있지. 검을 쓰는 놈들은 모든 행동에서 검을 의지하는 티가 나. 그런데 너는 그렇지 않더군. 손에 든 단검은 도구일 뿐이라는 듯 행동했지.
“저의 선조라고는 믿기 힘든 언행인데요.”
― 흥! 검술 가문이라고 꼭 검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법이라도 있더냐? 어차피 모든 검술은 모두 강함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련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그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검을 택하지 않은 것뿐이고.
“그렇군요.”
에단이 피식 웃으며 작게 수긍했다.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검술 가문에서 태어나 검이 아닌 외도를 택한 자라…….
꽤나 재밌었다.
페온은 에단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단은 검을 꺼리지 않았다.
단지 자신에게 익숙한 무기가 격투기였을 뿐이었다.
아무리 맨몸으로 날고 기어 봤자, 살상력으로는 날붙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불변의 진리였다.
그렇기에 에단은 검을 수련할 생각이었다. 한 가지에 얽매일 생각은 없었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에단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갑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인지한 눈빛이었다.
페온은 은연중에 그 의중을 알아챘다. 수치심이 치밀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저한테 딱히 끌리는 제안은 아닙니다.”
떠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애초에 투쟁이라는 행위를 즐기기에 격투기를 한 것뿐이다.
에단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이자 오히려 다급해진 것은 페온이었다.
― 이, 이익! 너는 줏대도 없는 것이냐! 자고로 남자는 한길을 파야……!
“글쎄요. 동의하기는 힘들군요.”
MMA에서는 한 가지의 특출한 장점을 가진 선수보다, 육각형으로 여러 가지를 고루고루 익히고 있는 선수가 더욱 강했다.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있다면 결국 상대에게 물어뜯긴다.
에단이 쌓아 온 기술은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흥미는 생기는군.’
류태신은 현대적으로 발전한 격투기를 수련했다.
격투기에 있어서는 거의 끝을 봤다고 해도 무방했다.
선수 시절 류태신은 무적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그 본질은 결국 스포츠였다.
반면에 이 세계는 창과 칼이 난무하는 세계였다. 전투는 곧 살상이었고,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장소였다.
물론 격투기 기술로도 적을 죽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무기와 견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화하고 있는 선조라는 존재는 자신에게 격투술을 알려 준다 말하고 있었다.
흥미가 일었다.
검술 명가의 피를 이은 자가 살상을 위해서 창안한 격투 기술은 어떨까.
하지만 그것에 매달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에단에게 있어 페온의 제안은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반드시 가져야만 할 것은 아니었다.
― ……후우∼ 내가 졌다.
페온은 결국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에단과 말을 지속하면 할수록 자신이 말려들어 가는 것 같았다.
― 내 처지를 솔직하게 말하마.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부탁드립니다.”
― ……끝까지 얄밉게 구는구나.
페온의 한숨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 지금껏 한 말은 사실이다. 나는 블란테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검을 꺼려했지. 맨주먹을 맞대는 전투가 내 피를 더 끓게 했거든. 하지만 당연히 좋은 시선을 받지는 못했다. 선조가 닦아 오는 길을 부정하는 행위였으니까.
페온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에단이 인상을 찌푸렸다.
― 이제야 내 이야기에 공감하는 게냐?
“아니요. 서론이 너무 길어서 그냥 갈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
당장에라도 뒤돌아 나설 것 같은 에단의 태도에, 페온은 어쩔 수 없이 최대한 축약해서 자신의 입장을 말했다.
이윽고 모든 얘기를 들은 에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론은 저한테 기생해야 소멸을 안 한다는 소리입니까?”
― ……기생이라는 말은 조금 듣기 거북하구나. 정확히 말하면 기생이 아니라 서로 상생하는 관계…….
“저에게는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그러죠.”
에단은 이미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 놨다.
가장 급박한 마나에 관한 문제도 ‘죽은 나무’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다.
죽은 나무를 이용한다면 마나 수련법에 소요할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 있었다.
― 아니. 넌 내가 필요할 거다. 방금 네가 끄집어낸 그 기분 나쁜 것에 의존할 생각이 아니더냐? 그건 하책이다. 당장에 힘을 얻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좋은 선택이 아니야. 사기를 통해 흡수한 마나는 결국 내부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지.
“그렇습니까?”
에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소설에서는 그런 묘사가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온의 말이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죽은 나무가 가진 능력은 사자의 마나를 흡수하는 힘이었다.
주인공이야 아무 페널티 없이 사용했다고 묘사되기는 하나, 그것이 에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