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세력 구축 (1)
분위기가 냉각된다.
소문의 속도는 빠르다. 특히 폐쇄적인 집단에서 도는 소문은 더욱 빨랐다.
에단이 카론을 이겼다.
에단이 토벌대를 꾸린다.
토벌대의 첫 인원으로 마구간 하인을 택했다.
제정신이 아니다.
자만이 하늘을 찌른다.
이와 같은 소문들이 무성하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블란테 가문에서 행하는 정기 토벌은 자신의 용맹함과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다.
수습 기사들에게는 공을 세워 정식 기사로 임명받을 천재일우의 기회이기도 했다.
물론 목을 걸고 나가는 전쟁터인 만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명예와 각오를 다지고 나섰다.
그런데 그런 신성한 토벌에 망나니가 등장해 물을 흐리고 있었다.
첫 번째 단원으로 하인을 영입한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들이 훈련하는 장소에까지 찾아와 자신들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자긍심 높은 수습 기사들은 모두 소리 없이 분노하고 있었다.
마구간이나 지키던 하인과 비교되는 이 상황에.
“왜, 쫄리냐?”
에단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겁을 집어먹은 건 그 녀석 같은데, 아닙니까?”
“설마. 야, 겁먹었냐?”
휴고의 발을 지그시 짓밟자 그가 당황한 눈초리로 에단을 바라봤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대체 어쩌려고 이러시는 겁니까…….’
하지만 휴고의 생각이 어떻든, 에단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최고의 훈련은 실전이다.’
어차피 휴고의 잠재력은 알고 있었다. 신체 능력만 보면 웬만한 기사와 견줘도 부족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심성.’
휴고의 심성은 여리다.
‘본성을 끌어내야지.’
차분하게 성장 드라마를 지켜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벌써 정기 토벌의 일정이 훌쩍 다가왔다.
실전을 경험시켜 줄 기회는 앞으로 없었고, 휴고의 심성은 뜯어고친다고 바뀌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휴고의 정신을 개조할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전이었다.
이번 기회에 휴고에게 그것을 경험시킬 생각이었다.
에단이 휴고의 귓가에 속삭였다.
“넌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
에단이 말을 이어 갔다. 말을 듣는 휴고의 안색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갔다.
그 뒤에 잠시 머뭇하던 휴고가 입을 열었다.
“고추 달린 새끼가 잔말이 많네.”
‘옳지.’
완전 만족스러운 말투는 아니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하지만 이 정도도 장족의 발전이었다. 에단은 만족스러웠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눈앞에서 하인 나부랭이에게 모욕을 당한 수습 기사가 격분을 감추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걸 노린 거니까.’
트래쉬 토크.
트래쉬 토크는 격투기 선수 같은 엔터테이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단순히 상업성을 위한 것은 아니지.’
시합이든, 대련이든, 결투든, 실전이든.
가장 중요한 것은 평정심이었다.
냉정한 이성을 유지해야만 준비해 온 것들을 온전히 보여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가토는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수습.
실전 경험은 부족했고, 지금과 같은 도발도 겪은 적이 없을 터.
그러한 것들이 표정에 벌써부터 드러나고 있었다.
‘좋네.’
분노를 주체 못 하던 가토의 분위기가 갑자기 차게 식었다.
하지만 에단은 갑작스런 변화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너무 꼭지가 돌아서 오히려 머리가 식었군.’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더 이상의 모욕은 참기 힘들군요. 도련님이라면 어찌 이해할 수 있지만…….”
수습 기사의 살기 어린 시선이 휴고에게로 향했다.
휴고가 뒤로 주춤 물러나려 했지만, 이미 에단이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물러나는 휴고를 막아선 에단이 씨익 웃었다.
“앞서 말한 대로, 증명하는 방식은 간단하네. 결투를 신청해.”
“……그걸 원하신다면 해 드리죠. 후회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수습 기사가 장갑을 벗어 휴고의 안면을 향해 던졌다.
휴고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장갑을 피했고, 집어던진 장갑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네.’
에단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거 어쩌지? 너 따위의 장갑은 맞고 싶지도 않다는데.”
“제, 제발…… 그만…….”
휴고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에단과 수습 기사를 번갈아 바라봤다.
수습 기사는 에단의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 않고 휴고를 응시했다.
“블란테 가문의 수습 기사 가토, 결투를 신청한다. 이름을 대라.”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가토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휴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에단 토벌대의 대원 휴고…… 결투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결투의 막이 올랐다.
* * *
“도련님, 이제 어쩌죠?”
휴고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에단을 바라보는 휴고의 표정에는 원망도 깃들어 있었다.
“아까는 잘만 말하더니 이제 와서?”
“그건 도련님이 시켜서…….”
“어허, 사내가 되어서 한 입으로 두말을 하면 쓰나.”
“……하.”
결국 체념한 휴고가 고개를 떨궜다.
에단은 장난기 있던 웃음을 지운 채 휴고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네가 이겨.”
“하지만…… 상대는 기사인데 제가 어찌 감히.”
“지랄. 누가 기사야? 고작해야 수습 기사 햇병아리 새낀데.”
“…….”
“걱정 마.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이겨. 진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 어차피 의미가 없으니까.”
“의미가 없다니요?”
“저 새끼한테 지면 내가 널 죽일 거거든.”
“…….”
휴고의 얼굴이 검게 죽어 갔다.
* * *
연무장 한편에 공간이 마련되었다.
꽤나 많은 인파가 모였음에도 웅성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침묵이 저들의 분노를 대변해 줬다. 공기가 무거웠다.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가토가 먼저 나섰다.
싸늘하게 식어 있는 가토의 얼굴이, 그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 줬다.
가토는 재능 있는 수습 기사였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이라도 불평이나 불만 하나 없이 견뎌 냈고, 그러는 와중에도 동료를 챙기는 전우애를 보여 줬다.
다른 수습 기사들도 동료이자 경쟁자인 가토를 인정했다.
가토라면 분명 훌륭한 기사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오늘도 가토가 모욕당한 수습 기사의 대표로 앞에 나왔다.
가토의 어깨에는 그들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휴고의 표정은 미묘했다.
마치 어딘가 불안한 것 같은 표정으로 가토의 앞에 마주 섰다.
가토는 그런 휴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녀석도 결국 망나니에게 이용당한 것뿐인가…….’
차갑게 식은 분노가 잦아들고, 이성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분노 사이에 일말의 연민이 깃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대가는 치러야 한다.’
아무리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한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면 고통 없이 끝내 주마.”
가토가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다. 하지만 휴고는 가토의 예상과는 상반되는 대답을 내뱉었다.
“지, 지랄, 쫄리냐?”
순간, 가토의 이마에 거대한 혈관이 돋아났다.
“곱게 끝날 생각은 말아라!”
가토의 살기 어린 노성에도 휴고는 여유롭게 가토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휴고의 손에 들린 목검은 엉성했다.
검을 수련한 자의 것이 아니었다.
아직 수습 기사에 불과한 가토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숱한 대련의 경험이 가토에게 미래를 엿보여 줬다.
가토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격분 속에서도 승리를 위한 검로가 보였다.
반대로 휴고는 약점투성이였다.
손에 쥔 목검은 엉성했고, 자세는 허점투성이였다.
승리를 확신한 가토가 달려들었다.
그동안 숱하게 흘린 피와 땀이 결과를 보여 주고 있었다.
쐐액!
그때 휴고가 목검을 집어던졌다. 가토의 눈이 커지며 목검을 쳐 냈다.
가토의 대처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최적의 판단을 했다.
하지만 빠른 것으로는 휴고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같이 고된 단련을 이겨 낸 휴고의 신체 능력은 가토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휴고는 짐승처럼 가토에게 다가갔다. 가토는 어떻게든 대응하려고 목검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어진 휴고의 공격은 예상을 벗어났다.
휴고가 도약했다.
탄력적인 근육이 상식을 뛰어넘는 도약을 가능케 만들었다.
휴고는 그 도약력에 힘입어 무릎을 들어 올렸다.
가토는 그 와중에도 목검의 경로를 꺾어 휴고의 공격을 방어하려 들었지만.
우지끈.
목검이 볼품없게 으스러지며 휴고의 무릎이 가토의 턱에 꽂혔다.
뻐억!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가토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대련이 막을 내렸다.
* * *
‘역시 먹힐 줄 알았어.’
무기를 쥔 것과 맨손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의식해야 하는 거리도 늘어나고, 가볍게 던지는 공격들도 큰 위협으로 다가온다.
격투기 선수들도 팔이 긴 선수를 만나면 상대하기 껄끄러워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검을 쥔 상대는 어떠한가.
평범한 방식으로는 결코 승리를 쟁취할 수 없다.
물론 실력 차이가 많이 난다면 가능하겠지만, 휴고는 아직 제대로 배운 것이 전무하다.
그렇기에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알려 줬다.
‘먼저 상대를 도발해.’
선제공격을 유도해야 승산이 높아졌다.
‘그리고 검을 던져.’
이건 에단도 애용한 방법이다.
피하든지, 막든지.
어떤 방식을 택해도 상대는 일말의 빈틈이 생긴다.
그리고 그 빈틈이면 충분했다.
남은 것은 휴고의 신체 능력이다.
마치 짐승을 연상케 하는 휴고의 스피드와 탄력이면, 단 한 번으로 상대를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저 탄력에 가장 걸맞은 공격은 바로.
플라잉 니 킥.
역시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에단은 휴고와의 훈련에서 플라잉 니 킥을 위한 동작만을 알려 줬다.
‘체력 훈련인 줄로만 알았겠지.’
휴고가 해 온 모든 것은 플라잉 니 킥의 사전 동작이었다.
‘워낙 신체 능력이 뛰어나서 별로 알려 줄 것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가능할 것이라 여겼다.
휴고의 신체 능력은 인간의 수준을 뛰어넘었으니까.
‘애초에 인간이라고 보기도 애매한 녀석이지.’
에단이 흐뭇한 미소를 지은 채 휴고를 바라봤다.
가속도가 붙은 무릎이 제대로 턱에 적중하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물론 상대가 마나 유저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아쉽게도 상대는 수습 기사에 불과했다.
아직까지 그 정도의 맷집과 반사 신경을 갖추지는 못했다.
결투에서 승리한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좌중은 침묵에 휩싸였다.
‘내가…… 이겼어?’
휴고는 쉽사리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저 에단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다.
반신반의했다.
에단은 확신했지만, 휴고는 의심했다.
하지만 결과가 증명했다.
에단이 옳았고, 휴고가 승리했다.
휴고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기사를 이겼다.’
사실대로 말하면 수습 기사였지만,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휴고에게는 수습 기사든, 정식 기사든 모두 넘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사람들이었다.
휴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하인들에게도 천대받던 하인이었으니까.
처음 겪은 승리는 짜릿했다.
그때, 에단이 다가와서 휴고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걱정하지 말랬지?”
“그, 그러네요…….”
“그럼 돌아가자.”
어차피 수확은 내일이 되어야 거둘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니나 다를까 가토가 별채에 찾아왔다.
해가 뜨기도 전에 찾아왔다고 네이드가 말했다.
이미 소문을 들은 것인지 네이드의 눈초리가 의미심장했지만, 에단은 가볍게 무시했다.
“조금 더 기다리게 해.”
“알겠습니다.”
대어를 낚으려면 인내를 길러야 했다.
그렇게 오전 훈련을 끝내고, 오후 훈련을 시작하기 전에 네이드를 불렀다.
“걔 아직 안 갔지?”
“네. 아직도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럼 안내해. 만나러 가야겠어.”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별채로 향하는 작은 문 앞에는 가토가 서 있었다.
가토의 눈은 흐릿했다. 이전 같은 총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재밌군.’
기사로서의 자부심이 높던 녀석이 추락했다. 당연히 그 충격이 적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생각 이상이었다.
“이미 끝난 거 아니었나? 구질구질하게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인정할 수 없습니다.”
가토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모래를 삼킨 것 같았다.
“뭐가?”
피식 웃은 에단이 대답하자 가토는 멍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저는 평생을 수련해 왔습니다. 기사가 되기 위한 목표 하나만을 보고 저의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그따위 방식으로 패배하면 제 인생은 뭐가 되는 겁니까?”
가토의 말에 에단이 눈을 껌뻑였다.
“그래서 그따위 투정을 부리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투정이라니……!”
“시끄럽고. 둘 중 하나겠지. 재능이 없거나, 수련을 게을리했거나.”
에단의 말에 가토가 입을 다물었다.
억울했다. 또다시 결투를 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 비겁한 방식에는 두 번 다시 당하지 않는다.
“쓸데없는 생각 집어치워. 그게 실전이었으면 넌 죽었어. 진 건 진 거야.”
“…….”
에단의 대답에 가토는 침묵했다.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