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소설 속 망나니 (4)
“……뭐라고?”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한 말이 사실이겠지?”
빈센트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확실합니다. 불시에 이루어진 에단 도련님의 일격에, 카론 도련님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쓰러졌습니다.”
“……허.”
빈센트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 빈센트 앞에 서 있는 기사 첸은 빈센트가 신용하는 얼마 없는 충복이었다.
지금 상황에 첸이 거짓 보고를 할 이유도 없으니, 이 보고는 사실일 터였다.
어차피 본 사람도 한둘이 아닐 테니, 첸이 아니었더라도 빈센트의 귀에 들어올 내용이었다.
“자네가 보기엔 어땠지?”
빈센트의 물음에 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놀라웠습니다. 마나도 깨우치지 않은 일반인의 몸놀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거운 체중을 최적으로 이용한 움직임이었습니다.”
“그 정도의 평가를 내릴 정도인가?”
첸은 검은 사자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검은 사자 기사단은 블란테의 정예 중에서도 최정예로만 구성된 기사단이었다.
블란테에도 몇 없는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강자이자, 기사단의 단장이 내린 평가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후한 평가였다.
단장으로서의 첸은 엄격하고, 박한 평가를 내리기로 악명 높았다.
“마치 그간 고의로 자신의 힘을 숨기고 있던 것 같더군요.”
“……알겠다. 이제 나가 보도록.”
첸이 가볍게 목례를 취하고 영주실을 나섰다.
영주실에 앉은 빈센트가 머리를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허허.”
속만 썩이던 망나니가 꽤나 재밌는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 * *
에단의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사건의 발단은 싸가지 없는 동생이 먼저 제공했다.
아무리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을 받는 에단이라고 한들 명색이 가문의 혈통이자, 카론의 형이었다.
에단은 꿀릴 만한 게 없었다.
대놓고 던지는 장갑 따위에 맞아 줄 생각도 없었다.
저택의 복도를 거침없이 걸으며 수많은 시선을 마주했지만, 에단을 바라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뭐지?’
걷던 도중 에단의 발걸음이 멈췄다.
묘하게 거슬리는 감각이 에단의 발을 멈추게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감각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녀석 탓이군.’
앞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남자였다.
외관상 특별할 점은 없어 보였지만, 에단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강해.’
이런 감각은 처음 느껴 봤다.
사람에게는 개개인의 기류가 존재했다.
미신이나 과민 반응이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에단은 그 사실을 미신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선수 시절에도 자주 느꼈다.
뛰어난 기량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의 감각은 처음이었다.
‘네이드랑 비슷한 정도인가.’
에단이 시선을 돌려 네이드를 바라봤다.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있는 네이드가 에단을 바라봤다.
“왜 그러시죠?”
“쟤는 누구지?”
“첸 님 말씀이신가요?”
“아.”
떠올랐다.
에단의 머릿속에 엉망으로 널브러진 기억 중 하나가 꺼내졌다.
‘기사단장쯤 되면 저 정도란 말이지.’
에단이 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싸우면 진다.’
에단은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호승심의 여부 문제가 아니었다.
에단은 첸과 싸우면 필패다.
‘이게 경지의 차이인가.’
미소가 지어졌다.
묘한 흥분도 들었다.
강해질 수 있다.
예전보다 더.
류태신 시절보다 더욱 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때처럼 무료하지도 않았다.
이 소설 속 세계는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득실거렸으니.
‘그래도 결국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건 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모를까.
에단은 자신이 있었다.
원작 주인공이 얻어온 기연들을 에단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첸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지나갔다.
에단은 고개를 슬쩍 돌리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대답 없이 발을 옮겼다.
첸은 묘한 눈초리로 멀어지는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먼발치에서 지켜봤을 때도 의문이 들긴 했다.
그때 에단이 보여 준 움직임은 재능이나 반사 신경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정밀했으며, 신속했다.
마치 전문적으로 수련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럴 일은 없을 테지만…….’
검술 가문에서 천박한 박투술이나 격투술 같은 것을 수련한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 * *
후우.
에단은 심호흡을 한 채 앞을 바라봤다.
문 앞에 섰을 뿐인데 벌써부터 몸이 저릿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몸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기운과 피부를 찌르는 존재감이 느껴졌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했다.
‘정말 적성에 맞는군.’
싸우고 쟁취하는 것을 좋아해서 격투기를 시작했다.
부와 명예를 얻어도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적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자 허무함이 엄습했다.
투지는 이미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간절함을 지니지 않아도 시합은 늘 이겨 왔다.
그런 그에게 이런 감각은 오랜만, 아니, 처음이었다.
에단은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라.”
마치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가 문을 타고 넘어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죠.”
네이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에단을 바라봤다.
“긴장 안 해.”
긴장은 적성에 안 맞는다.
에단은 피식 웃더니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 들어가자 상당히 정갈하고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는 가구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에단의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의자에 앉아 있어 체격을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에단은 대략적인 눈대중으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가늠했다.
‘신장은 대략 180 후반에 체중은 90킬로 정도인가.’
검을 쓰기 때문인지 압도적인 거구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 수 있었다.
‘더럽게 강하군.’
강자를 볼 때 맹수를 빗대어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빈센트에게 사자를 들이밀면 사자는 곧바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갈 거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빈센트는 강했다.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다.”
빈센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동생이 예절을 모르기에 조금 지도를 해 줬을 뿐입니다.”
“……예절? 허, 예절이라고 했느냐?”
빈센트가 헛웃음을 지었다.
별로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말을 꺼낸 당사자가 다름 아닌 에덴이었다.
“네가 그동안 벌인 짓은 예절을 지켰다는 말이냐?”
“그때는 뭐…… 잠깐 방황했다고 치죠.”
“허, 뻔뻔한 것은 변함없구나. 지금은 정신 차렸다는 소리냐?”
“정확합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빈센트의 눈살이 좁혀졌다.
‘확실히 달라졌군.’
본래의 에단이라면 빈센트 앞에서 고개를 들기도 힘들어했다.
패악질을 일삼는 오만한 망나니였지만, 빈센트 앞에서는 겁을 집어먹은 하룻강아지에 불과했다.
빈센트는 그런 모습에 더 크게 분노했다.
포악한 성정을 가진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자를 두려워하고 꼬리를 마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쉽게 바뀌지 않았고, 사건을 몰고 다녔다.
결국 빈센트는 에단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끽해야 사건을 일으키면 근신 처분을 내리는 정도.
사실상 시선을 끊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에단이 바뀌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도 가장 신용하는 두 명이 내뱉은 말이었다.
‘거짓이 아니었군.’
반신반의하며 한 호출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달라져 있었다.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단은 지금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었다.
빈센트는 지금 미약하게 기운을 끌어 올리고 있었다.
마나 유저라면 이겨 낼 만한 수준이었지만, 에단은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이었다.
그가 견디기에 버거운 수준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에단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보란 듯이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빈센트에게는 묘한 감흥을 일으켰다.
빈센트가 피식 웃더니 기세를 거뒀다.
“그 말은 이제 정신을 차렸다는 소리냐?”
“사춘기로 방황할 나이는 지났죠.”
“확실히 혀는 길어졌구나. 그 말에 책임질 수는 있겠지?”
빈센트의 시선이 에단을 향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에단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당연하죠.”
“그래. 그렇다면 이제부터 마나 수련을 시작한다는 소리겠구나.”
“아니요.”
“……뭐라고?”
빈센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한 말은 말장난이었다는 건가?”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넘겨짚지 말아 주시죠.”
“무슨 소리지?”
“아시다시피 저는 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허. 더 말해 봐라.”
뻔뻔하기 그지없는 에단의 태도에 기가 찼지만, 빈센트는 그의 말을 막지 않았다.
에단은 말을 이었다.
“조금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단, 이 살덩이부터 떼어 버리려고요.”
“헛소리를 하는구나. 수련을 하면 그깟 살쯤은 자연스럽게 빠지게 될 거다.”
“그거야 뭐 당연하죠. 문제는 제가 지금 이런 몸으로 기사들과 같이 수련을 한다고 따라갈 수 없다는 겁니다.”
“……더 말해 봐라.”
“일단 기초를 쌓는 게 먼저입니다.”
“그 뒤부터 수련을 하겠다?”
“맞습니다.”
에단이 히죽 웃었다. 빈센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에단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보거라. 무슨 속셈이지?”
에단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미 가문에서 제 입지는 좁다 못해 바닥에 가까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갑자기 눈에 띄는 일을 벌이고 싶지 않네요.”
“경쟁을 회피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럴 리가요.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단지 귀찮은 미래가 보이기 때문에 사양하는 것뿐이죠. 승산 없는 싸움에 목을 매고 싶지도 않고요.”
“……너 정말 에단이 맞는 거냐?”
에단은 말없이 씨익 웃었다.
* * *
영주실을 나선 에단은 조금 전의 결과가 만족스러웠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냈다.
생각보다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애초에 에단이 원하는 것이 포상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얻어 내기 수월한 것도 있었다.
근신 기간의 연장.
에단이 원하는 것은 근신이 길어져 몸을 가꿀 시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서 괜히 근신이 해제된다면 또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에단의 머릿속에는 차곡차곡 계획이 쌓여 갔다.
‘일단 영지를 나서야 한다.’
소설에서 본 정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영지 밖으로 나서야 했다.
어차피 끝이 좋지 않을 가문에서 지금부터 아귀다툼을 해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마나는 얻어야겠지만.’
정석적인 기사의 수련법대로 수련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에도 주인공이 얻어 가는 치트는 존재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에단이 자신의 배를 바라봤다.
여전히 푸짐한 뱃살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지방부터 떨쳐내야 할 텐데.’
암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