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소설 속 망나니 (3)
원작 소설에는 블란테 가문에 대한 비중이 크지 않았다.
아니, 적다고 보는 게 옳았다.
좋게 쳐도 딱 중간 보스의 입지.
소설의 흐름에 간간이 떡밥이 뿌려지고, 연관된 캐릭터가 나오는 정도.
그러다 여러 상황이 맞물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는 몰락하게 된다.
그런 혼란 속에서 떨어져 나온 떡고물들은 주인공의 양분이 되었다.
‘그 꼴은 못 보지.’
비루먹은 몸으로 빙의한 것도 어처구니가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혼자 기연을 독식하는 꼴을 두고 보라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에단은 최근까지 가주의 눈에 띌 만한 행동을 보인 적이 없었다.
요 며칠간 한 것이라고는 연무장을 연신 달린 것 말고는 전무하다고 봐도 좋았다.
운동하고, 먹고, 자고, 싸고.
이 행위들의 무한 반복이었다.
뼛속까지 격투기 선수인 류태신은, 에단의 배를 둘러싸고 있는 두툼한 뱃살을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눈에 거슬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당장은 이 지방 덩어리부터 조금 지워 내야지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서 다른 계획 따위는 뒤로 미뤘다.
어차피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은 드물었다.
선택과 집중.
지금 가장 먼저 행해야 할 것은 체중 감량이라 판단한 것이다.
체중이 많이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복은 답답하게 몸을 조이고 있었다.
“대뜸 나를 부른 이유가 뭘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쎄요. 이번 일을 꾸짖으려고 부르시지 않았을까요?”
네이드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어딘가 묘하게 기분 나빴으나, 그걸 내색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궁금은 하네.’
현시점.
검으로만 봤을 때는 한 손에 꼽히는 실력자.
대륙의 절대자 중 한 명.
그 고명한 검술 명가의 주인이었다.
세계 최강 중 하나로 인정받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은 류태신으로서는 이 세계의 절대자라 불리는 존재가 궁금했다.
‘과연 어떤 사람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에단은 개인적인 궁금증을 풀 생각이었다.
“그래, 바로 출발하자.”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 * *
별채와 본채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거리가 생각 외로 가까워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생각해 보니 타당한 위치 선정 같았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을 시에는 근신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감시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뭐 잘된 일이었다.
지금 에단은 근신이 오히려 달가운 상태였으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가.
“시선들이 살벌하구만.”
에단이 휘파람을 불었다.
본채에 발을 딛자마자 수많은 시선이 가시처럼 박혀 피부가 아릴 정도였다.
재밌었다.
인식이 이 정도로 개차반일 줄이야.
그래도 가문의 적통 중 하나인데 말이야.
곱지 못한 시선은 익숙했다.
격투기 선수로 세계를 누빌 때도 이런 눈길은 일상적으로 받았다.
시선으로만 끝나면 다행이었다. 류태신에게는 온갖 야유가 쏟아졌다.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었다.
격투기 선수 시절의 류태신은 발언 하나하나가 거칠었으니까.
그리고 그 발언들은 모두 시합으로 증명시켜 왔었다.
물론 거친 발언이 상대 선수를 무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나, 그만큼이나 시시한 상대인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 도발을 하거나, 자신을 꺾고 챔피언 벨트를 차지하겠다는 자가 있으면 가만있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타국에서 경기를 치를 때, 상대 선수가 그 국가의 자국민이면 더욱 심한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류태신은 오히려 그런 상황을 즐겼다.
쏟아지던 야유가, KO로 인해 정적으로 돌변하는 상황.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표정들 풀지?’
어차피 저 표정은 조만간 바뀔 예정이었다.
에단은 입가에 오히려 미소를 머금었다.
여유롭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기사들과 하인들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에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인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망나니라고 욕을 먹고 손가락질당한다고 해도 에단의 핏줄은 블란테 가문의 것이었다.
그리고 저들은 블란테 가문의 속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신분의 간극은 도저히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에단의 발걸음은 한없이 여유로웠다.
그때, 에단의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나왔다.
“돼지 새끼가 여긴 무슨 일이냐?”
팔짱을 낀 채 곱지 못한 시선으로 에단을 바라보는 남자.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외모를 지녔지만, 몸은 잘 벼린 칼날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두툼한 뱃살을 지닌 에단과는 정반대의 남자가 사나운 표정으로 에단을 훑어봤다.
‘뭐야.’
에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원작 소설에서는 서브 캐릭터에 관한 외모 묘사가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있는 묘사도 여자 캐릭터에 치중되어 있었기에, 에단으로서는 눈앞에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네가 누군데?”
“……뭐라고?”
에단의 대답을 예상 못 했는지, 남자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모욕하는 거냐? 감히 돼지 새끼 주제에?”
남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모멸감에 몸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에단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 네가 뭔데. 대뜸 지랄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인내심의 한계가 높지 않은 에단은 대놓고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애당초 상대방이 예의를 밥 말아 먹은 상황 아닌가.
에단은 이 상황에서 굳이 말을 조심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상황이 과열되어 가자 네이드가 다가왔다.
“카론 도련님, 죄송합니다. 지금 에단 도련님께서…….”
네이드가 상황을 중재하려 했지만, 카론이 네이드를 밀어냈다.
“너는 빠져 있어. 그리고 너, 가문에 먹칠을 일삼는 망나니 주제에 감히 나를 모욕해?!”
카론이 언성을 높여 갔다.
에단은 잠시 카론이라는 이름을 곱씹었다.
뭔가 떠오를 것도 같은데…….
“아! 네가 내 동생이구나?”
비중이 크지 않은 조연이라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뭐라고?”
카론이 사태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자, 에단이 그 상황에 못을 박았다.
“동생 주제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는 소리를 하는 거잖아. 혹시 대가리에 하자가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에단의 본 성격에 가까운 말투였다.
물론 류태신의 성격도 온순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말이다.
그러니 두 성격이 합쳐진 지금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시비를 건 것은 카론이었다.
에단은 이 상황 속에서 참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격투기 선수였을 때도 매한가지였다.
상대 선수가 도발성 발언을 하면 류태신은 그의 배로 돌려줘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런 거친 언행으로 인해 안티 팬도 상당히 형성되었지만, 반대로 그런 거침없는 스타성을 좋아하는 팬 또한 상당했다.
에단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카론은 멍하니 있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네.”
웃음을 멈춘 카론이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벗은 장갑을 그대로 에단에게 던지려고 한 순간.
에단의 육중한 몸이 빙그르 회전했다.
육중한 질량에 회전이 실리고 그 힘은 그대로 카론의 턱에 적중했다.
뻐억―!
완벽하게 적중한 백스핀 블로우.
에단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무거운 질량을 최대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공격법을.
그리고 그 질량과 함께 제대로 꽂힌 백스핀 블로우를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에단이 알기로는 없었다.
털썩.
카론의 몸이 바닥에 허물어졌다.
아무리 몸을 단련시켰다고 한들, 턱까지 단련시킬 수는 없었다.
턱에 충격이 가해지면 그대로 뇌가 흔들리게 되고, 사람의 몸은 중심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
짧은 순간에 카론이 바닥에 엎어지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아, 미안. 나도 모르게 그만.”
정적을 느낀 에단이 뒤늦게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사실 조건반사는 맞았다.
카론이 장갑을 던지려고 하는 순간, 에단은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카운터를 꽂아 넣었던 것이다.
백스핀 블로우를 사용한 것도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류태신의 본능이 이 무겁기만 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최적의 공격을 보여 준 것이었다.
‘……골치 아프게 됐네.’
에단이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이러려고 벌인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별 비중도 없는 새끼가 까부니까 이 사달이 벌어진 거 아니야.’
갑자기 대뜸 시비를 건 카론에 대한 짜증이 치밀었다.
잠깐 머리가 복잡해졌지만, 에단은 금방 떨쳐 냈다.
‘신경 쓰지 말자.’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게 되면, 앞으로의 사건에는 손도 대지 못한다.
게다가…….
‘애초에 망나니 새끼잖아?’
여기서 조금 더 막 나가면 어때.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한들 늦었다.
“카론 도련님!”
곁에 있던 기사들이 뒤늦게 카론에게 달려와 부축하기 시작했다.
“네이드, 가자.”
자리를 벗어날 필요성을 느낀 에단이 네이드를 불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괜히 여기에 발이 묶일 필요가 없었다.
‘기껏해야 징계로 끝나겠지, 뭐.’
지금껏 벌인 일이 있는 만큼, 한 소리 들을 것은 각오하고 있었다.
거기에 사소한 사건 몇 개 추가된다고 달라질 것도 없으리라 판단하기도 했고.
‘……우연이 아니었군.’
네이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일전에 술집에서 겪은 반격.
당시에도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 카론을 제압한 것을 보고 다시금 확신했다.
카론은 가문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마나 유저였다.
갓 입문한 것이기는 하나, 마나를 깨우친 자와 그러지 못한 자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카론의 나이는 열여섯.
평균적으로 마나 유저로 입문하는 나이가 20대인 것을 감안한다면 카론의 성취는 놀라운 수준이었다.
‘블란테 가문이 아니었다면 말이지.’
카론은 에단과 마찬가지로 블란테 가문의 적통이었다.
대륙 제일가는 검술 명가의 피를 물려받은 이상, 세간의 영재 수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렇기에 카론은 늘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자신의 불안감을 해소시킬 유일한 존재를 찾아냈다.
에단.
가문의 수치라고 불리는 망나니.
마나를 깨우치기는커녕 검을 두려워해 검조차 휘두르지 못하는 멍청이.
게으른 천성과 포악한 성격. 바닥을 치는 재능.
카론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자존감을 높이기에는 에단만 한 존재가 없었다.
그때부터 카론은 에단을 주기적으로 괴롭혀 왔다.
그리고 그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아무리 에단이 악명 높은 망나니라고 한들, 무력에서 밀리는 이상 방도가 없었다.
권위로 누르자니 같은 적통이었으며, 블란테 가문은 힘을 숭상했다.
가문에 속해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에단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단은 그 존재만으로도 가문에 민폐를 끼치는 존재였으니.
한데 바뀔 일 없어 보이던 먹이사슬이 오늘 무너졌다.
비록 정식 결투도 아니었고 카론이 방심하고 있었다고 한들, 카론은 마나 유저였고 에단은 일반인이었다.
그런데도 쓰러진 것은 카론이었다.
‘이변이 생각보다 일찍 일어났군.’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술집에서 겪은 공격은 네이드조차 순간 아찔한 느낌을 들게 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지?’
단시간에 너무 많이 바뀌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블란테의 피는 어디 가지 않는 것인가.’
검의 저주를 받았다고 할 만큼 몸 쓰는 것에는 재능이 없던 에단이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을 계기로 재능이 개화됐을까.
자타가 공인하는 검술 명가의 피 때문일까.
‘허허.’
네이드는 미소를 머금었다.
좋은 일이었다.
후계자들의 경쟁은 곧 블란테의 힘을 강하게 만들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