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소설 속 망나니 (2)
목욕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더럽게 넓네.’
이게 고작 별채라고?
얼마나 돈이 썩어 넘치면 이 정도 크기의 별채가 고작 근신용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었지만 에단에게는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었다.
뭘 해도 의심 사지 않고, 눈총을 받지도 않았다.
그러니 적어도 에단에게만큼은 최적의 장소였다.
에단은 잠시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별채까지 오면서 대략적인 생각은 정리했지만, 그렇다고 한들 완전히 정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설 속에 들어왔다.
그것도 엑스트라 악역으로.
믿기 힘든 현실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리하기도 힘들었다.
‘먼저 가문 밖으로 나가야 하나.’
에단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가문 내에서 활용도가 떨어졌다.
소설은 언제나 주인공의 시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속단할 문제는 아니었다. 블란테는 거물이었다. 단순히 명망 높은 가문 수준이 아니었다. 대륙에서 적수를 찾기 힘든 무력 집단으로서 일대를 호령하는 사자였다. 류태신은 알고 있었다. 권력이 가지는 이점이 얼마나 큰지를.
그렇기에 도망치듯 가문을 떠나는 것은 좋은 선택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당장 가용하기 힘든 정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주인공이 알게 되는 지식이나 주인공이 개입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알고 있었지만, 블란테라는 가문 내에서 벌어지는 독자적인 상황은 그다지 알지 못했다.
‘가문이 멸망한다는 사실과 그 외에 사사로운 것들…….’
그러나 블란테 가문의 멸문은 스토리의 중반부 이후에 벌어진다.
그 배후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당장 손쓸 수는 없는 상대였다. 그전까지는 에단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여야 했다.
‘가문을 떠나는 방법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스토리상 에단은 주인공과 만나게 된다.
만나게 되는 장소는 대륙의 아카데미.
아카데미에 가기 전 도시에서 처음 주인공과 조우해 시비를 걸고, 아카데미에서 제대로 깨진다.
그리고 주인공이 다른 지역으로 임무를 배정받았을 때, 별 되도 않는 수를 쓰다가 결국 주인공에게 목숨을 잃는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첫 살인이었다.
그동안 주인공은 우물쭈물 망설이는 성향이 짙은 캐릭터였으니까.
‘그렇게 뒈질 생각은 없고.’
그딴 식으로 병신같이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에단이 주인공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큰 주목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걸 독차지할 필요는 없지.’
딱 필요한 만큼.
자신의 안위를 지키고 비굴해지지 않아도 될 정도의 패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
어차피 흐름은 에단이 쥐고 있었다.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는 알지 못했지만, 원작의 큰 흐름은 바뀌지 않을 터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에단이 채 대답도 하기 전에 노신사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실례했군요. 아직 도련님이 식사를 하지 않아 걱정이 돼서 말이죠.”
태연한 답변에 에단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식사부터 하시지요.”
네이드의 한 손에는 상이 얹혀 있었고, 반대편 손에는 의자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이제는 힘을 숨기지도 않는 건가?”
원래 스토리상 네이드는 평범한 집사를 연기하고 있었다.
네이드의 힘이 세간에 드러나는 것은 원작 소설에서도 중반부에 해당한다.
그런데 지금 네이드를 보아하니, 힘을 숨길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힘이라뇨? 저 같은 일개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생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에단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그런데 의자는 왜 두 개지?”
“저도 아직 밥을 못 먹어서 말이죠.”
“……아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 * *
네이드가 차려 준 식사는 상당히 훌륭했다.
천성이 한국인인 류태신에게는 이국적이라고도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먹는 거를 가리지는 않았다.
첫날부터 무리하게 몸을 움직인 만큼 제대로 된 영양을 섭취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네이드가 차린 상은 영양적으로 훌륭했다.
육류와 야채의 밸런스가 적절했으며, 과하게 기름지지도 않았다.
“격리 기간은 언제까지지?”
“대답은 따로 없으셨습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가주님도 상당히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한두 달 정도로 생각하면 되나?”
그 정도 기간이 딱 적절했다.
에단이 최소한의 몸을 만들기에.
“글쎄요. 저는 단지 집사일 뿐이라 가주님의 의중을 알 방도가 없네요.”
네이드가 미소 지으며 말하자 에단이 딱 잘라 말했다.
“어차피 상관없어. 누가 부르든 난 여기서 두 달 동안 박혀 있을 거니까.”
에단의 말에 네이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살 빼야지.”
지금은 이 출렁이는 살을 없애는 게 우선이었다.
* * *
이후 에단의 생활양식은 지극히 단순해졌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오전 운동을 나서면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점심을 거르는 에단의 모습에 시종들이 걱정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의 지방을 가진 몸은 고작 한 끼를 굶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식사를 소홀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운동이 끝났을 때는 확실하게 제대로 된 영양을 챙겼다.
상당히 높은 강도의 운동을 진행하는 만큼, 그만한 영양이 보충되어야 몸이 상하지 않았다.
에단의 몸은 운동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제대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방은 순식간에 크기를 줄여 갔으며, 빠르게 근육이 붙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아직 한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았지만, 에단의 육중한 몸은 티가 날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몸까지 저질인 건 아니군.’
에단의 몸 자체가 허약한 체질은 아니었다.
그간 훌륭한 몸을 썩히고 있던 것일 뿐, 반사 신경, 동체 시력, 근육의 힘과 탄력 등 그 모든 것이 보통을 넘어서 있었다.
게다가 몸을 만들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것을 감안한다면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다.
네이드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연무장에서 육수를 흘려 대자 의심을 완전히 거뒀다.
‘가주님께 말씀드려야겠군.’
가문의 망나니가 달라졌다고.
네이드의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 말이 사실인가?”
블란테 가문의 가주 빈센트 블란테가 되물었다.
평소 평정심을 잃지 않기로 유명한 철혈에 기사였다.
그런 그가 당혹해할 정도로 쉽사리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었다.
“네, 확실합니다. 에단 님은 달라졌습니다.”
“허허…….”
빈센트가 말끝을 흐렸다.
에단이 달라졌다니…….
그간 에단이 가문의 망나니로서 얼마나 속을 썩여 왔는가.
검의 재능은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그 오만하고 포악한 성정을 죽이기 위해 엄하게 대했던 것인데, 에단은 더욱더 엇나갔다.
최근에는 그 정도가 심해 영지민들의 불만이 속출하자 에단에게 근신을 명령했다.
고작 그 정도 처벌로 에단이 바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의 처벌은 그동안에도 숱하게 내렸으니.
하지만 네이드는 에단이 바뀌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네이드는 빈센트가 가장 신용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내가 그 말을 믿어도 되겠지?”
“의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이드가 작게 미소 지으며 자신하자 빈센트는 의심을 거뒀다.
“그래도 내가 직접 봐야겠군. 에단을 불러와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실망시키지 않으면 좋겠군.”
빈센트가 가라앉은 눈으로 네이드를 응시했다.
네이드는 빈센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봤다.
“실망하시지 않을 겁니다.”
네이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방을 나선 네이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놀랐으니 말이죠.’
* * *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복잡하군.”
천장을 바라보던 에단이 중얼거렸다.
성장하고 있었다.
조급한 마음 따위는 사치였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조급함이 조금씩 쌓여 갔다.
아니, 생각해 보면 조급함과는 조금 달랐다.
‘설레는 건가?’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을 때도 느끼지 못한 설렘이 느껴졌다.
‘네이드도 그렇고.’
잃어버린 투쟁심을 일으키는 사람들이었다.
지금 당장 싸운다고 한들 승리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래 몸이라고 해도 못 이기겠지.’
애초에 근간이 달랐다.
류태신이 아무리 극한까지 단련한 챔피언이라고 한들 인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소설 속이었다.
그것도 판타지 세계.
이곳에서는 ‘평범함’을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에 에단은 지금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에단의 대답과 함께 주름진 미소를 짓고 있는 네이드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빈손이네?”
“식사보다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할 말?”
“궁금한 점이 생겨서 말이죠.”
“뭐가 궁금한데.”
“언제부터인가, 아니, 별채로 근신 처분을 받은 날부터 도련님이 바뀐 것 같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말이죠. 혹시 그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네이드의 질문에 에단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어찌 보면 예민한 질문이기도 했고.
지금 에단의 몸에는 에단과는 전혀 다른 ‘류태신’이라는 인물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잠시 고민하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잖아.”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 노인에게 거짓으로 말하면 순식간에 간파당할 것만 같았다.
네이드의 연륜은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었다.
에단의 대답에 네이드의 주름진 눈가가 조금 커졌다.
“……그렇군요.”
“그래서 묻고 싶은 건 그것뿐이야?”
“그럴 리가요.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저는 그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가주, 아니, 아버지가?”
당황스러웠다.
벌써 나를 찾는다고?
이건 예상이랑 다른데.
* * *
다음 날, 해가 뜨자 에단은 채비를 갖췄다. 평소 운동할 때 입던 복장이 아닌,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정복을 입었다.
“어라? 이럴 리가 없는데? 죄송합니다…….”
에단에게 옷을 맞춰 주던 시종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에단에게 맞춘 의복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즈가 조금 남는 정도가 아니었다. 헐렁해서 흘러내리는 수준이었다.
시종이 당황해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살이 많이 빠지시긴 했군요.”
네이드가 감탄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빠져야지. 그렇게 난리를 쳐 댔는데.’
하루 종일 뛰는 것 외에는 한 기억이 없었다.
그렇게 뛰어 댔는데 몸이 그대로라면 억울했다.
시종이 허겁지겁 뛰어다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에단이 입을 만한 복장을 준비해 왔다.
‘아직 갈 길이 멀어.’
에단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처음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빠지기는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여기서 안주할 생각은 없었다.
‘두 달도 필요 없을지도.’
컨디션이 올라오는 것을 보아, 운동 강도를 더 올린다면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체지방을 모두 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급격하게 체지방을 줄이면 몸에 가해지는 타격이 적지 않았지만, 이 몸뚱이는 그런 사소한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튼튼했다.
에단이 느끼기에는 축복받은 몸이었다.
그런 만큼 에단은 쉬지 않고 이 말랑한 몸뚱이를 사정없이 굴릴 생각이었다.
‘귀찮게.’
그런데 대뜸 가주가 에단을 불렀다.
하루하루가 부족한 에단으로서는 이렇게 허비하는 시간이 미치도록 아까웠다.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여기서는 한번 굽혀야만 했다.
그간 벌여 놓은 일도 있었고.
‘앞으로 벌일 일도 있으니까.’
아직까진 블란테라는 이름이 가지는 가호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