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소설 속 망나니 (1)
근신 처벌을 받은 에단은 별채로 돌아왔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처우였다. 그간 저지른 패악과 사건들이 있으니 이 정도 처벌쯤은 달게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호화롭네.’
근신을 위해 마련된 별채였지만, 시설은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확실히 대륙 제일의 검술 가문이라 그런지 형벌 목적으로 건축된 건물도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사치스러운 물품들은 없었지만, 에단과 몇몇 시종들이 지내기에는 과분하다 못해 넘쳤다.
‘오히려 다행이지.’
에단은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기서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 아니었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최악을 피하고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야만 했다.
‘초반에 객사할 수는 없지.’
그따위 엑스트라가 되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에단이 비중 하나 없는 악역이라면, 이제부터는 그 비중을 키울 생각이었다.
‘먼저 몸부터 만들어야겠군.’
에단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살이 많다 한들 이건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조금 있으면 걸어 다니는 게 아니라 굴러다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계획을 실행하기 앞서 몸부터 탈바꿈시켜야 했다.
에단은 거울 앞에 섰다.
정확한 체중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유추할 수는 있었다.
“키는 170 중반에 체중은 150킬로 정도인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랜 기간의 선수 생활 덕에 감량이라면 이골이 나 있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지금 몸으로는 뭘 할 수 있는 게 없지.’
아무리 에단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한들, 그건 최소한의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지금처럼 평판도 바닥을 치고, 몸 상태도 엉망인 상태라면 가지고 있는 정보들도 쓸데가 없었다.
“어이, 거기.”
에단이 시종 하나를 불렀다.
평소의 류태신이라면 다짜고짜 반말을 하진 않았을 테지만,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 섞여서인지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 너 말이야.”
순간, 시종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를 부르신 건가요?”
벌벌 떨면서 다가오는 눈치를 보아하니 겁에 질린 게 분명했다.
‘……지랄 났군.’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밥 먹듯이 패악질을 저질렀으면 반응이 이따위란 말인가.
에단이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여기 연무장이 어디지?”
“여, 연무장 말씀이신가요?”
“그래. 연무장 말이다.”
시종이 불안한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순간 시종이 갑자기 넙죽거렸다. 에단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왜?”
“제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부디 그것만은…… 흑흑.”
“아니, 그러니까 왜 그러는 거냐고.”
에단의 물음에 시종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연무장에서 저를 벌하려던 거 아닌가요?”
“……내가 왜?”
“그냥 제가 마음에 안 드셔서…….”
“……혹시 내가 평소에도 툭하면 두들겨 패고 그랬나?”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던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어.”
에단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계획대로 진행하기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 *
“갑자기 체력 단련을 하신다는 말씀이신가요?”
네이드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묻자,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군.’
무언가 바뀌었다.
평소의 에단이었다면 훈련은커녕 대낮부터 술과 여자를 탐했을 것이다.
‘단순한 변덕인가?’
타당한 의심이었다.
한순간에 바뀌었다고 믿기에는 그간 에단이 저지른 만행이 만만찮다 보니, 변덕으로 치부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그때 그 기술…….’
네이드는 난장판이 된 주점에서 에단이 펼친 기술을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겪은 기술이었다.
어지간한 무술과 박투술은 모두 꿰고 있다고 자부했건만, 접근해 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기술은 처음 겪었다.
‘한 번쯤은 믿어 봐도 괜찮겠지.’
애초에 큰 걸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네이드에게는 연무장 사용을 금할 권한이 없었다.
검술 가문의 자제가 몸을 단련한다는 것만큼 아귀가 맞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본채로 갈 생각은 안 하시는 것을 추천 드립니다.”
네이드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지만, 에단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따위 걱정은 하지 말고. 당분간 여기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이 저택 내에서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면 굳이 이 밖으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에단은 지금 이 보기 힘든 몸을 탈바꿈시킬 생각이었다.
‘파이트 캠프랑 비슷하군.’
시합 전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기 위한 파이트 캠프.
생각해 보니 거기와도 크게 다를 바 없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이런 폐쇄적인 환경은 익숙했다.
처한 상황이 기구해 웃음이 흘러나왔다. 에단이 발을 내디뎠다.
시작은 천천히. 근육이 놀라지 않게끔 예열을 시켜야 했다.
땀이 흐르며 몸이 어느 정도 풀리자 속도를 조금씩 올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올라가던 속도는 어느덧 조깅 수준이 되었다.
‘제기랄. 진짜 생각 이상이군.’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예상 못 했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것도 매우 여유로운 속도였다.
조깅을 한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수준.
선수 시절의 류태신이라면 이 정도 달리기쯤은 온종일을 해도 거뜬했다.
하지만 이 빌어먹을 몸은 달리기 시작하자마자 몸에서 적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관절이 삐걱거리며 아우성을 치고, 근육은 연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육중한 몸은 한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요란하게 출렁였다.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바닥에 드러눕고 싶었다. 하지만 에단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제 고작 시작일 뿐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한다.
체계적인 훈련? 컨디션 향상?
선수 시절 경험에서 비롯한 수많은 운동 프로그램?
그딴 것들은 지금 사치였다.
일단 이 무수한 지방을 걷어 내야만 한다.
당장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는데 무슨 훈련과 운동을 한단 말인가.
허억, 허억.
에단이 숨을 헐떡이며 달리기 시작하자, 네이드가 묘한 눈으로 에단을 바라봤다.
‘정말 운동을 시작할 줄이야.’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에단은 정말로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참하고 처절하게 뛰고 있는 것에 불과했지만, 애초에 그는 당장 걷는 것조차 싫어하던 사람이었다.
개인 시종과 마차가 없으면 근방에도 나가지 않는 것이 바로 에단이었다.
그런 그가 달리기라니.
네이드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럼 오늘 저녁을 준비해 볼까.’
본래 식사를 담당하는 주방장이 있었지만, 네이드는 오랜만에 직접 주방에 들어설 생각이었다.
에단의 노력이 묘하게 갸륵했다.
* * *
네 시간.
장장 네 시간이었다.
에단이 쉬지 않고 달린 시간이다.
단련하지 않은 일반 성인 남성도 한 시간을 뛰면 호흡이 버거워진다.
그런데 운동이라곤 해 본 적도 없는 에단이 네 시간을 쉬지 않고 내리 달렸다.
150킬로의 육중한 몸을 이끌고, 의지력 하나만으로 말이다.
연무장은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에단이 입고 있는 옷도 땀을 비롯한 다양한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연무장에 엎어진 에단의 몸이 숨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허억, 허억.”
머리가 어질거리고 당장 게워 낼 것처럼 속이 울렁였다.
고통스러웠다.
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호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은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앓는 소리를 하지 않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여기서 조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면 과호흡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에단은 고통을 억눌렀다.
어차피 사람은 이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이따위 고통은 감내할 수 있었다.
에단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몸을 일으켰다. 땀에 젖은 바닥이 미끄러웠다.
‘생각보다 괜찮아.’
에단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분명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지만, 나중에 갈수록 생각보다 할 만하다고 느껴졌다.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몸은 빠르게 적응했다.
‘낙오자라 한들 검술 가문의 핏줄이라 이건가.’
웃음이 나왔다.
이런 재능을 썩히고 이따위 몸을 만들어 놓다니.
그 또한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 몸을 이대로 놔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비록 지금 에단이 비루한 몸을 가지고 있으며, 평판과 인식도 바닥을 친다 한들 그 사실에 절망 따위는 하지 않았다.
결국 치고 올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가지고 있는 게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에단은 미래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원작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알고 있었다.
‘적어도 개죽음을 당할 수는 없지.’
원작에서 블란테라는 검술 가문은 멸망한다.
* * *
에단이 비틀거리며 복도를 거닐었다. 물먹은 수건처럼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알고 있었다. 이 또한 경이적인 컨디션이었다.
첫 운동으로 네 시간을 달린 대가치고는 매우 싸게 먹혔다.
고작 이 정도로 앓는 소리를 낼 생각은 없었다. 에단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때 에단의 앞에 하녀 하나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자신 앞에 겁먹은 채 쭈뼛거리는 하녀를 바라봤다.
에단을 보며 잔뜩 겁먹은 하녀는 기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욕 시중을 들러 왔습니다.”
“……허.”
하녀의 대답에 기가 찬 에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다음부터 목욕 시중 같은 건 안 와도 돼.”
“……정말인가요?”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하지 마.”
에단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섞이자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봐. 아, 잠깐.”
쭈뼛거리며 멀어지는 하녀를 에단이 불러 세웠다.
하녀의 표정이 순간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기색이었다.
“……목욕탕은 어디에 있지?”
별채는 상당히 넓었다.
* * *
에단이 욕탕 앞에서 옷을 벗었다.
뒤룩뒤룩 찐 살 탓에 옷을 벗는 단순한 행위도 쉽지 않았다.
땀에 푹 젖은 옷이 찰거머리처럼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옷 꼬라지가 가관이네.’
몸은 이따위인 주제에 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이걸 보고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하는 건가?
에단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 옷을 집어던졌다.
‘앞으로는 편한 옷을 달라고 해야겠군.’
지금부터 에단이 할 일은 훈련밖에 없었다.
화려한 장식 따위는 움직임에 있어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옷을 모두 벗은 에단은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하얗다.
처음 느낀 감상이었다.
하얀 몸에 지방이 푸짐하게 붙어 있었다.
“…….”
에단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선수 시절 자신의 몸이 그리워졌다.
그 시절 류태신의 몸은 동물처럼 질겼으며, 강인했고, 탄력적이었다.
지금 에단의 토실토실한 몸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가지 괜찮은 점은…… 있군.”
에단이 욕탕 앞에 설치된 거울에 다가섰다.
푸짐하게 붙어 있는 살들이 흔들렸는데,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웠지만, 객관적인 분석은 필요했다.
거울 앞에 선 에단은 찬찬히 몸을 둘러봤다.
리치와 골격, 그리고 체형.
워낙 지방이 많아 확실하게 분석하긴 어려웠으나, 대충 봐도 몸이 상당히 훌륭하다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류태신도 동양인치고는 우월한 신체 조건을 가진 편이었다. 하지만 에단에 비하자면 손색이 있을 정도였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비만인 상태로도 이 정도라니…….’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다.
“몸이나 담가야지.”
에단은 자신의 몸을 감추려는 듯 데워진 욕탕 안에 하얗고 무거운 몸을 들이밀었다.
에단이 몸을 밀어 넣자, 차 있던 물이 해일처럼 넘쳤다.
“……제기랄.”
기분이 더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