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97화 (에필로그 1) (97/98)

에필로그1

북두 백화점 부산점은 리뉴얼 이후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기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에 포함되었다.

12월 15일부터 다음 해 1월 14일까지, 크리스마스 전후로 한 달간 진행되는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는 서울 본점과 압구정점을 제외하고 지방 지점이 포함된 게 처음이라는 점과 그 맞은편에 한동안 영업을 중지했던 파라스 호텔이 재개장한 점이 맞물려, 그 주목도가 상당했다.

“백 작가님, 압구정점도 운영 시작했대요. 안 대리가 동영상 보내왔는데 같이 보시겠어요?”

호연은 올해로 두 번째 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작년에 콜라보했던 후아드X북두 백화점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는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한 파급력을 가져왔다.

그 파격적인 컨셉에 임원진들이야 난색을 표했다지만, 당시 북두 리테일의 기세정 전무가 강하게 추진했던 것으로 알려져 또 한 번 그의 결단력 있는 모습이 세간에 증명되었다.

그리고 호연이 담당하는 두 번째 미디어파사드 프로젝트.

서울 본점은 6시, 압구정점은 7시, 부산점은 8시에 순차적으로 운영을 시작하여 하나의 유기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셰익스피어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레퍼런스를 가져온 이번 미디어파사드 ‘로미오의 초대’는 서울 본점이 무도회의 풍경, 압구정점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던 순간, 부산점이 그들의 비극적인 장면을 담았다.

부산점이 가히 가장 아름답고 화려할 것이라는 예고가 떴고, 이에 미디어파사드 하나를 보려고 온 방문객들로 백화점 앞이 빼곡할 정도였다.

수연은 안 대리가 보내준 동영상을 재생했다. 기대감으로 물든 호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압구정점도 너무 예쁘다, 그쵸. 가서 보고 싶어요.”

“작가님 원하시는 대로 구현할 수 있어서 정말 좋네요. 여기, 전 이 부분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북두 백화점 압구정점의 외벽 전체가 여백 없이 그들의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노란 불빛이 달이 되고 붉은 불빛들이 두 사람의 사랑이 되어 폭죽처럼 팡팡, 불을 밝혔다.

[와아―]

동영상을 찍는 VMD 팀의 안 대리까지도 탄성을 내지르는 게 들렸다. 이에 호연과 수연은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다시 동영상을 내려다볼 때 기사 알림이 떴다.

[북두 전자 기세정 부사장, 민경당 당 대표……]

까지 보였으나 뒤 내용은,

[이세찬 뇌물 혐의 북두 그룹 前 총괄 회장 기한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

일 테다.

호연도 아침나절 수도 없이 읽었던 기사였다.

“아…….”

수연의 탄식과 함께 어색한 정적이 머물렀다.

세정이 잘못한 일로 출석한 것은 아니지만, 시아버지인 기한규가 회장 직함을 내려놓게 된 커다란 사건이었다. 수연은 자연스레 호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요.”

호연은 손가락으로 화면을 그어 알림을 밀어버렸다. 그러곤 다시 재생되는 동영상을 황홀한 듯 바라보았다.

“……작가님, 내년에도 저희랑 같이 해주셔야 해요, 아시죠? 부담드리는 거 맞아요.”

이미 동영상에 빠져 정신이 없는 호연의 손을 수연이 움켜잡았다.

그 손가락에는 이제 결혼반지가 없었다.

* * *

세정은 차창 밖으로 북두 백화점 부산점 앞에 몰린 인파를 내다보았다.

북두 리테일에서 북두 전자로 보직을 이동한 지 일 년이 좀 안 되었다.

북두 전자는 북두 그룹의 핵심을 담당하는 계열사이니만큼, 리테일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업무가 과중하고 그 중요도 자체도 남달랐다.

그래도 호연의 전시회나 작품 활동은 부러 일정을 조절해서 보는 편이었는데,

“잘했네요.”

이번 미디어파사드는 새삼스럽게 훌륭했다.

레몬색의 불빛 대신 유독 붉고 푸른 색감이 많이 사용된 부산점이었다.

세정은 톡톡, 턱선을 따라 손가락을 굴리며 호연의 지난 1년의 행적을 눈앞에 그렸다.

빛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한계 앞에 얼마나 절망하고 얼마나 초조해했던가.

눈앞으로 줄리엣이 본인에게 칼을 꽂았다. 동시에 북두 백화점의 외벽으로 푸른색의 꽃이 휘날렸다.

한겨울에 날리는 푸른색 꽃.

몰린 인파에서 달뜬 함성이 차창을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줄리엣이 칼을 꽂는 장면에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도록 호연이 궁리를 많이 했었다.

“완벽한데.”

부디 의외로 완벽주의자인 호연도 만족할 만한 결과물이길.

“사모님께 지금쯤 연락드리면 될까요?”

부산에 내려오면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아니요. 예고 없이 눈앞에 나타나 보고 싶네.”

세정은 싱겁게 웃으며 기사에게 신호가 바뀌었음을 알렸다.

부드럽게 주행하는 차 속에서 세정은 핸드폰을 들어 호연의 SNS를 엿보았다.

[북두 백화점 부산 본점]

간략한 문장과 함께 제 작업물을 올리는 호연의 SNS에는 벌써 부산 본점을 찍은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같은 곳에서 같은 풍경을 보고 있나.

그를 생각하니, 미디어파사드 속 줄리엣처럼 심장이 찔린 듯 따끔했다.

“그냥 여기서 내려주시죠.”

나는 나만의 줄리엣을 보러 가야지.

* * *

몰린 인파 사이에서 미디어파사드를 바라보는 경험은 짜릿했다.

호연은 한 번의 상영이 끝났음을 알리는 레몬색의 물결을 보다가 인파를 빠져나왔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 있어 잠시 잊었는데, 겨울은 겨울이었다.

호연은 콧날을 벨 것 같은 겨울바람에 목도리를 조금 더 끌어 올리며 진동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쏟아진 알림 속에 또렷하게 보이는 건 이것 하나뿐이었다.

[KI_SE_JEONG님이 회원님의 게시글을 좋아합니다.]

벌써 하트를 누른 세정이 여전히 얼떨떨했다.

기세정이 SNS라니…….

어떤 날, 호연은 뒤에서 안아오는 커다란 품을 느끼면서도 돌아보지 않았다. SNS 계정에 작업물을 올리는 데 열중했다.

이내 세정이 어깨에 턱을 괴고 무엇을 하냐 묻기에 알려줬더니 그는 제 것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 결과가 팔로우 1의 이 계정이었다. 북두와 관련된 SNS 계정은 팔로우하지 않고 오로지 호연만.

좋아요, 만 누르고 메시지가 없다는 건 아직 부산에 도착한 건 아닌 건가.

“진짜 안 어울려.”

호연은 새삼스럽게 중얼거리며 세정의 후속 기사들을 확인했다.

[북두 전자 기세정 부사장 기자 질문에 추가 답변 없이 귀가]

[북두 전자 기세정 부사장의 차 정보는?]

[북두 전자 기세정 부사장 증인룩]

……별다른 건 없구나.

지난 일 년 반 남짓의 시간 동안 세정은 혹독하리만치 잔인했다.

제 손으로 부친인 한규를 끌어내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소라의 의문사를 은폐했다는 것으로 부족해 민경당의 떠오르는 대선주자인 당 대표, 이세찬에게 뇌물을 준 혐의까지. 그 밖에 자잘하지만, 한규를 무너트리는 데 효과적인 비리들이 줄을 이었다.

이에 한규는 회장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고, 그 자리에는 북두 리테일, 오희준 사장이 임시직으로 앉아 있었다.

또한 지청재는 어떠한가.

한규가 사혼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어 거칠게 분노한 지청재의 부친이자 SQ 텔레콤의 회장, 지영민은 청재의 범죄 이력이 까발려지자 돌연 침묵하고 선을 그었다.

오랜 약혼녀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청재의 과거는 소라의 녹취록이 퍼져서 국민의 공분을 샀고 뒤이어 터지는 계양 실업, 에트 주식회사 대금 횡령, 리벤지 포르노 유포 및 데이트 폭력, 마약, 도심의 카레이싱 등의 사건으로 바닥없이 몰락했다.

지금도 계속 추가 기소가 접수되고 있으니 아직 재판조차 끝나지 않았고 그 최종 형량 또한 무시하기 어려울 터였다.

수십 년에 걸친 형이 끝나더라도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긴 어렵겠지. 살아가서도 안 되는 일이고.

호연은 법원 출석 당시 찍힌 세정의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뉴욕 출장으로 보름간 보지 못했던 남자였다.

귀국과 동시에 쉬지도 못하고 법원에 출석하여 증언했을 그 까칠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누가 봐도 흠 하나 없는, 놀랍도록 단정한 모습이건만, 호연에게는 그 미약한 흐트러짐이 보였다.

불출석해도 되는 일을 굳이 일정까지 조절하여 참석한 데에는, 한규를 확실히 짓밟아 주겠다는 의지와 북두 그룹과 그를 분리하겠다는 고집이 느껴졌다.

세간에서는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기업인이라고 꼬집지만, 호연은 그의 본모습을 알았다.

다정한 사람.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는 천성이 다정했다.

“백호연 씨.”

조금 더 골똘하게 사진을 바라보던 호연은 문득, 저를 부르는 음성에 반사적으로 눈을 들었다.

심장이 뻐근하게 뛰었다. 동시에 느린 자각이 왔다.

“언제 왔어요?”

“방금.”

호연의 입가로 웃음이 가득 피어올랐다. 그 얼굴을 따라 피식, 웃는 세정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봤어요? 미디어파사드.”

제 코트를 벗어 덮어주는 세정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봤지.”

“어때요?”

세정은 애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기대하는 호연을 보다가 입술을 가린 목도리에 손가락을 걸어 내렸다. 그러곤 짧게 입을 맞추었다.

“내년에는 백호연 작가 모시기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

이토록 사람이 많은 데서 입을 맞추는데, 세정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었다. 괜히 호연만 다시 목도리를 끌어 올려 입술을 가리고 동공을 도륵, 굴렸다.

“다른 데서 백호연 작가 채가기 전에 고용인 대 피고용인으로 얘기 좀 할까.”

겨울바람에 호연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제가 계약서상 ‘갑’이죠?”

세정은 습관적으로 호연의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며 웃었다.

“당연하지.”

겨울바람을 달고 온 세정의 어깨 위로 눈이 떨어졌다.

“눈 오나 봐요.”

호연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정은 호연의 뺨으로 떨어지는 눈을 보았다.

어지럽게 죽죽, 시야를 긋는 눈발 아래, 두 사람이 웃으며 섰다.

올해 부산에 내리는 첫눈이었다.

* * *

북두 백화점 부산 본점의 미디어파사드가 선연하게 보이는 파라스 호텔의 로열층 스위트룸이었다.

연말을 맞이해 빼곡한 예약 일정 중 기세정을 위해 늘 비어 있는 공간.

“하아…….”

창밖은 겨울이나 이곳은 여름이었다.

더운 습기가 가득 찬 공간에 반해 창에는 성에꽃이 피어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렸다.

아니……. 눈이 머는 중일 수도. 세상이 눈으로 덮인 것일 수도.

수억을 들인 수천 개의 LED 조명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어두운 룸을 밝히는 조명 따위로 희생당하고 있었다.

호연은 허리를 들어 올렸다. 배를 간질이던 세정의 머리칼이 그보다 더 아래쪽으로 홧홧한 숨결을 퍼부으며 미끄러졌다.

“하으으…….”

도통 적응이 되질 않는 선득함이었다. 호연은 세정의 손에 의해 붙잡히고 벌어진 허벅지를 파드득 떨었다. 신음인지 침음인지 구분되지 않은 깊은숨을 흘렸다.

“계약서……. 흐윽, 으……! 얘기이…….”

순진하게 그런 걸 믿었냐는 듯 세정은 입술 끝으로 음핵을 물었다. 호연은 숨이 턱, 막혔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에 발끝을 말았다.

세정이 호연을 꾀어다가 침대에 눕히는 건 늘 이런 식이었다. 바쁜 일에 치인 호연이 제게 시간을 내어주지 않자, 한 번 두 번 다른 이야기를 미끼 삼아 그녀를 침대로 불렀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질구를 파고드는 뾰족한 혀끝이 느껴졌다. 호연은 세정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상체를 세웠다.

달아날까, 세정의 팔뚝이 호연의 허벅지를 감아쥐어 포박했다. 졸지에 콧대가 아래로 완전히 맞물려 음핵이 눌렸다. 온몸을 송두리째 쥐어짜는 쾌감에 호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하흐……. 읏…….”

질금질금, 무언가 새어 나오는 기묘한 불쾌감 속에 연한 살을 가르는 혀가 있었다. 배가 조여들었다.

아래 사정도 다르지 않은지, 세정은 그 모든 게 본인이 자행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혀까지 조여.”

중얼거리며 호연의 예민한 아래를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