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청재는 내려오는 경호원들을 다소 얼떨떨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
왜지?
급하게 왼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제가 돈을 들여 포섭했던 경호 업체에 철수를 요청했던 시간은 지금이 아니었다. 술에서 조금 깨고……. 적당하게 계산했던 시간보다 세 시간쯤 앞서 있었다. 분명 모두가 저택을 떠나가고, 잠들고, 조용하리라 예측한 시간을 전달했는데.
술에 취해 흐물거리는 정신이 잠시간 너무나도 원했던 환영을 보여주는 것 같아 청재는 두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어머, 다들 어디 가세요?”
송 여사가 경호원들을 붙잡아 이유를 묻는 데서 청재는 이게 현실이구나, 했다.
“오늘은 한 시간 일찍 교대입니다.”
곧 교대 인력이 온다는 이야기가 송 여사의 어깨 너머로 들려왔다.
그건 제가 핑곗거리로 골라주었던 멘트였다.
아니잖아!
청재는 속에서 밀려 나오는 뜨거운 숨을 뱉어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경호원들의 뒷모습을 좇았다. 붙잡아 묻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라, 세 시간 뒤라고. 당신들 시간 잘못 전달받은 거 아니냐고.
“교대 인력이 오기도 전에 가네? 음, 이런 날도 있네?”
청재는 벌떡, 일어나려다 어정쩡한 자세로 멈추었다. 눈썹을 들어 올리며 혼잣말하는 송 여사를 두고는 그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괜한 의심만 살 테다.
그럼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던 청재는 제가 포섭했던 경호 업체의 관리자에게 메시지를 넣었다.
[ㄴㅐ가 세 시가ㄴ 두ㅣ라고 마ㄹ 했잔나요.]
답장은 곧장 돌아왔다.
[그랬나요? 착각했네요. 죄송합니다!]
문장 끝에 찍힌 느낌표를 멍하니 보던 청재는 끓어오르는 욕설을 억눌렀다.
씨발, 착각할 게 따로 있지.
“…….”
청재는 최대한 차분하게 생각을 환기했다.
어차피 11시나 8시나 제게 주어진 건 단 한 시간뿐이다.
청재는 저릿한 관자놀이를 검지와 중지로 꾹꾹, 누르다가 간신히 둔중한 몸을 일으켰다. 너무 많이 마셨나, 눈앞이 빙글 돌아 휘청이자 송 여사가 급히 청재를 부축해 주었다.
“괜찮으셔? 조금 쉬는 게 어때요? 숙취 해소제라도 준비해 줄까요?”
“아니…… 아니요.”
청재는 흩어지는 욕지거리를 삼키며 붙잡히지 않은 손을 내저었다.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뱉는 짧은 찰나가 아주 힘겹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기 전무님은 어디 가셨는지…….”
“기 전무님? 가셨죠. 주무셔도 유성채에서 주무시는 분이니까, 본채는 오래 안 머무시지.”
“아……. 저는 토할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인 건 취한 덕에 의심을 사지 않고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
“그래요, 그래. 우리도 이렇게 놀고 있으면 안 되지.”
송 여사는 청재를 부축했던 손을 빠르게 떼어내며 둘러앉아 있던 사용인들에게도 눈짓했다.
“하아…….”
휘청이는 통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린 청재가 세 개의 잠금을 떠올렸다. 경호원, 열쇠 잠금, 도어 록. 경호원은 갔고……. 손가락 세 개를 꼽아보던 청재는 한 시간은 너무 짧은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열쇠가 있을 만한 곳은 이곳뿐이라, 비틀비틀 걸어 한규의 침실 앞에 섰다. 홱, 괜히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소음을 내지 않도록 각별하게 주의하며 문을 열었다.
침실에는 이불도 덮지 않은 한규가 침대에 대자로 채 누워 있었다.
청재는 자꾸 두 개로 보이는 사물에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잡으려고 노력했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밑이 훅훅, 꺼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호흡을 다스리며 걸으니 어느덧 한규가 내려다보였다.
드문드문 기억이 잘려 나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신경이 곤두서서 잠을 제대로 못 자 더 그랬다.
세 시간이면 술이 깨고도 남았을 텐데…… 두통이 일어 눈 사이를 좁히자,
……한규의 벨트 위로 열쇠가 보였다.
이런 행운이 온다고?
이런 행운이…… 나에게……?
죽으라는 법은 없나 보다.
술이 홀딱 깨는 기분이었다.
기듯이 무릎걸음으로 걸어 한규의 벨트에 가까워진 청재가 손을 뻗었다. 한규가 깨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두 눈에 긴장이 도사렸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돌려 빼자, 한규가 뒤척였다.
청재는 아주 천천히 상체를 낮추어 침대 아래로 몸을 옹송그렸다. 그러곤 손에 들린 열쇠를 꿈인 양 들여다보았다.
말도 안 돼…….
청재가 소리 없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침실을 빠져나온 청재는 주머니에 열쇠를 넣고 손가락 끝으로 계속 만져보았다.
쥐 새끼처럼 몸을 작게 구기며 혹여나 사용인들이 저를 보진 않을까, 숨을 죽이며 2층으로 올라왔다. 손에 땀방울이 배어 나와 열쇠를 쥔 손의 모양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너무 감격스러우면 얼굴이 일그러진다는 걸 느꼈다.
청재는 그제야 모든 일에 감사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언젠가 기소라 옆에서 흘려들었던 성경 구절도 떠올랐다.
계양 실업 건은 바지사장, 오민규에게 덮어씌우면 될 일이다. 자신도 선량한 피해자라고.
에트 주식회사 건은 이 사실을 묵인하고 함께 진행했던 성주영 이사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저는 부하 직원이라 협박당했던 거라고.
또 뭐가 있을까……. 아, 기소라의 유골. 이건 솔직히…… 기한규 회장의 기행이 질타받을 짓 아닌가? 누가 죽은 딸의 영혼이랑 산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해? 오히려 제게 동정 여론이 생길 것이다.
좋다. 좋아. 다 좋다!
비록 한규가 이제 저를 버리겠지만, 괜찮다. 사내새끼가 살다 보면 한 번 실수할 수도 있고, 아버지에게 빌고 또 애걸하면 저를 낳고 죽은 아내 생각에 마음이 약해져 거두어주실 것이다.
오히려 화도 내주실지 모른다. 하나뿐인 아들놈이 영혼이랑 결혼할 뻔했다고 하면, 얼마나 화가 나실까? 응, 그렇지. 그런 거지.
“후…….”
합리화를 마친 청재는 고개를 들어 숨을 크게 내뱉었다. 취기로 얼룩진 숨이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내 흥건한 침을 삼키고 부릅뜨는 두 눈이 벌겠다.
복잡하게 뒤엉켜 며칠을 근심하게 한 일들이 이토록 쉽게 풀린다. 이렇게나 간단한 거였다. 역시 제 인생에서 기소라만 빠지면 이다지도 아름답다.
개같은 년.
“개같은 년…….”
2층의 기다란 복도를 지나온 청재는 소라의 방문을 마주했다. 여기까지 오르는 데 몇 년이 걸렸나, 몇 년이……. 감회가 새로워 청재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이 우는 것처럼 뒤바뀌었으나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아직 울어서는 안 된다. 아직이다.
청재는 가늘게 호흡하며 열쇠를 들었다. 천천히 구멍으로 열쇠를 비집어 넣었다. 맞아야 하는데…….
맞는다!
청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천천히 돌리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미친…….”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렸다. 청재는 벅찬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벌벌 떨었다.
다음은 도어 록인데…….
도어 록은 소라가 죽기 전 달아둔 거였다. 마치 오늘 같은 상황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멋대로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제가 꼭 본인 죽고도 그럴 것 같아 겁이 난 것처럼.
청재는 도어 록의 넘버 패드를 노려보았다.
비밀번호? 모른다.
다만 유추되는 번호는 하나라서.
청재는 툭툭, 손가락 끝으로 번호를 찍었다.
억지로, 강제로 팔로우 승인을 받은 소라의 비공개 SNS에 딸랑 하나 올라와 있는 게시글,
[우리의 5주년 기념사진]
그러니까 소라가 제 애인과 연애를 시작하던 날.
청재가 소라의 죽음 전후로 매일같이 들여다보던 SNS 게시 글의 날짜로부터 5년 전.
누구 놀리나, 좆같아했었는데…….
“씨발…….”
그게 비밀번호였다.
모든 잠금이 일시에 해제되었다.
“……마지막까지 진짜 좆같네, 기소라.”
청재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몇백 번도 더 드나들었던 방의 문을 여는데,
“허억…….”
허억, 청재가 숨을 크게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소라의 방으로부터 가깝지만은 않은, 소희의 화실에 있던 세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천천히 청재의 뒤를 따랐다.
청재는 멍청하게 문 앞에 서 있었다.
세정은 그 등허리를 발로 까 안쪽으로 처박으며 문을 닫았다.
“악!”
뼈가 뒤틀리는 강도의 발길질에 청재가 크게 비명을 지르며 엎어졌다. 세정은 그제야 방을 훑어보았다.
세정은 청재가 멍청하게 서 경이로움을 느꼈던 이유를 알아차렸다.
시야를 다 가리는 커다란 사과나무 조형물. 그 뒤로 벽에 달린 예수 십자고상과 또 다른 벽을 가득 채운 최후의 만찬 그림 액자. 그리고 그 아래 기다란 테이블.
눈을 두는 곳마다 보이는 잡다한 게 전부 신앙의 상징이었다.
침실 같지 않은 광경이었다.
소라는 마치 죽음을 예견한 것처럼 방을 작은 교회처럼 조성해 두었다.
소라의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수도 없이 돌렸던 세정의 시뮬레이션이 박살 났다. 기껏해야 서랍이나 책장을 뒤지려던 생각이 처참해졌다.
“씨발……. 너 뭐야.”
청재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려고 책상을 우악스럽게 짚었다. 우르르, 굉음과 함께 성물들이 떨어졌다. 그러곤 사과 장식을 밟았는지 청재가 다시 미끄러졌다.
와중에도 세정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았다.
이 방이 하나의 힌트라는 생각을 한다.
소라가 무슨 말을 했더라.
기소라가 내게 무슨 말을 했더라.
기억나지 않은 머나먼 순간의 묘했던 찰나들을 더듬었다.
그사이 다가온 청재가 휘두르는 주먹을 피하고 복부를 걷어차 바닥에 구르도록 만들었다. 끙끙, 신음을 흘리는 청재는 뼈 어딘가가 부러진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앓았다.
세정이 머리칼을 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슨 말을 했지?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
또렷한 기억 사이에 놓인 흐릿한 기억을 파헤쳤다.
그리고 그 끝에,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그가 지금 나와 함께 먹고 있다.”
서툰 한국어에 맥락도 없던 말을 떠올린다.
세정에게 제 사랑을 고백하기도 전, 보통의 날, 보통의 식사 자리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 자리에도 지청재가 있었다.
“오늘 필사한 구절이에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발씬, 웃던 얼굴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그 구절을 따라 세정의 눈이 테이블을 더듬어 내렸다. 시선이 멈춘 곳은, <유다 이스카리옷>의 자리.
예수를 은화 30냥에 배신한 자.
세정은 빠르게 공간을 헤집었다. 유다의 자리를 손으로 쓸고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리 없는데. 세정은 의자를 빼내어 살폈다. 이곳도 아니. 고개를 꺾어 테이블을 올려다보았다.
테이블 상판 밑부분에 또 다른 열쇠가 붙어 있었다. ‘속초’ 두 글자가 쓰여 있는 열쇠였다.
세정은 훔치듯이 그 열쇠를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뒤에서 청재가 거대한 십자가를 휘둘렀다.
세정이 매끄럽게 피하자, 허공을 가르는 무게를 이기지 못한 청재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야?”
소란을 듣고 올라온 사용인들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세정은 헐떡이는 청재를 두고 문을 열었다. 놀란 사용인들을 두고 내달렸다.
확신했다.
속초 별장에 증거가 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