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서 비서는 왜 갑자기 우리를 돕지.”
조수석에 앉아 일정을 살피던 신원이 백미러로 세정과 눈을 맞추었다.
“저는 전무님 수행 비서니까, 전무님을 돕는 건 당연하죠. 혹, 제가 말뜻을 잘못 이해했나요?”
세정의 말에 숨은 함의는 왜 백호연과 제 사이를 돕느냐는 말이었다.
교은을 보러 가면서 호연이 했던 말이 아직 생생했다.
“서 비서님께서 세정 씨가 한 일들 다 말씀해 주셨어요.”
결국은 무한한 감사로 끝났던 이야기들.
호연에게 알아달라고 한 일도 아니었으며 딱히 생색낼 생각도 없었던 일인데. 그걸 말했다고, 신원이.
세정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신원은 그 뜻을 대강이나마 알아차렸다.
제가 세정의 오피스 와이프라는 생각을 했던가.
세정과 눈만 마주쳐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왜 마음대로 제 행적을 호연에게 유출했냐는 눈이다, 이건.
주제를 넘는다는 말이 곧이라도 나올 것 같아 신원은 작게 웃었다.
“제가 사모님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은 좋은 분이세요.”
세정이 행복하길 빌었다.
세정이 호연의 옆에 있으면 행복해했다.
세정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도 없었다.
뜻 모를 이야기인데도 세정은 우선 눈을 찌푸리며 긍정했다.
“나도 알죠, 그건.”
제일 잘 알지, 내가.
신원은 세정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한다, 싶으면서도 웃음이 꺼지질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운전기사가 북두 저택 앞에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주었다.
“차는 여기 두고 가세요.”
세정은 느긋하게 차에서 내려 재킷을 잠갔다. 따라 내린 신원이 세정의 옷매무새를 살폈다.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었다. 눈길을 두는 곳마다 무심한 갈색빛의 풍경이 시야를 메웠다.
신원은 세정의 머리칼 끝을 넘겨주었다. 비록 시원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머리칼은 정돈하자마자 다시 헝클어졌지만…….
신원은 그만하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히 돌아오세요.”
“그래야죠. 백호연 씨한테 약속한 게 있어서.”
“전에 주겠다고 했던 선물, 오는 길에 들고 올게. 기다려.”
호연이 제게 넥타이핀을 선물하던 날 했던 약속이 있었다.
세정은 넥타이핀과 커프스 링크를 차례로 훑어보았다.
모두 호연이 준 것이었다.
그를 볼 때면 종종 그녀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정은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눈을 들었다.
수년간 함께 준비해온 날의 종지부를 찍을 결전의 날치고는 너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긴장도, 경계도 없는 무른 기류가 흘렀다.
세정은 저택으로 들어가는 대신 주머니에 한 손을 꽂아 넣으며 비스듬한 자세를 취했다.
왜 안 들어가시고.
신원은 세정의 빤한 시선을 느끼며 볼을 문질렀다. 이내 제가 뚫어질 것만 같아 어색하게 웃었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있죠.”
“뭔가요?”
단순한 의문이 떠오른 신원의 얼굴 위로 세정이 말을 던졌다.
“그만 자책하라고.”
“……뭘……?”
“서 비서 잘못도 아니잖아요.”
아, 신원이 입을 작게 벌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에 주제는 내가 넘네. 미안합니다.”
그리 미안한 어투도 아니면서.
세정은 신원의 어깨를 한 번 쥐었다 놓는 행동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 * *
은선이 한규를 떠났다. 평생을 걸어 얻은 것이 휘영 하나뿐인 저택에서 옷 하나 챙기지 않고 나갔다. 새로운 여자가 저처럼 디밀고 들어올까 봐, 아파도 비우지 않던 저택을 떠나버렸다.
기실 내쫓긴 것에 가깝지. 한규에게 이혼하자고 하고 비웃음을 샀댔으니까. 이혼은 무슨 이혼. 혼인 신고를 한 적도 없는데, 하고.
위자료를 달라는 말도 무시당했다고 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꺼지라고 욕을 먹었다지.
그러곤 한규가 떠난 거실에 홀로 남아 세상이 무너진 듯 천둥처럼 울었노라고.
“어쩌라고요.”
세정의 대답에 미주알고주알 제가 보고 들은 이야기를 쫑알대던 송 여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양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지난 반찬을 다 먹었냐고 물어왔다. 세정은 대답을 못 했다.
은선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었다.
소희보다 더 오랜 세월 저택을 지켰던 은선은 딱 그 정도의 화젯거리에 불과했다.
나가면 나가는 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가볍디가벼운 존재.
그러니까 악착같이 매달렸겠지. 그래서 더는 사랑하지도 않는 한규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나 죽어서도 당신을 모실게요, 하며 옆자리에 묻어달라, 애걸했겠지.
“오냐.”
그에 반해 은선을 내쳐 사돈댁을 볼 낯짝이 생긴 한규는 홀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아민의 절을 호쾌하게 받았다. 휘영이 없는데도 매우 흡족해했다.
한규는 휘영이 제 입으로 사생아임을 밝히고 세정이 소라의 의문사를 은폐했다고 폭로하면 은선의 혼주 자리를 보장하겠다,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한규는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상간녀 출신의 여자를 제 옆에 앉힐 마음이 없었다.
보는 눈이 많은데 어떻게 그래.
비록 휘영은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아민과의 신혼여행에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래서 뭐?
유인 그룹이 북두 그룹과 손을 잡는 게 중요했지, 휘영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제 평판이 형편없어지긴 했으나 거짓 폭로로 주춤할 세정과 사생아임을 공공연하게 밝힌 휘영을 동시에 찍어 누를 수 있게 되었다.
유쾌한 일.
세정은 언죽번죽한 한규의 얼굴을 조금 질린다는 듯이 보았다.
지금 저 음험한 마음속에는 새 여자를 데려와 품을 생각뿐이겠지.
병실에서 마주쳤던 여자일 수도, 완전히 새로운 여자일 수도.
한규와 휘영이 손을 잡아 터트린 말도 안 되는 기사는 생각보다 파장이 컸다.
북두 그룹은 언제나 불티나는 화젯거리였으므로.
결혼을 앞두었던 소라의 사고사.
그 몇 년간 쌓인 소문들은 세정을 동생의 재능을 질투한 미친놈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확신을 실어주듯 [북두 그룹 유력 후계자, 기세정 전무의 숨겨진 민낯 충격 파문. 피아니스트 동생, 기소라 씨 의문사 은폐 의혹] 휘영의 폭로까지 있으면…….
일격이지, 뭐.
기사는 수습했지만, 세정이 침묵함으로 질 나쁜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버렸다. 애초에 세정이 해명했대도 믿어줄 여론이 아니었다.
그러자 한술 더 떠 소라의 죽음에 대한 검찰 재조사 검토 기사가 올라왔다가 사실무근이라며 사라졌다.
한규가 낸 기사도 아니었다. 영세한 인터넷 신문사에서 낸 추측성 기사였는데, 지레 겁먹은 한규가 급히 기사를 내렸다.
“맛있게 먹거라, 새아가.”
한규는 다이닝룸에 들어오기까지 아민의 손을 꼭 쥐고 넘치는 애정을 표했다. 호연에게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호칭으로 아민을 불렸다.
아민은 새신부의 수줍음과 어색함으로 볼을 붉히며 네에, 음전한 태도를 보였다.
“술 좀 할 줄 아는가?”
한규는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 중 아민에게만 손수 와인을 따라주었다.
세정은 사용인이 따라준 와인을 마시는 척 테이블의 끝에 앉은 청재를 바라보았다. 눈치를 살피는 데 혈안이 된 청재의 눈이 벌겠다.
“기소라가 가진 증거 싹 다 인멸할 건데?”
호연이 찍은 동영상 속 지청재는 기소라가 가진 증거를 인멸할 거라고 그랬다.
동영상이 아니었어도 세정에게는 청재를 처넣을 만한 증거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각기 다른 범죄의 증거들이었고, 소라의 죽음이 청재와 관련 있다는 증거는 동영상 하나로 부족했다.
그건 그날에 증거를 인멸해 버린 청재도 알 테다. 그러니까 차마 뒤져보지 못한 소라의 방을 노리는 거겠지.
세정은 청재가 접촉한 경호 업체와의 메시지를 떠올렸다.
[지청재 씨가 연락을 주셨습니다.]
소라의 방문 앞을 지키는 경호 업체였다. 한규가 고용했지만 진작 세정이 제 측 인사로 돌려세운.
세정은 테이블에 가려진 한규의 배를 바라보았다. 경호원, 열쇠 잠금, 도어 록으로 삼 중 봉쇄된 소라의 방 잠금 중 열쇠는 한규의 벨트에 묶여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지는 일 년이 조금 넘었다.
“휘영이가 많이 건조하다, 애가. 새아가는 그런 걸 이해를 좀 하고…….”
휘영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하는 한규나 귀담아듣는 척을 하는 아민이나 봐줄 만한 장면은 아니었다.
세정은 한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눈썹 사이를 좁혔다.
호연이 찍은 동영상 말미에는 지청재도 제 말을 누군가 듣고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조심성이 강한 천성으로는 일정을 미룰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청재는 강행했다.
계양 실업 건으로 곧 잡혀 들어갈 수도 있는 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과 한규가 거나하게 취할 기회가 좀처럼 없는 걸 잘 아는 것 같았다.
청재는 소라의 방 앞을 지키는 경호 업체에 무리하게 접촉을 시도했다.
[11시 교대, 경호 한 시간만 비워줄 수 있겠습니까? 대가는 확실하게 지급하겠습니다.]
이 모든 대화가 진작 경호 업체를 제 쪽으로 끌어들인 세정에게 넘어왔다는 게, 문제지만.
“좋은 날이니까 다 같이 한잔하지.”
긴 건배사가 이어졌다. 잔이 맞춰지고 다시 흩어지는 사이, 세정은 또 한 번 와인을 그저 내려두었다.
한 잔, 두 잔……. 독한 술까지 꺼내 와 다시 한 잔, 두 잔…….
불그레한 낯으로 유골의 행방이 이랬느니, 저랬느니 이야기하는 한규의 노여움에 청재가 급히 술을 들이켜는 게 보였다.
그렇게 한규와 곧잘 잔을 맞추던 아민의 고개가 맥없이 꺾일 즈음이었다. 한규가 큽,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잠시간 잠결에 빠졌던 티를 냈다.
“아버지, 들어가서 주무세요.”
세정은 이미 인사불성인 한규를 부축했다. 제가 하겠다며 자청한 청재를 가볍게 물렸다.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한 청재를 두고 세정은 한규의 침실을 향해 긴 복도를 걸었다.
그 풍채 좋던 양반이 두 번 쓰러졌다고 무게가 꽤 가벼워졌다.
늙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제가 너무 커버린 것일 수도 있다.
세정은 그게 우스웠다.
그 두렵던 부친이 이제는 반대로 저를 두려워한다는 게.
저도 이제는 부친에게서 무언가를 지켜낼 수 있다는 게.
……정말 이제는 전부 지킬 수 있을 것 같은데.
세정은 침실 문을 열어 한규를 침대에 눕혔다. 그러곤 한규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를 확인했다.
천천히 계획을 되짚었다.
자신은 열쇠의 위치를 알고,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모른다. 청재는 열쇠의 위치를 모르고, 도어 록의 비밀번호를 알까?
모든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할 수 있는 도박이었다.
청재도, 저도 소라의 방에 증거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걸어보는 도박.
사혼식에서 유골 도난 사건까지, 청재의 집을 뒤질 상황을 만들어 두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짓이기도 했다.
세정은 소라가 청재에게 그저 당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소라의 방 안에 증거가 있을 것이다.
확신은 있으나 그걸로 부족해서 지금까지 기다려왔다. 소라의 방에 아무것도 없으면 의문사를 파헤치는 것만 들키고 그들에게 대비책을 만들 시간이나 주고 말 테니까.
그래서 청재를 앞세웠다. 아무것도 없더라도, 호연이 동영상을 찍은 이후 청재의 움직임은 하나하나 소라를 죽인 살인범이란 증거가 되고 있었다.
세정은 열쇠가 더 잘 보이도록 그 위치를 조정했다. 뒤척이는 한규의 몸에서 독한 술 냄새가 풀썩풀썩, 일었다.
그러곤 침실에서 나와 신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정은 청재가 경호 업체와 약속했던 시간보다 세 시간 일찍 경호원들을 내렸다.
지청재가 취했고, 정신이 없는 걸 봐줘가며 정정당당하게 맞붙을 생각은 없었다.
지청재는 언제나 비열했고 비겁했으니까. 본인도 당해봐야지.
세정은 계단을 밟으며 내려오는 경호원들을 바라보았다.
만찬이 파했는데도 돌아가지 않고 거실에 앉아 사용인들과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던 청재의 눈이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 매혹적인 찰나를 피할 수 있을까?
세정은 청재의 시야 밖으로 몸을 감추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