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돌아온 로비는 엉망이었다.
끝도 없이 뒤를 확인하던 호연은 긴 숨을 내뱉으며 표정을 꾸며냈다.
세정은 몰린 인파, 그 속에서 고성이 널뛰는 싸움을 무료히 관전 중이었다. 벽에 기대어 지루하다는 듯이 청첩장의 모서리를 만져가며.
호연은 벅찬 호흡을 정돈했다. 무리하게 사용한 다리 근육에 힘이 풀려 몇 번 주저앉을 뻔했다.
“어디 아파?”
멀찍이서 호연을 본 세정이 금세 다가왔다. 호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는 세정의 손길이 다정했다.
“……아뇨, 괜찮아요.”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진짜 괜찮아요.”
의심하는 눈길을 채 거두지 못한 세정과 눈을 마주쳐 흐리게 웃은 호연이 허리를 곧게 폈다.
“무슨 일이에요?”
화제를 돌리는 호연의 물음에 세정이 피식, 웃었다. 들고 있던 청첩장을 톡톡, 두드렸다.
“휘영이 낳은 게 난데, 내가 왜 혼주가 못 돼……? 기한규, 나와! 내가 당신 법적 아내는 아니어도, 휘영이는 내 배에서 열 달 품어 낳은 내 새끼야!”
호연은 친히 알려주는 은선의 음성을 따라 청첩장을 읽어 내렸다.
신랑 부 기한규. 모 공란.
아…….
호연은 고운 비단 한복을 입은 채 바닥에 드러누운 은선을 보았다.
지난날, 제 작품을 구매하고 함께 백화점을 돌아다니던 우아함은 사라지고, 모멸감에 서러운 울음을 토해내는 어리석은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이 소란 속에서도 한규는 나타나지 않은 것 같았다. 화가 난 신부 측 혼주가 상황을 정리하려 이리저리 누군가에게 지시하는 것만이 보였다.
호연은 세정의 소매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
“내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 어투는 무심할 정도로 냉정하게 느껴졌다.
“아버지 허물은 아버지가 책임져야지. 오은선 혼자만 기휘영 가졌나. 박수도 손뼉이 맞아야 치는 건데.”
이 불륜에는 한규의 잘못도 있는데, 은선만 내보내는 건 그를 두둔하는 것 같아 싫다는 말이었다.
그 기저에는 한규를 향한 혐오가 넘실거렸다. 호연은 입을 다물었다.
경비 업체 직원들 손에 질질, 끌려 나가는 은선의 앞으로 뛰어온 휘영이 그들을 쫓아내고 그녀를 달래서 나가는 장면까지도 지켜보았다.
호연은 문득, 결혼식 날 혼주 자리에 앉아 있던 그의 고모, 윤진을 떠올렸다.
세정은 윤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누군가를 그리워했을까.
청첩장을 내려다보는 세정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일렁이지 않건만, 호연은 떨어진 그의 손을 맞잡았다.
슬쩍, 건너보는 눈을 모르는 척 외면했다.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려 호연도 웃었다. 세정이 잡힌 손을 더 힘주어 잡아주었다.
* * *
결혼식은 차질 없이 진행되었다. 보통의 결혼식이 대부분 차질 없이 진행되니까 맞지 않는 말인 것 같긴 한데…….
호연은 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게 결혼식 예정 시간이 되고도 나타나지 않은 휘영은 한규의 사람들로 추정되는 남자들에게 붙잡혀 왔다.
이어지는 예식에 호연은 청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조마조마해서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호연은 멍한 눈으로 창밖의 피오르 코리아 플래그십을 보았다.
발찌 브랜드…….
자각과 동시에 차가 방향을 바꾸었다. 플래그십과 멀어지면서 다시 생각이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정말 이런 결혼식은 처음이었다.
신랑 혼주석에는 한규가 홀로 앉았다. 그 막장 같은 상황이 폭풍처럼 지나간 터라, 아무도 축복하지도, 억지로 웃지도 않는 결혼식이었다.
그 기묘하던 결혼식을 되짚던 호연은 핸드백에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떠올렸다.
빨간불 앞에 정차했을 때야 핸드폰을 꺼내어 운전 중인 세정에게 건네었다.
창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던 세정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더 갖고 있어.”
“아뇨. 돌려드려야 해요.”
“왜?”
순수한 궁금증을 담은 물음이었다. 호연은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동영상을 하나 찍었거든요.”
“……야한 거?”
“……죄송한데 미쳤어요?”
“아니면 말고. 기대했네.”
순간, 대화 주제가 먼 우주를 헤매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저를 보는 호연의 얼굴을 확인한 세정이 짓궂게 웃었다. 그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기세정 씨 이러는 거 되게 캐릭터 붕괴예요.”
“백호연 씨 앞에서 붕괴하는 건 별로 나쁘지 않은데.”
이건 또 뭔 소리야.
호연이 두 눈썹 사이를 좁혔다.
“백호연 씨는 이제 내 사적인 영역의 사람이니까. 남들한테 보일 때랑 같진 않겠지. 이해해, 이게 나야.”
차가 정차했을 때 모든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다시 차가 부드러이 주행하기 시작했다. 호연은 뒤로 당겨지는 감각에 시트로 몸을 구겨 넣으며 본래의 목적을 상기했다.
“지청재 씨 동영상을 찍은 거예요.”
세정이 핸들을 꺾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의문을 담은 눈초리로 호연을 빤히 응시했다. 말하라는 뜻이었다.
“대부분은 욕하고 그래서 거의 못 알아들었거든요. 근데…… 기소라 씨 죽은 게 지청재 씨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요.”
석훈의 이름 옆으로 늘 따라붙던 계양 실업을 들어본 적 있기는 하나 자세히는 알지 못했다. 호연이 제대로 알아들은 건, 청재가 소라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호연은 조금 더 핸드폰을 내밀었다. 세정이 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타박할까. 위험한 일에 끼어들었다고. 그런 짓을 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공연한 짓이었음을 지적당할까.
순간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까 제대로 숨도 못 쉬었네.”
그럴 남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다친 데는?”
“……없어요.”
없다는 호연의 대답에도 세정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목까지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보냈다. 호연이 미처 자각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탐색하는 눈이었다.
타박 대신 이런 세심한 다정이 천성인 남자라, 동영상은 안중에도 없이 제가 우선인 남자라, ……좋았다.
“진짜 괜찮아요.”
“조금이라도 문제 있으면 얘기하고.”
알겠냐는 듯 눈을 든 세정에게 호연은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저, 기세정 씨.”
“응.”
“제가 도움이 된 건 맞아요?”
내가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냐고. 늘 당신의 도움을 받기만 한 내가, 오늘은 당신에게 도움이 되냐고.
“응.”
세정은 나직하게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백호연 씨한테 도움을 받네, 내가.”
호연의 얼굴로 해사한 미소가 걸렸다. 진심으로 기뻐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팽팽한 차 시트를 손가락으로 긁어내렸다. 벅찬 마음이 부풀어 흉곽이 담아낼 수 있는 한계치를 벗어난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속이 빠근할 수는 없으니까.
“고맙습니다.”
부러 존대를 택한 세정의 말이 호연에게는 한 자씩 선명하게 들렸다.
“네에.”
대답하는 호연의 입꼬리가 실룩였다.
남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 아, 날개 없이도 날 것만 같은 기분.
* * *
“원장님을 뵙고 싶어요.”
교은은 생전 좋아했던 금목서 아래 누웠다. ‘예현 수목장’에서 가장 좋은 목에 당당히 묘목을 두고 있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금목서는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야 꽃을 피우고 그 향을 맡아볼 수 있을 거라 그랬다.
호연은 괜히 그 땅을 손으로 눌러보았다. 늘 변두리에서 누군가를 돕기 바쁘던 교은은 죽어서야 중심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 보는구나.
새삼스러운 서글픔이 있었다.
“세정 씨, 고마워요.”
도움을 받은 것도, 이런 마음이 비집고 나올 수 있도록 저를 붙잡아 준 것도.
“원장님은 저한테 엄마나 다름없거든요. 아니, 다름없는 게 아니라 엄마예요. 우리 엄마.”
교은의 앞에서는 처음으로 발음해 본 단어였다.
“우리 엄마…….”
들었으면 무척이나 좋아했을 마음이 약한 사람. 예민한 감수성으로 펑펑 울음을 터트렸을 선한 사람…….
“엄마.”
이 사람이 내 남편이에요.
교은은 제가 맞는 걸 숨기고, 자신은 결혼했다는 걸 숨기고. 서로 가장 아픈 치부를 숨겼으니 퍽이나 웃긴 관계기도 했다.
“미리 말 못 해서 죄송해요.”
목이 왈칵, 졸아붙었지만 호연은 울지 않으려고 웃었다. 얼굴 근육이 아무렇게나 무너질지언정 해맑게 웃었다.
교은은 제가 웃는 얼굴을 사랑했으니까. 제가 울면 마음이 아파 밤새 곁을 지켜 주었으니까.
그런 사람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중이었다.
더는 어린 내가 아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쉬어라.
호연은 금목서 가지를 만지기도 아까워 눈으로만 가만가만 바라보다가 굽혔던 다리를 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세정에게 허리를 숙였다.
“우리 엄마, 좋은 곳에 쉬게 해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세정이 어깨를 살짝 붙잡아 만류해도 호연은 허리를 세우지 않았다.
우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호연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땅으로 투둑, 투둑 크게 떨어졌다. 세정의 손이 호연의 어깨를 스쳐 등줄기에 닿았다. 이내 여린 토닥임이 되었다.
이제 누구도 교은을 위협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연은 다시 허리를 세우는 동안 엉망으로 뒤틀리는 얼굴 근육을 애써 폈다. 자꾸 아래로 내려앉으려는 입매에 힘을 주었다.
몸을 돌려 교은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단독 사진은 홈페이지에 있는 오래된 것뿐이라, 단체 사진을 잘라 영정사진으로 썼다는데, 그 화질이 많이 떨어졌다.
추억할 사진 한 장 제대로 없어.
그 서러운 사실에 호연은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감쳐물었다가 천천히 풀어주었다.
사진 속 교은과 눈을 맞추었다.
꼭, 꼭, 꼭…… 하고 싶었던 말.
“……절대 다시 태어나지 말아요.”
삶은 때때로 행복이고 대체로 불행하니까. 우리는 그걸 선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우리 다음 생에는 절대 다시 만나지 말아요.”
사람은 쉽게 죽기도 하고 쉽게 살기도 하지만, 나는 당신 덕분에 살고 싶은 오늘이 참 많았다고. 살아보고 싶은 내일도 있었다고.
“엄마. ……사랑해요.”
들릴 듯 말 듯 조곤조곤하게.
“누가 키웠는지 딸 표현이 좀 서툴러요.”
그런 핑계로 아주 조심스럽게 고백했다.
시야가 얼룩지더니 기어코 눈물이 끓어넘쳤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웃는 얼굴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엄마도 나 사랑하지?”
“응.”
세정이 대신 대답하며 호연을 끌어안았다.
충분했다. 그걸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세정은 호연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나무를 등지고 그 얼굴이 보이지 않게 안아주었다.
뼈마디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을 느끼며 호연은 애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세정의 등허리를 죄듯이 안아 무너지듯 흐느꼈다.
나는 이제 당신 덕분에 살고 싶은 오늘이 생겼다고. 살아보고 싶은 날도 많을 것 같다고.
당신과 함께라면 때때로 불행인 삶도 대체로 행복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사랑해.”
귓가로 퍼부어지는 고백에 대한 대답은 뜨거운 눈물이었다.
호연은 기도했다.
어린 금목서가 병들지 않고 오래오래 잘 자라주길. 그녀의 강인함을 닮아 아주 오래 멀리서 나를 바라봐 주길.
행복할 나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