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근데 이쪽은 누구?”
뻔히 알면서 묻는 눈길에는 천연덕스러운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우리 처음 봤잖아요?
그런데 나한테 이런 장난을 쳐요?
“와이프.”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세정이 호연과 붙잡은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거기에 윤주의 눈길이 짧게 머물렀다.
“아, 안녕하세요. 전 기세정 씨 전처예요. 헷갈리시겠지만, 두 번째 아내.”
검지로 제 가슴께를 가리키며 두 번째를 강조했다. 호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비록 늦고 무례했지만, 살가운 인사에 호연도 마지못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백호연입니다.”
“아아, 나랑 이혼한 지 일 년도 안 돼서 재혼한 ‘세 번째’ 아내구나.”
미쳤나.
호연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세정의 눈매도 눈에 띄게 찌푸려졌다. 그러나 그런 서늘한 기색에도 불구하고 윤주는 깔깔 웃었다.
“기세정 씨, 저 신부한테 인사 좀 할게요.”
호연은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힘주어 발음했다.
이에 스륵, 빠져나간 호연의 손을 붙잡지 못한 세정이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곤 그 앞을 막아 세워 제 핸드폰을 건네었다.
“가져가.”
“금방 올 건데요.”
삐딱한 어투였다. 심통이 난 볼이 부풀어 있어 세정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핸드백을 꽉 쥐고 있는 호연의 손을 들어 올려 핸드폰을 쥐여주었다.
“아는데. 혹시 모르니까. 무슨 일 생기면 서 비서 번호로 연락하고.”
애초에 호연이 신부에게 가지 않을 걸 아는 얼굴이었다. 숨을 돌리고 화를 삭이러 잘 갔다 오라는 눈에 호연은 더 짜증이 났다.
저 여자랑 있겠다는 거지, 지금.
호연은 세정의 어깨를 제 어깨로 치고 갔다. 다분히 고의로.
남겨진 세정은 이마를 쓸어 만지며 일련의 과정을 보고 서 있는 윤주에게로 다가갔다.
“제정신인 건 맞죠, 지금?”
“내가 남의 결혼식에 취했겠어요? 그럼?”
“늘 하던 짓이 취하고 주정 부리는 것밖에 더 있었나?”
“아, 우리 결혼 생활을 그렇게 폄하하시겠다?”
“정확히 하죠. 하윤주 씨 생활 패턴을 폄하한 거니까.”
“나는 폄하해도 돼요?”
“좋을 대로 생각하시고.”
세정과 동갑내기인 윤주는 짧은 결혼 생활이 떠오르는 대화에 진저리 쳤다.
“어떻게 저렇게 한 번도 안 지지? 여자한테 안 져주는 거, 진짜 재수 없는 거 알아요?”
“하윤주 씨한테 재수 좋을 이유도 없고, 이제.”
“와……. 진짜 여전히 싸가지 없다.”
화가 오른 윤주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그에 반해 세정은 평이한 어조로 대답하며 바닥을 가볍게 걷어찼다.
“못 이길 거면 시비를 걸지나 말고.”
“아니, 이건 비긴 거죠. 적어도 기세정 씨 와이프는 화난 것 같던데?”
‘와이프’ 석 자만 나와도 비식, 웃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웃음이 헤픈 남자는 아니었는데.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진짠가 했는데, 진짠가 봐요?”
“어떤 게.”
“기세정 씨가 정착했다고 그러던데, 다들. 그렇게 결혼을 자기 편할 대로 잔인하게 이용해 먹던 사람이.”
부정도 안 한다. 윤주는 그게 아주 의외롭고 짜증이 일었다.
“난 기세정 씨 무성욕자인 줄 알았어요.”
“술 취한 거 맞네. 운전하고 왔어요?”
“안 취했다니까!”
시끄러워. 세정은 한쪽 귀를 손바닥으로 덮으며 눈썹을 들었다.
“하윤주 씨도 맞는 짝이 있겠지. 만나 봐요.”
“아니. 내 인생에 결혼은 기세정 씨가 끝이에요. 다신 없어. 네버.”
“그러면 스스로 안 한 거니까 내 원망은 말고.”
“……못됐어, 진짜.”
“응, 원래 못됐으니까. 백호연 씨한테 괜히 시비 걸지도 말고. 정말 정 하고 싶으면 나한테 하고.”
윤주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그건 언젠가 제가 세정에게 지었던 표정이었다. 그래서 짜증이 났다.
기세정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 * *
호연은 기다란 복도를 한참 걸어와 생각을 환기했다. 두 사람은 정말 친해 보였다.
“그렇겠지. 한시도 안 떨어지고 같이 살았을 텐데. 매일 봤겠지, 매일 말했겠지. 매일…….”
더한 일들을 상상하다가 호연은 걸음을 멈추었다. 머리가 뜨끈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짜증 나…….”
호연은 세정이 준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렸다. 기본 바탕화면과 기본 앱. 흔한 게임도 하나 깔려 있지 않은 핸드폰이 참 기세정다웠다.
“저장도 안 되어 있는 거 아냐?”
설마.
정작 끝까지 세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던 건 자신이면서, 호연은 지레 찔려 전화번호부를 들어가 보았다.
‘백호연’
하윤주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묘한 뿌듯함이 드는 한편, 세정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던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하트도 하나 없어. 아내도 아니야.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그냥 ‘백호연’이야.
호연은 다시 한번 분노했다.
어찌 화풀이할 곳이 없어 다시 걸음을 옮겼다.
“…….”
너무 많이 왔나, 이렇게나 넓었나, 사람이 왜 하나도 없지, 문득 드는 자각에 발을 멈추었을 때였다.
“아! 씨발, 좀! 기다리라고요.”
어떤 소리에 가닿았다.
호연이 서 있는 곳도 충분히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 사나운 음성 들린 쪽은 더 안쪽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더 깊숙한 곳.
연거푸 터져 나오는 화난 음성에 호연은 돌아갈까,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씨발아! 내 말을 들어 보라니까. 내가 기소라만 어떻게 해결이 좀 되면……!”
기소라……?
그게 돌아가려는 마음을 뒤흔들었다.
북두 그룹의 후계자인 ‘기세정’이 동복동생, 기소라의 사망을 은폐했다는 기휘영의 폭로.
호연은 식장에 들어서자 하객들의 모든 이목이 세정에게로 쏠리던 순간을 떠올랐다.
싸늘한 정적, 가느스름한 눈초리. 모두가 세정을 의심하던 분위기.
물론 세정이 알아서 해결하겠지만…….
호연은 세정의 핸드폰에서 카메라 앱을 찾아 눌렀다. 동영상 촬영을 시작했다는 알림이 들리지 않도록 남자가 고성을 지를 때 소리가 나오는 부분을 막고 촬영을 시작했다. 그러곤 천천히 다가갔다.
“계양 실업 그 꼬라지 난 게 내 탓이라고? 좆까, 씨발놈아. 너 지금 어딘데, 그래서? 투자자들 한 명이라도 아가리 열었으면……. 나 여기 없어. 알아? 네가 좆된 내 심경 알아? 알기는 씨발, 도망친 게 뭘 알아!”
호연은 동영상에 담기는 장면을 확인했다. 그 얼굴을 살폈다. 동시에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지청재였다.
“바지 사장이면 네가 다 책임지는 거야. 뭘 모르는 척을 해. 돈 그만큼 받아 챙겼으면 너도 생각이라는 걸 해야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모르면 대가리에 레터링을 해.”
화가 참아지지 않는 모양인지, 청재는 벽을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벽에 붙어 있던 그림이 아래로 떨어졌다.
“어디냐고, 개새끼야!”
악을 쓰는 얼굴이 시뻘겠다. 호연은 그 얼굴에서 부친의 얼굴을 겹쳐 보았다.
문득, 강한 공포가 들었다.
“기소라 씨발, 그 죽은 년 하나 때문에 내 꼴이 개좆같아졌어. 그년이 내가 놓은 마약 꽂고 해롱거리면서 물에 몸 던지지만 않았어도. 아니 씨발……. 에트 주식회사 건만 안 들켰어도 내가 너한테 이렇게 빌빌거릴 일도 없을 텐데, 그치? 다 기소라 때문이라고! 네까짓 새끼를 바지 사장으로 세운 게!”
충격적인 내용을 들었다. 호연은 숨을 참았다.
“뒤진다고, 너는 내 손에. 웃어? 미친 새끼. 딱 기다려. 네가 날 처넣어? 웃기고 있네. 내가 쳐들어가면 너는 이미 죽고 없어. 그리고 어쩌지? 기소라가 가진 증거 싹 다 인멸할 건데? 그니까 배신하면 네가 뒤지는 거야. 네 말 누가 믿어.”
빈정거리는 음성에 불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딘지나 말해! 야, 씨발. 야! 끊었어? 끊어? 어, 이게 씨발 진짜 어어어!”
하필 이때 전화가 끊겼다. 호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가누는 청재를 멍하니 보다가 뒷걸음질 쳤다.
한순간 적막해진 공기에 서툴게 다리를 교차하는 구두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이에 눈을 뜬 청재가 고개를 돌렸다.
“……!”
순간의 판단이었다. 호연이 몸을 돌려 기다란 길을 뛰기 시작했다.
“너 뭐야.”
선득한 음성이 파열음 사이를 파고들었다. 발소리가 금세 두 개가 되었다.
모퉁이를 돌고, 돌고, 또 도는 동안 호연의 몸 선이 드러났다가 사라지고 뒤편으로 청재의 구두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미끄러운 대리석에 얇은 굽이 비틀릴 때마다 호연은 심장이 내려앉는 두려움을 앓았다. 와중에도 핸드폰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꼭 세정에게 전달해야만 한다.
비릿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넓은 식장은 미로 같았다.
두려움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호연은 다시 한번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돌았다. 사실 돌아가는 길을 몰랐다. 마구잡이로 밟아 가고 있었다. 뒤편에서 쫓아오는 것도 이젠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더 내달린 때였다.
“……!”
확, 손목이 붙잡히고 당겨졌다. 지나치려던 모퉁이로 몸이 비틀렸다.
쿵쿵, 반동을 이기지 못한 몸이 어딘가로 처박혔다. 정신이 두 차례 점멸했다가 돌아왔다.
“끅…….”
고여 있던 숨이 억눌려 튀어나왔다.
가슴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이 흐려져 쓰러질 것 같았다.
“왜 이렇게 뛰어, 남의 결혼식장에서.”
그런데…….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건 날 선 지청재의 음성이 아니었다.
호연은 간신히 눈을 들어 음성의 주인을 확인해 보았다.
“상당히 민폔데.”
담배를 입술에 문 채로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기휘영이었다.
……이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정이 소라의 의문사를 은폐했다는 거짓을 폭로한 남자니까. 제게는 청재와 다를 바도 없다.
호연은 휘영이 잡은 손목을 뿌리쳤다. 그리고 한 걸음 걸어가는데,
지청재가 보였다.
열이 바짝 올라 곳곳을 둘러보는 눈이 매서웠다. 곧이라도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 것 같은 아찔함이 있었다.
호연은 두려움에 다시 뒷걸음질 치며 밭은 숨을 가누었다.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계속 뒷걸음치던 호연이 휘영의 가슴께로 어깨를 박았다. 호연은 휘영이 제 뒤에 서 있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그게 벽이라고 생각했다. 소리를 찾으려 집중한 청재가 미치게 두려웠다.
어디로……. 어디로…….
점점 공황 상태로 진입하는 몸에는 여분의 공기가 없었다.
휘영은 그 자그마한 여체를 내려다보았다. 거푸 바닥을 디디는 구두가 애처롭게 미끄러졌다. 제게 닿아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하는 모양이었다.
“음―.”
휘영은 길게 소리를 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앞에 있는 새끼는 지청재인 것 같고. 호연은 그를 바라보고 떠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한다?
짧은 고민을 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휘영은 호연의 어깨를 붙잡아 뒤로 당겼다. 제 등 뒤는 문이고, 문을 열고 나가면 뒤뜰이었다.
“나가서 왼쪽.”
그리 말하고 호연을 내던지듯 밀었다. 영문도 모른 채 넋을 놓고 서 있다가 급하게 사라지는 호연을 눈으로 더듬은 후에야 눈썹 끝을 갉작였다.
무슨 상황인데, 씨발…….
“야!”
휘영은 담배에 불을 붙이며 청재를 불렀다.
지청재가 호연을 찾지 못하도록 시간을 벌기 위해.
청재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지다 멍청하게 변했다. 휘영은 손을 까딱이는 것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았다.
연기 속에 혼란을 숨겼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감춰준대 놓고 백호연한테 기세정을 보낸 잘못이 있으니까.
쌤쌤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