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1화
작업실은 일부러 불편하게 조성했다. 공간의 목적이 휴식이 아니었으니 그랬던 건데…….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우기는 거구의 남성을 바닥에 눕히자니 쓰러진 저를 응급실로 데려간 사람을 대하는 도리가 아닌 것 같고, 테이블에 올려두자니 산 제물 같았다.
그러니까 작업실은 여러모로 아픈 사람이 있을 만한 공간이 아니었다.
“네에, 서 비서님. 바쁘신데 죄송해요. 네에, 감사합니다.”
―아니요, 사모님. 제 쪽에서 더 감사드립니다.
병원은 싫다고 하지. 택시는 호출되는 게 없지. 버스는 진작 끊겼지. 호연으로서는 신원에게 연락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내일이 휘영의 결혼식이라, 꼭 데려갈 예정이었다고. 하루만 전무님 잘 좀 부탁드린다고.
호연은 전화를 끊으며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담요를 덮은 남자의 너른 어깨가 유난히 안쓰러웠다.
세정을 부축해 작업실로 돌아오는 그 짧은 거리에도 무게에 짓눌리던 압박감이 생생했다. 호연은 괜히 어깨를 문질러 보았다. 귓가로 떨어지던 날것의 숨도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전무님께서 말씀하셨나요? 돌아가신 이교은 천사보육원장님 수목장 잘 완료되었다고요.
“…….”
―전무님께서 천사보육원까지 신경 많이 써 주셨습니다. 사모님도 상심하셨을 텐데 잘 이겨내세요.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일부러 한 말 같았다. 제게 베푸는 세정의 선의는 늘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그러니 남자가 시켜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신원, 본인의 판단으로 이야기한 것 같았다.
호연은 가슴이 뭉클했다. 비록 부고를 제게 알리지 않으려고 했지만, 장례까지도 손수 봐주었다고.
애들뿐이라 침울하고 혼란한 장례식장을 조문객들로 채워 억울하게 죽은 그녀의 가는 길이 외롭지 않게 했다고…….
왜 이다지도 서글픈 마음이 되는 걸까. 분명 잘못이 있는 남자인데, 그런 건 왜 자꾸 희미해지는 걸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 나한테 남자를 영업하는 건가.
이런 괘씸한 맥락의 의심도 들었다.
“……아냐.”
호연은 제 눈이 가느스름해져 세정의 모습이 번져 보일수록 본인이 쓰레기 같았다.
호연은 다급히 생각을 갈무리하고 테이블로 다가갔다. 바로 옆은 아니고, 의자 하나를 띄워 앉았다.
몸살 기운으로 앓던 세정은 고분고분하게 상비약을 받아먹고 나서야 전보다 편한 얼굴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호연은 흐트러진 세정의 머리칼로 손을 뻗었다가 잠깐 망설였다.
정리해 주어도 될까.
곤히 잠든 얼굴에는 시름이라 일컬을 게 없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그도 사람인데……. 그 언젠가는 평범한 순간도 살아내던 남자인데.
문득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많이 애틋해서 호연은 입매에 힘을 주어 어렵게 웃었다.
그래, 남자는 누그러진 표정도 지을 줄 아는데. 실은 그 기질이 다정한데.
호연은 망설였던 마음을 내려두고 세정의 머리칼을 다듬어 주었다. 마찬가지로 몸을 숙여 테이블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한층 가까워진 얼굴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이런 얼굴은 나만 보고 싶다는 미약한 집착이 움텄다.
호연의 손이 세정의 콧대를 따라 미끄러졌다.
호연은 세정의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오래 뜯어보았다. 새삼스럽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술도 예쁘고, 피부도 좋고…….
“이런 눈빛은 내가 오해하지.”
그새 살이 내린 세정의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데, 그 손이 잡혔다. 나른하게 뜨인 눈이 반쯤 감겨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 듯했다.
“……오해하세요.”
세정은 잘못 들었다는 양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응? 눈썹을 들어 올리는 물음에 호연은 입술을 다물었다. 다시 말해줄 용의는 없었다.
“아까부터 계속 꿈 같네.”
세정은 나직하게 뇌까리며 붙잡은 손을 조금 당겼다. 다시 한번 손가락 사이로 손가락이 침입하여 충만하게 채워졌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양이었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것처럼 손등의 연한 살점을 문질러보는 행위에 배 안쪽으로 거품이 가득 쌓여 몽글거리는 것 같았다. 이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간질거리는 짓에 호연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왜 가만히 있지.”
그러곤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웃음을 짓는다. 나쁘지 않네, 좋네……. 중얼거렸다.
호연은 세정과 끊임없이 눈을 맞추다가 더는 참을 수 없는 저릿한 느낌에 눈을 돌렸다. 신원이 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내일 기휘영 씨 결혼식 있다면서요?”
“아…… 그랬나.”
그 작은 약 하나에 모든 게 귀찮아진 듯했다. 잠깐 시간을 더듬는 것도 쉽게 포기한 세정은 조금 바보같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래서 일찍 데리러 오신대요. 어차피 새벽이니까,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요. 더 아프면 꼭 말해주고요.”
“아, 아파.”
“어디요?”
세정이 갑자기 눈매를 구기고 몸을 살짝 들었다. 잡지 않은 손으로 목을 짚었다. 놀란 호연이 바짝 다가가 세정의 목 위로 놓인 손에 제 손을 올렸다.
이내 길게 휘어지는 세정의 입꼬리에 호연은 장난인 것을 알아차렸다.
“……장난치지 말라고 했죠.”
호연은 걱정하던 손으로 세정을 아프게 때려주었다.
그런데,
“안 아프잖아요!”
세정이 정말 아프다는 듯 울상을 지으며 다시 테이블로 쓰러졌다. 호연은 그게 억울했다. 제가 더 울고 싶었다가 몸살 기운이 있으니 고통이 더 강하게 밀려오나? 싶은 죄책감이 들었다.
“진짜 아파요?”
그렇게 세정에게로 몸을 깊이 숙여 상태를 살피는데,
“속이는 대로 속아, 귀엽게.”
입술에 매끄러운 감촉이 맞물렸다가 떨어졌다. 그게 세정의 입술이라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호연은 고장이 난 것처럼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수도 없이 한 입맞춤인데……. 이렇게 심장이 덜컹거릴 수가 있는 건가. 할 수만 있다면 심장을 짚어 가리고 싶었다.
이 심박을 들킬 것 같아. 살이 튀어나올 정도로 뛰고 있을 것 같아.
“아, 미안.”
그런데 그 반응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세정이 돌연 사과했다.
호연은 더 혼란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정은 흔들리는 호연의 동공을 피하며 입술을 열었다.
“안 속일게.”
“……네?”
“장난으로라도 내가 백호연 안 속인다고.”
“아.”
속인다고 그랬구나, 방금.
자각도 못 하는 어딘가를 푹, 찔린 것 같았다.
몰랐네, 내가. 남자를 원망할까 봐 걱정했던 내가……. 특정 단어를 들어도 전혀 몰랐어.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러면 괜찮지 않을까. 남자와 함께여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면……. 둘만 있는 게 중요하다면, 괜찮지 않을까.
긴장으로 굳어 있던 호연의 눈매가 풀어졌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차분히 호흡을 고르다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하지 마요, 사과.”
“그래도.”
“기세정 씨가 하면 저도 해야 하잖아요.”
언젠가 나눴던 대화 같기도 했다.
“백호연 씨가 그렇다면…….”
아, 이제 알겠다.
세정이 정확히 기억해낸 문장에 호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를 사로잡힌 듯 보던 세정이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왜, 물으려는 호연의 입술에 다시 입술을 포개며 다가갔다.
아랫입술을 빠는 약한 희열에 호연이 비틀거렸다. 그 허리를 감싼 세정이 호연을 의자에 앉혔다. 한 번도 떼어지지 않은 입술 사이로 혀가 빨려들었다.
“기휘영 결혼식 같이 가.”
그런 말이 들렸던 것도 같은데.
비어가는 의식 너머로 기억이 빠르게 휘발했다.
* * *
피곤해.
자고 일어남과 동시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연은 세정과 마주 보다 잠들던 그대로 굳어버린 듯한 허리를 폈다. 어렵게 사위를 둘러보았다. 굽어 있던 허리가 얼얼한 통증을 유발해서 잠시간 눈앞이 아뜩했다.
“기세정 씨.”
작업실이라는 건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세정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 호연은 휘청이며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다. 카페테라스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꿈인지, 현실인지 몽연한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세정을 보기 전까지는 실감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자 다리까지도 저렸다. 호연은 현기증이 일어 후우, 단숨을 내뱉으며 세정이 있을 만한 곳을 고민했다.
그러다가 왜인지…… 피아노 방일 것만 같아서.
호연은 걸음을 떼었다. 피아노 방의 문에는 언젠가 감시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창이 있었다.
호연은 그 창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세정의 뒷모습을 보았다.
건반 뚜껑을 열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또 조용히 피아노를 내려다보는 뒷모습은 남자의 표정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원토록 그들의 비밀로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도 했다.
자신을 부수는 것으로 포기한 사랑.
그 커다란 의미는, 꿈을 잃어보지 않은 내가 상상하기 어렵다. 불가해하다.
그 두 존재를 바라보는 마음은 경외심이라 부를 수 있을까.
호연은 고요하게 숨을 내쉬었다.
세정의 팔이 살짝 들렸으나 건반 뚜껑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의 건반 뚜껑을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어 보다가 그 위로 손가락을 내렸다.
―전무님, 돌발성 난청을 앓으세요.
툭, 투둑, 툭, 투둑…….
비 내리는 소리가 났다. 세정의 손가락이 무심하게 나무를 타건했다.
그 정도만 꿈꾸는 사람처럼. 그 이상은 사치인 사람처럼…….
기다란 다리가, 너른 어깨가, 마른 등이, 굽은 손가락이, 연주를 이어 나갔다.
그러나 남자의 오래된 절망과 달리, 굽은 손가락은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는 원래 손가락을 둥글게 말고 치는 것이므로.
어린 날, 그가 다채롭게 타건했을 느린 곡이 이제는 한 음으로만 투박하게 연주되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훌륭한 연주였다고. 호연은 세정의 품에 큰 꽃다발을 안겨주고 싶었다.
당신은 여전히 피아니스트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날에.
* * *
“기휘영 씨 신부가 저분이라고 왜 말을 안 했어요?”
웨딩 베뉴 앞에 놓인 결혼사진을 확인한 호연이 아연한 얼굴로 세정을 돌아보았다. 세정은 모르겠다는 듯 양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면피했다.
그냥 아는 얼굴도 아니고, 제가 폭발하던 날의 촉발제가 된 여자였다. 속초, 그 여자. 세정의 네 번째 아내가 되려고 맞선에 나왔던 여자.
유인 홀딩스의 유아민.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안 될 건 없지.”
“아니, 기세정 씨.”
“나 이제 백호연 씨가 조금 무섭네?”
그러면서 웃는 얼굴에는 무서움 혹은 두려움과 닮은 감정이 없었다.
어이없어.
호연은 세정을 흘겨보다가 다시 결혼사진을 보았다.
잘 어울리는 그림체였다. 이목구비를 그려낸 선이 완전히 달라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다.
여전히 눈꽃 같은 인상에 조금 더 오래 시선을 두던 호연이 몸을 젖혀 세정을 보았다.
“세정 씨.”
그런데 어딘가 낯익은 여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짧게 아는 척을 한 세정은 여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잘 지냈어요?”
여자는 그린 듯한 웃음이 예뻤다.
“못 지낼 이유도 없지.”
“하긴. 얄밉게 이혼 후에 더 잘나가더라, 우리 세정 씨는.”
이혼 후?
우리 세정 씨?
호연은 여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 세정의 두 번째 아내이자 세종일보 대표의 장녀인 하윤주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