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자신에게 던지던 말을 세정에게도 휘두르는 호연의 속이 뭉그러졌다. 너무 뜨거워 모든 장기와 뼈가 삭아버리는 것 같았다.
호연은 세정이 제게 질렸으면 했다. 내지른 말들에 사실이 아닌 것도 많았지만, 세정이 저를 그만 놓아준다면 더한 말도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백호연 씨, 아팠겠네.”
아팠을 거라 단정한 고요한 대답에 일순간 탁, 맥이 풀렸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내 잘못이야.”
말아 쥐었던 손가락이 욱신거렸다.
담담히 인정하는 잘못에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이건 남자의 잘못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제가 모든 죄책감을 끌어안고 사는 기질 탓이었다. 그래서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날카로운 것으로 몸을 뒤덮고 몸집을 부풀리는 무식한 자기방어였다.
그런 원망의 모순을 알면서 남자는 제가 잘못했대. 다 제 잘못이래.
내가 쏜 총을 쏜 방향이 틀렸나, 불발탄이었나.
당신은 이런 남자가 아니잖아.
두 눈이 어지럽게 방황했다. 눈을 들어 세정을 바라보았다.
이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호연은 아파하는 세정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방향이 틀리지도, 불발탄도 아니었던 말들이었다.
심장에 명중한 말들에 남자는 관통당한 채 아파했다.
“앞으로도 백호연 씨는 그렇게 나를 원망하면서 살아.”
심장의 벅찬 박동으로 흉곽이 빠듯하게 느껴졌다.
“나는 백호연 씨를 혼자 둘 수가 없어. 그러니까 자신을 혐오할 시간에 나를 마음껏 미워하고 마음껏 훼손해.”
호연은 눈을 감았다. 또 한 번의 고백이 잔인하리만치 다정했다.
“평생에 걸쳐 형벌을 치를게.”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그래도 그 끝은 사랑이었으면 좋겠어.”
내가 뭐라고.
“내가 노력할게.”
호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정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억제하듯 조금은 강제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이기적인 새끼라, 물러서 봤자 여기야. 그러니까 백호연 씨가 이해하고 또 포기해. 나를 견뎌.”
“…….”
“사랑해.”
마지막 말에 참지 못했다. 호연은 급하게 차에서 내렸다.
여름밤의 더운 공기가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그 눅눅한 공기보다 제 속이 뜨거웠다.
세정은 느리게 따라와 호연의 앞을 계속 비추었다. 헤드라이트가 호연의 기다란 그림자를 그려주었다.
호연은 그 그림자를 보면서 묵묵히 걸었다.
쏟아지는 밝은 빛에 늘 핑계만 대는 그림자 같은 사랑이 부끄러웠다.
* * *
핑곗거리로 둑을 쳐 막아둔 유수(流水) 같은 마음이 기어코 범람했다.
호연은 세정을 생각하면 폐에 물이 찬 것처럼 가슴께가 아팠다.
다 괜찮다는 남자를 이제 어떤 말로도 막을 수가 없겠지. 악착같이 핑계를 찾아내도 또……. 무의미해지겠지. 그 앞에서 홀로 한 결심은 나약해지겠지.
딜레마라고 했다.
기세정이 M&A를 제안하는 시점에서는 그보다 나은 선택지도 없다고. 어찌 됐든 흡수되는 건 당연한 거라고.
또 한 번, 모든 걸 다시없이 선명하게 느낀다.
오늘도 모퉁이를 돌면 카페테라스에는 세정이 앉아 있었다.
호연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뱉으며 그 앞을 지났다. 단정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를 무시하며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태양이 활개 치는 거리보다는 서늘한 공기가 몸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여전히 속은 뜨끈해서, 호연은 큰 창문을 열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세정과 시선이 맞물리고 길게 휘어지는 입꼬리를 보고야 만다.
보고 있는 태블릿은 관심도 없다는 양, 턱을 괴고 살랑살랑 웃는다. 어울리지도 않는 꼬리가 달린 것 같았다.
바보인가. 뭐가 좋다고. 웃기는 왜 웃어.
심술궂은 생각이 든다. 호연은 보란 듯이 창을 열어두었다.
오늘은 정말 작업을 미루면 안 되었다.
창밖에서 넘어오는 말소리가 조용한 작업실의 공기를 휘저었다.
“전무님…….”
애걸하는 쪽은 신원이었다. 세정은 따분한 듯 권태 어린 어투로 몇 마디를 툭툭, 내뱉었는데 그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다만, 세정이 입을 다물 때마다 신원은 무릎이라도 꿇을 듯 애처롭게 굴었다.
“정말 기휘영 이사와 회장님께서 작정한 것 같아요. 본인에게도 실이 되는 기사를 터트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두 분이 손을 잡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는데……. 일단 한시가 급합니다. 돌아가셔서 차후 대책을 마련하셔야 해요.”
모두가 쉬쉬했던 기휘영의 출신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고. 그것도 본인이 제가 사생아인 것을 폭로하고 소라의 의문사를 언급했다고.
특히, 북두 그룹의 후계자인 ‘기세정’이 소라의 사망을 은폐한 것으로.
말도 안 돼.
호연은 엄지손톱을 잘근거렸다. 미완에 그친 작품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모든 감각 세포가 예민하게 곤두섰다.
정말 남자가 서울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일일까.
날뛰는 심장을 억누르던 신경이 온통 다른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에 심장이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어지는 기분이었다. 통제를 상실한 정신이 이미 창밖이었다.
몇 번을 간청하던 신원이 결국 두 손을 들고 돌아가는 것 같았다. 들려오는 말소리가 없었다. 더는 유추할 수 있는 내용도 없었다.
호연은 핸드폰이 없어 상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게 이토록 커다란 불편함인 걸 이제야 알았다.
호연은 짜증스럽고 초조한 마음을 배합해 둔 물감을 치덕이는 것으로 표현했다. 점점 탁색이 되어가는 물감을 보자 마음이 끝도 없이 내려앉았다.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와 붓을 여러 번 고쳐 쥐고 그래도 안 되어 붓을 놓고 원피스에 손을 문질렀다.
이런 마음으로 작업이 될 리가 없잖아.
호연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시선이 잠시 헛돌았다. 당연히 비스듬하게 앉아 있어야 할 세정인데, 아니었다.
팔을 뻗어 테이블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언젠가의 나른한 고양이처럼 여유롭게…….
“……한가롭네.”
머릿속을 뒤덮어 생각을 마비시키던 걱정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호연은 돌연 힘이 빠져 도로 자리에 주저앉듯이 앉았다.
괜찮은 거겠지. 남자가 저토록 태연하니까. 남자는 늘 모든 수를 내다보고 행동하니까. 그래서 위험에 내몰리지 않으니까. 정말 큰 문제라면 갔을 테니까.
합리화를 끝낸 호연은 다시 붓을 쥐었다.
한 차례 전화가 왔었다. 오늘은 내려오지 못할 것 같으니 따로 밥을 좀 챙겨 먹으라는 소예의 잔소리 같은 다정함이 있었다.
그를 무시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었지만. 그다지 식욕도 없었지만. 호연은 못내 켕기는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허리가 쑤시듯 아팠다. 팔을 최대한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두둑두둑, 다시 맞춰지는 뼈마디에 피로가 끊겨 나갔다.
그래도 한동안은 마감에 쫓기지 않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피곤이 절반 정도 뚝 잘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최고의 피로 해소제는 마감이라더니. 그 말을 십분 공감하며 문을 닫으려 창가로 다가섰을 때였다.
비가 오네.
“아직도……?”
손을 내밀며 습관적으로 세정의 위치를 더듬은 호연의 눈이 의아함을 머금었다. 반사적으로 나온 의문은 끝맺어지지 않아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세정의 얼굴에 내리쬐는 빛이 해에서 달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시간의 흐름을 멈춘 듯 남자의 자세는 여전했다.
이상했다. 많이 이상했다.
호연은 번지는 불안감을 진압하면서 어질러진 작업실을 정리했다. 부러 큰 소리를 냈다. 나 이제 간다고. 그러니까 늘 하던 것처럼 가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한참을 시끄럽게 굴었다. 그러곤 다시 창문을 닫으러 돌아와 남자를 바라보았다.
미동도 없었다.
가슴이 싸하게 식었다. 온 감각이 곤두섰다. 직감이 안 좋았다.
호연은 작업실에서 뛰쳐나갔다. 이마로, 뺨으로, 콧대로 여린 빗방울이 살결을 두드렸다. 호연은 빠른 걸음으로 카페테라스 테이블 앞에 무릎을 꿇듯이 몸을 낮추었다.
“기세정 씨.”
급하게 부르자 앓는 신음이 들렸다. 호연은 크게 뜬 눈으로 세정의 얼굴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식은땀이……. 왜, 왜 이래요?”
세정이 눈조차 제대로 뜨질 못하고 눈썹을 좁힌 채 있었다.
“기세정 씨! 세정 씨…….”
흔들어 보려고 몸에 손을 대는데, 너무 뜨거웠다. 델 듯이 불덩이였다.
“세정 씨 잠깐만요. 기다려 봐요. 내가 핸드폰이……. 없고. 작업실에……. 어, 작업실에 전화기…….”
아마 듣지도 못할 세정에게 횡설수설하며 구구절절 상황을 설명하는 일은, 호연이 마비된 제 머릿속을 어렵게 사고시키는 거였다.
작업실의 유선 전화기. 그것만 떠올린 호연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걸음 떼지도 못한 채 손이 붙들렸다.
“……작업 끝났어?”
겨우 뜬 눈을 찌푸려 가쁜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이딴 걸 묻는다.
“……근데 왜 백호연이 내 눈앞에 있지.”
꿈이네.
매일 지나치던 뒷모습만 바라보고 앉아 있던 세정은 쉽게 꿈이라며 확언하고 웃었다. 그러곤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자꾸 감기는 눈이 제 의지와 반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반대편 손을 들었다가 힘이 없어 떨어트리고 다시 느른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 짙고 깊은 눈 속에 자꾸 호연이 갇혔다가, 버려졌다가, 갇혔다가 다시 버려졌다.
끝내는 저를 비워낼 수 없다는 듯 남자가 씨발……. 신경질적으로 몸을 세웠다.
“아…….”
등받이에 기대어 탁한 신음을 흘린 남자가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눈가로 눈물 같은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는가. 당신도 이 비처럼 우는가.
세정은 어딘가 허물어질 듯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운 분위기를 거느린 채로 깍지 낀 손만큼은 단단히 쥐었다.
그래서 호연은 감히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제발 몸 좀 살피면서 일해요. 왜 맨날 나만 신경 써…….”
호연은 고단한 삶을 사는 남자를 끌어안았다. 가슴 아래로 남자의 화려하면서 공허한 삶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면 백호연 씨가 나를 좀 신경 써. 그러면 되겠네.”
세정은 깍지 낀 손을 풀어내고 호연의 등허리를 안았다.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농담한 것도 아니고.”
기진한 음성이 계속 말대답을 일삼았다.
세정은 제 손가락과 손가락을 땋듯이 강하게 매듭지었다.
그 안에 사랑하는 호연을 담아 지켜내듯이, 다시는 그 속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듯이.
호연은 그 집착적인 소유욕을 느끼며 세정의 목덜미로 팔을 둘렀다.
믿을 수 없는 양 눈을 올린 남자에게 말을 흘려 넣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요…….”
이내 남자가 느릿하게 뜨거운 숨결을 뱉어냈다.
“응, 나 아파, 호연아.”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음성에 속이 무수한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