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누구 기다려?”
아, 내가 남자를 기다리고 있구나.
소예의 물음에 호연은 제가 세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창밖을 연신 확인하면서 한숨을 내쉬던 게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래서 오늘도 그림은 진전이 없다.
호연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테이블로 엎어졌다. 먹다 남은 배달 음식을 치우던 소예가 호연의 절망을 훔쳐보았다.
“왜? 또 맛 안 느껴져?”
그게 미각을 잃은 이의 서글픔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호연이 맛을 느낀 지는 꽤 되었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나 호연은 소예가 오해하도록 둔 채 얼굴의 모든 꼬리를 내렸다.
저도 몰래 시선이 또 창밖을 향했다.
제가 작업실에 출근하는 시간보다 이르게 카페테라스를 지키고 있던 남자가 없었다. 늦게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했는데 소예가 서울에서 돌아온 저녁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신경이 쓰였다.
금세 끝날 기다림이라고 생각했으면서. 자신을 흔들지 말아줬으면 한다고 지껄였으면서. 자기방어적인 언동이었나 보다.
정말 결심이 한없이 가볍다, 호연아.
싱숭생숭하다가도 뒤숭숭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오늘 야작 파이팅하고. 문단속 잘하고.”
웬만하면 잠은 집에서 자라고 했을 소예가 보기에도 작업 속도가 더뎠던 모양이다. 오늘은 야작을 하겠다는 말을 선뜻 그러라며 허락해 주었다.
호연은 소예를 배웅하고 문을 잠갔다. 다시 돌아와 테이블 위로 엎드렸다.
갈피를 잃고 허둥지둥하는 마음이지만, 다스릴 수 있는 마음이었다.
이런 순간이 올 줄 알았으나 기대감이 생각보다 컸나 보다. 약한 파도일 줄 알았던 상실감이 해일 같았다.
손에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은 지금, 텅 빈 손에 세상에 나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서글픔을, 불안감을 쥔다.
그래서 쉴 틈 없이 무서웠다. 자주 울고 싶었다.
당신과의 사랑은 실수다. 영원히 바로잡고 싶지 않았던.
이토록 당신이 간절하다가 또 편할 대로 당신을 원망할 내가 또 혐오스럽고 염증이 난다.
“짜증 나…….”
호연은 갑작스레 눈물이 났다. 그를 손날로 밀어 닦는데, 손등이 다 젖고도 울음이 그치질 않았다. 점차 숨이 가빠졌다. 이내 몸에 힘이 빠져 젖은 손을 늘어트리고 엉엉, 울었다.
문득, 죽고 싶었다.
위험했다. 도저히…… 도저히 작업실에 있지 못할 것 같았다.
남자를 피해 도망친 저만을 위한 공간 속에서도, 끝내는 그 남자 생각뿐이다. 다음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대체 어디로.
답답했다. 목을 옥죄어 오는 공기가 목구멍을 막는 것 같았다. 숨조차 편히 못 쉬겠다. 죽을 것 같아.
급히 몸을 일으킨 호연이 의자를 아무렇게나 밀어냈다. 갑갑한 목을 긁어내렸다. 고통을 분산하면 괜찮아질 것처럼.
익숙한 공황 발작인데, 받아들이는 몸은 늘 극치까지 몰렸다. 예민해진 감각이 널뛰었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피가 아래로 훅, 쏠려 어지러웠다.
호연은 테이블을 붙들고 잠시간 숨을 허억, 허억, 거칠게 내쉬었다. 온몸의 끝이 벌벌, 떨렸다.
내려다보는 테이블이 빙그르르, 돌고 시야가 좁아졌다.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에 갇혀 있는데 와르르, 바닥이 푹 꺼지는 느낌.
그런 아득한 고통.
이제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호연은 가슴 위쪽 그러쥐어지지도 않는 살을 긁으며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걸음마다 온전한 정신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미쳐버릴까. 이대로 나는 미쳐버릴까……. 죽을까. 드디어 죽나…….
극한의 공포 뒤로 환희가 온다. 그리고 다시 공포가 닥친다.
겨우 문을 잡았으나 힘을 주어 당기지는 못했다. 다만,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자연히 문이 밀렸다.
폐부 가득 밀려오는 여름날의 후텁지근한 공기, 거기에 섞인 시원한 향…….
잠깐 정신이 들었다가 끝내 모든 감각이 아스라이 요원해지는데,
“백호연!”
쓰러지는 호연의 귓가로 가장 그리운 음성이 닿았다.
* * *
교은의 꿈을 꿨던 것 같다. 또렷하지 않은 형체만으로 가슴이 뜨끔했으니까. 꿈에서도 ‘엄마’라는 두 글자가 나오지 않아 괴로웠다. 가슴을 치고 목을 긁어도 실어증을 앓는 사람처럼 말을 못 했다.
이내 꿈속에서도 지쳐 주저앉아 멍하니 그저 바라만 보았다. 눈코입도 없는 희미한 무언가를 하염없이 보았다. 그러다 불현듯 꿈에서 깨어나니 울고 있었다. 엄마……. 그제야 잘도 나왔다.
호연은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푹신한 침대에 더 깊이 몸을 묻다가, 손을 올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닦으려다가 멈칫했다.
소예의 외할머니 집은 침대가 없다.
들어 올려 눈물을 닦으려는 손이 고정된 것처럼 무거웠다.
호연은 급히 몸을 들어 어둠 속을 살폈다. 창문을 뚫은 달빛에 세정의 얼굴이 환하게 보였다.
이 어둠 속에서도 하필 이토록 환한 거다.
“나야.”
짧은 언사에 왜 안정감이 드는 동시에 속이 울렁이는지.
이미 멀어진 기억이 빠르고 거칠게 갔던 길을 돌아왔다.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큰 음성까지 돌아오고서야 하, 큰 한숨을 내뱉었다.
“백호연!”
와중에도 당신 생각이 나는구나, 했다. 가슴이 죄여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혔으면서도 당신 생각을 한다고. 그런데도 당신이길 바라며 정신을 놓았었다.
그런데 진짜 당신이었다고.
어이가 없지. 종일 코빼기도 보이지도 않다가. 이런 순간에 나타나 기어코 나를 살리고. 안도하게 하고.
약한 순간은 위험했다. 나는 지금 약하고, 그래서 남자는 해로웠다.
호연은 잡힌 손을 돌려 뺐다. 팔뚝과 손등에 감긴 링거 줄도 대충 빼내었다. 피가 울컥, 솟는 것 같았으나 상관없었다.
“뭐 하는 거야.”
남자는 어느 순간, 말이 짧아졌다. 그것도 상관없지.
“집 갈 거예요.”
“가. 가는데, 링거 다 맞고 가.”
“아뇨.”
아뇨, 싫어요. 다신 묻지 말라는 듯 호연은 거푸 거절했다. 세정은 더 이상의 강요 없이 침대로 기울어 있던 몸을 세웠다. 그러곤 몸을 일으키는 호연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게 낯설었다. 남자를 속속들이 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본인의 고집을 꺾는 일은 없던 남자였다. 알겠다는 듯 입을 다문 남자는 처음이었다.
아니, 그래도 알 게 뭐야.
호연이 침대에서 두 발을 내리는 동안 불편한 기류가 빼곡하게 느껴졌다.
매듭지은 관계가 일방적이어서 그랬다. 호연은 억지로 끝을 냈고 세정은 끝내 끝내지 못해서. 그 차이가 빚은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호연은 두 발로 땅을 디뎠다. 일순, 현기증이 느껴져 시야가 탈색되는 선득한 순간이 있었다. 작게 휘청이며 침대의 난간을 잡고 어지럼증을 참았다.
이에 세정이 호연의 손목을 붙들었다.
“백호연 씨.”
“괜찮아요.”
호연은 그 손을 비틀어 빠져나오며 공격적으로 대답했다.
호연은 세정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본 것 같았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겠지. 답답하다고도, 한심하다고도 생각하겠지.
그건 남자가 저를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의 표정이었다. 저를 많이 주저앉히던 날의 기억. 그를 떠올리자 상관없다고, 알 게 뭐냐고 제쳐둔 생각이 일시에 머릿속에서 엉겼다.
더듬는 기억마다 망한 사랑의 역사가 아니면 비굴했던 역사다.
이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냥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백호연 씨.”
다시 한번 부르는 세정의 음성을 무시하고 호연은 걸음을 옮겼다.
“호연아.”
그러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음성에는 기어코 멈춰 서게 되었다.
호연은 돌아보지 않은 채로 세정에게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환자복은 갈아입어.”
호연은 눈만 내려 제 차림을 살폈다. ‘을언 병원’으로 도배된 환자복을 보고 있노라니 현실을 믿지 못한 시선이 허망해졌다.
“입고 가고 싶으면 환자복 비용까지 수납해 보고.”
이런 건 과잉 친절이었다.
호연은 뒤편에서 언뜻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결국 전부 세정의 뜻대로 되었다.
호연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수납을 마친 세정은 간호사를 붙잡아 그녀가 멋대로 링거 줄을 뽑은 걸 고발했다. 그 바람에 호연은 다시 침대로 끌려가 링거를 맞아야만 했다.
병원을 나와서는 시간도 모르고, 지갑도 없고, 핸드폰도 없는 처지.
그게 초라했다.
차창 밖으로 풍경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먼 밤하늘, 을언면은 유독 별이 많았다. 세정이 부러 감속 운전을 하는 걸 알았으나 호연은 그저 차창 밖만 내다보았다.
“남편분이 환자분 걱정 정말 많이 하셨어요.”
간호사는 세정이 다시 수납하러 간 사이에 링거 줄을 빼주며 속삭였다.
“환자분 안아 들고 오셨는데, 식은땀을 흘리시면서 눈도 한 번 못 떼셨어요.”
괜한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서류상으로는 부부라 세정이 보호자로 기능한다는 사실이 심장을 저몄다.
떠오르는 조각들이 있었다.
“환자분과 관계는요?”
“남편. 남편입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던 남자의 음성. 환자복으로 갈아입혀 주는 세심한 손길. 아무런 야욕 없이 이불을 끌어 올려 목 아래까지 덮어주고 좋은 꿈을 꾸라고 토닥이던 조용한 손길.
그런 것들.
어떤 날,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순간이라고 규정했던 행동들…….
가슴 위로 풀벌레가 앉은 것처럼 진동했다.
드디어 눈에 익은 길목이었다.
“어디로 가.”
“내려주세요.”
“어디로 가냐고.”
“내릴래요.”
세정은 고이는 한숨을 억누르며 차를 세웠다. 기다렸다는 듯 벨트를 풀고 몸을 돌리는 호연의 모습을 빤히 보다가 문을 잠가버렸다. 잠금을 해제하려는 행동을 몇 번 더 무력하게 만든 뒤에야, 호연은 고개를 돌려 세정을 바라보았다.
응어리진 짜증이 왈칵, 튀어나왔다.
“뭐 하시는 거예요?”
마주한 세정의 눈이 창밖보다 더 짙은 암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피곤인가, 짜증인가, 싫증인가. 돌연 그 깊이 모를 심해에 홀린 듯 빨려들 것만 같았다.
호연은 원피스 자락을 말아 쥐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간이 유독 길게 느껴졌다.
“너 나한테 흔들리지.”
그리고 나온 물음이 너무 예상외였다.
떠보는 음성치고 절반 이상의 확신을 담고, 말끝조차 올리지 않은 삐딱한 물음에 호연은 적당한 대답을 찾는 데 실패했다.
“……아니요. 전혀요.”
어렵게 내놓은 대답은 형편없었다. 세정이 피식, 웃었다. 다 안다는 듯이. 그렇게 웃으면서 핸들을 톡톡, 느긋하게 두드렸다. 그 여유로운 태도에 호연은 말을 덧댔다.
“기세정 씨한테 흔들릴 일 없어요.”
“누가 뭐래.”
“정말 없다고요.”
“알겠어.”
장난처럼 치부하는 그 옆얼굴에 침을 뱉듯 총을 쏘았다.
“……기세정 씨를 볼 때마다 제가 혐오스러워요.”
명중일까.
“아저씨가 생각나고 아주머니가 생각나요. 가짜 강민형한테 속았던 멍청한 기억도, 더 속고 싶다고 말했던 미련한 순간도 부끄럽고요. 원장님께 너무 죄송해요. 그래서 이런 제가 혐오스러워요. 기세정 씨와 결혼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모든 일이…… 너무 후회스러워.”
제 속을 낱낱이 드러내 보인 순간이었다.
반대로 쏘았나.
호연은 가슴이 아파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잠시간 눈을 깜빡거렸다. 흐려지는 시야가 개일 때까지 느리게 호흡했다.
“내가 이런데……. 기세정 씨한테 흔들려요? 웃기지 마. 난 기세정 씨가 매일 오는 것도 부담스러워요.”
“…….”
“미칠 것 같아요. 내가 살고 싶어서 도망친 거 알잖아요. 기세정 씨는 모르는 거 없으니까 알잖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당신을 떠났는지. 지금은 또 어떤 마음인지.”
“…….”
“이기적으로 굴지 말고 제발 좀 그만 괴롭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