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왔니?”
그러나 그게 부풀려진 기대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몇 초면 충분했다.
휘영은 한석의 아내, 지안의 살가운 인사가 닿는 곳을 응시했다.
그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고 느긋한 기색으로 만화원을 훑어보는 눈길은 누구도 헷갈리지 않을 분명한 지배자의 것이었다.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 까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리 착각도 아닐 것이다. 제 자랑을 떠벌리던 이들이 입술을 다물고 치솟게 두었던 턱을 내렸으니까.
휘영은 구석구석을 살피고 제게로 달라붙는 세정의 눈길을 오기로 피하지 않았다.
왜 너는 눈을 내리깔지 않지? 오만한 궁금증이 뒤범벅된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고 피식, 세정의 입술이 미끈하게 휘어졌다.
마치 너 따위가 눈을 내리깔지 않는다고 내게 무슨 자극이 되기야 하겠나 싶은 웃음으로…….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 수가 있을까.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동복 여동생의 사혼식을 뜯어말리지는 못할망정, 기어코 참석하는 그 의도는 뭘까. 사이코 같은 새끼.
“……씨이발.”
찐득한 욕설을 내뱉은 휘영이 지나친 열패감에 휩싸였다.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겨 만화원을 빠져나갔다.
오늘은 사혼식,
죽은 기소라의 영혼과 지청재의 영혼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이었다.
한규는 정말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을 올리는 것처럼 고무된 표정으로 하객들을 받고 있었다.
미친 거지.
잘 살라고 청재의 어깨를 힘차게 두들기는 하객들의 손길은 정말 미친 것처럼 보였다.
넋이 나간 지청재의 표정은 또 얼마나 가관이게.
누가 누구랑 잘 살아.
영혼과 영혼이 만나 잘 살아?
지랄.
세정은 몇 개의 문장으로 한규의 희망을 박살 냈다.
저한테는 하나뿐인 딸입니다.
부친이 무속인한테 그리 사정했다고 그랬나. 하나밖에 없기는……. 세정은 가볍게 조소했다.
한규에게는 은선의 배를 빌려 낳은 딸이 하나 더 있었다. 세정에게는 이복동생, 휘영에게는 동복동생인 사윤은 몇 번 얼굴을 보지 못한 사이였다. 사고를 꽤 치고 있다지. 아마, 휘영의 결혼식 날에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달가운 만남은 아니었다.
세정은 권태로운 표정으로 만화원을 장식한 꽃의 잎을 손가락으로 짓이겼다.
호연과 결혼했던 날이 떠올랐다.
“예뻤는데.”
결혼 전 첫 섹스를 잊어달라던 말에 꽤 짜증이 났던가. 입안으로만 굴리던 말이었다.
그 의미는 퇴색되었어도 순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웨딩드레스 안으로 누구보다 자극적인 몸을 감추고, 깨끗하게 웃는 말간 얼굴에 몇 번이나 꼴렸는지.
억지로 웃던 창백한 얼굴과 취기로 비틀거리던 마른 몸이 여전히 품에 안겨 있는 듯하다.
덧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웠다.
백호연과 더 많이 사랑할 수도 있었고, 그게 무기가 될 기억을 만들 수도 있었다. 백호연을 흔들 사랑의 기억을 더 갖고 싶었다.
백호연의 마음이 어느 정도 돌릴 수 없는 위치까지 가 있는 걸 알았다.
제 마음이 어느 정도 돌릴 수 없는 위치까지 가 있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해보자고.
백호연은 피아노를 잃은 뒤 처음으로 다시 꾼 꿈이다.
꿈을 꾸지 않아보려고 불면을 앓았다. 헤매었다. 네 마음을 이해해 보려고.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네 마음을 헤아리느라고.
나는 네 말마따나 이기적인 새끼인데. 원래 그런 새끼인데.
싫다고 한 걸음 물러나면, 두 걸음 다가가고. 두 걸음 물러나면 그 뒤에 불을 질러버릴 거다.
그렇게 시작한 사랑은 포기하지도, 놔주지도 않을 테다.
너는 이제 내 무릎을 꿇어서라도 쟁취하고 싶은 유일한 꿈이니까.
씨발…….
입 모양으로 욕을 읊조리던 청재는 세정의 눈길이 제게 머물러 있자, 눈에 띄게 당황했다. 특유의 무표정한 눈길이 위에서 아래로 쭉, 몸선을 쓸어내렸다. 청재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축하한다는 인사말과 악수를 받았다.
신경이 쓰이는 게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재킷 안쪽이 소리 없이 울리는 중이었다.
계양 실업의 바지 사장으로 앉혀둔 오민규가 사라진 탓이었다.
그것도 투자금을 몽땅 들고.
청재는 한 번 더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욕설을 단속했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덜컥, 울고 싶었다.
씨발……. 진짜 어디서부터 좆같게 꼬였을까?
북두 그룹도 제가 있을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른 뒤 적당하고 한적한 북두 그룹의 계열사를 하나 받아 계양 실업이라는 기업을 키울 생각이었다.
바지 사장으로 뭣도 모르는 새끼, 오민규를 앉혀두고 키울 만큼 키운 다음 그 자리에 앉아, 대표님 소리나 들을 생각이었다고.
이게 다…… 없는 새끼들이 쥐어짜 투자를 해서 그렇다.
청재는 TV에서 계양 실업 이야기를 들을 때면 심장이 내려앉고 터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직은 저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다니지만…….
저를 믿고 투자하라고, 아무런 경력이 없는 오민규는 명의만 내준 바지 사장이고, 제가 실질적인 대표라고, 북두 그룹의 사위며 SQ 텔레콤의 막내아들인 제가 보증하는 기업이라고……. 수많은 기업인을 포섭한 건 자신이었다.
아니, 그 새끼가 돈 물고 튀지만 않았어도. 당장 돌아오는 어음을 막을 돈도 없다고 불안에 떠는 투자자 새끼들을 어르기만 했었어도…….
살인만 안 났으면 어떻게든 덮는 건데, 살인만 안 났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현소예가 피해자들을 긁어모아 데이트 폭력이니, 뭐니, 언급하며 경찰에 신고하지만 않았어도.
너무 많은 '만약'이 밀려들었다.
거기에 씨발, 사혼식?
고개를 내린 청재는 시뻘게진 눈으로 한규를 노려보았다.
기소라가 아니라 저 노친네를 죽여야 했는데.
울화가 치밀었다. 소라를 죽인 범인이 세정이라며 떠들던 휘영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병신 새끼.”
기휘영은 병신 새끼다. 병신.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여, 지껄이길.
참을 수가 없어 낮게 중얼거렸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씨발, 진짜……. 이게 다 기소라와 엮인 순간부터 지랄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는 기소라의 영혼까지도 훼손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게 했다.
* * *
순조롭게 진행되던 사혼식은 무속인의 말 한마디로 그 기류가 처참해졌다.
“신부 기소라 양의 영혼이 해당 위치에 없습니다.”
무속인은 사혼식을 진행하려거든 영혼의 위치가 분명해야 한다고 사전에 주지시켰다.
소라의 영혼을 상징하는 유골은 북두 묘원에 있고, 청재는 만화원에 서 있었다.
그 말인즉 소라의 유골이 북두 묘원에 없단 소리라, 만화원이 발칵 뒤집혔다. 급히 북두 묘원으로 가 무거운 석물을 옮겨 석실을 확인한 결과, 정말 유골이 도난당한 채였다. 한규가 다시 한번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럴 리 없다던 묘원 관리인이 아연실색하여 CCTV를 살피고 북두 묘원의 모든 석물을 뒤집어 석실을 살피는 대소란이 있었다.
그러곤 정확히 소라의 유골만이 사라져 대다수가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는 표정으로 근심했다.
또한 한 사람을 의심하는 기이한 정적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그중에 휘영과 청재, 세정만이 각기 다른 묘한 표정으로 있었다.
“일단 다들 돌아가 보세요.”
한규는 쓰러져 응급실로 갔고, 사혼식은 파투가 났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세정이 쉽게 정리했다. 모두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동안 그 누구도 청재에게 고생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청재를 의심하고 있으므로.
청재는 보이지 않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런 기괴한 짓은 다 가짜라고. 무속인 그딴 건 외국에는 없는 직업이라고. 정신병 걸린 사람들이라고.
그러면서 혹시나 무속인의 말마따나 영혼이 해당 위치에 없으면 사혼식이 성립될 수 없다고 해, 유골을 빼돌렸다.
그런데 이게…… 들켜?
온몸에 끼친 소름이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쭈뼛 선 털들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청재는 제가 침조차 삼키지 않았음을 자각했다. 꿀꺽, 울대가 오르내리는 게 심장 같았다.
“가.”
세정이 무심하게 턱짓하는 것을 기다렸다는 듯 청재가 헐레벌떡 만화원을 빠져나갔다.
다시 두 사람이 남았다.
“너야?”
휘영은 꼿꼿한 확신이 굵직한 눈으로 세정을 노려보았다. 세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유유히 만화원을 빠져나가는 세정의 어깨를 휘영이 거칠게 잡아 돌렸다.
“너냐고, 이 씨발 새끼야!”
만화원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강하게 쏘아붙이는 고성이었다.
세정은 짜증이 난 듯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휘영의 손이 닿은 어깨를 내려다보았다. 슬그머니, 그 손이 떨어졌다.
“왜.”
그게 휘영에게는 긍정처럼 들렸다. 발을 크게 구르며 몸을 쥐어짜듯 비틀었다가 언성을 높였다.
"기소라 유골 훔친 거, 네가 북두 묘원에 혼자 남았던 날, 그날이지? ……이거 미친 새끼 아니야?"
이게 또 무슨 개소리일까.
세정은 어이가 없는 눈으로 휘영의 발악을 지켜보았다.
“기소라 유골 어디 있어? 누나 유골 어디 있냐고.”
다시 달라붙어 이제는 세정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승부수를 띄웠던 건 맞다. 사혼식을 계획한 것도, 유골을 훔친 것도 세정의 짓이었다.
대신 그곳에 유골과 흡사한 것을 소라의 것처럼 두었다. 그러니 청재가 훔친 것은 소라의 유골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과의 결혼이 달갑지 않을 수는 있지만, 유골을 훔치진 않지.
청재는 소라의 가짜 유골을 제집에 숨겼고, 그건 지청재의 모든 공간을 수사할 권리가 된다.
마약을, 계양 실업에 관련한 정보를, 혹시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 소라의 의문사와 관련된 것을 계양 실업과 관련한 정식 수사가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빼돌리기 전에 뒤져볼 수 있겠지.
“야!”
세정은 잡념을 지우며 제게 입을 맞출 듯 가까이 다가온 휘영을 응시했다.
그게 이해가 안 됐다. 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소라는 대체 기휘영에게 무슨 친절을 베풀었길래, 맨날 눈깔이 돌지?
세정은 제 멱살을 휘어잡은 휘영의 손목을 아프게 쥐고 뜯어냈다.
“지금 이 꼴이.”
아아, 앓는 소리를 참으며 사리문 휘영을 오연하게 내려다보았다.
“내가 기소라를 좋아했던 걸로 보이나.”
“…….”
“그렇다면 유감인데. 지금 내 쪽에서는 왜 기휘영, 네가 기소라를 좋아했던 것 같지?”
“씨발 새끼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양, 휘영이 눈썹을 휘며 다시 달려들었다. 세정이 그를 가볍게 바닥으로 넘어트리며 목을 밟을 듯 섰다.
그 치욕적인 자세를 견디지 못한 휘영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냥……! 누나는 나한테 하나뿐인 가족이었던 거지, 이 씨발아!”
아악! 몸을 뒤흔들며 소리치는 휘영의 모습은 세정을 잠시간 멍하게 만들었다.
“그냥 여기서 내 하나뿐인 가족이었다고……. 시발, 좆같아…….”
쓴웃음이 났다.
세정은 천천히 휘영의 목에서 구두를 떼었다. 그러곤 휘영의 뺨으로 길게 난 상처를 보았다.
“적당히 까불어. 결혼식 날에 터진 얼굴로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휘영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지랄. 지가 이렇게 만든 거면서.”
“사진 평생 남아.”
세정은 걸음을 돌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