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살인 방조 및 총 13개 혐의로 구속 수사 중인 엔마트 백석훈 대표의 아내, 허연실 씨가 1년 전 도산한 광고 대행사 ‘큐밋’의 주가 조작 당시,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은 정황이 포착되어 자택을 7시간째 압수 수색 중입니다.
또 민경당 오현준 의원의 아내, 백여진 씨도 동일한 혐의를 받아 입원 중인 허연실 씨보다 먼저 비공개 소환되어 조사받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따금 듣고 싶지 않은 소식들이 전달되는 날들이 있었다.
“쌍놈의 집안이구먼.”
속칭 ‘엔마트 게이트’가 열렸다고.
호연은 슈퍼 주인 할머니의 혀 차는 소리를 듣지 못한 척했다. 계속해 연루된 이들을 읊는 기자의 말도, TV 화면에 크게 클로즈업되는 석훈의 얼굴까지도 보지 않으며 사탕들을 내밀었다.
차라리 라디오면 나았을까.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면.
“계산해 주세요.”
“오야. 담아주까?”
“네, 담아주세요.”
[‘엔마트 게이트’는 정치면으로도 확산되어…….]
기세정과 결혼하면서 나는 또 얼마나 저들의 범죄에 기여했을까. 가담하지 않았더라면 교은은 더 일찍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또 오그라.”
듣고 싶지 않아도, 보고 싶지 않아도 불가항력인 것들이 있었다.
“많이 파세요.”
교은의 죽음을 놓고 치밀하게 고민했던 여름밤, 만약을 그리며 뒤척였던 날로부터 축적된 잔여물은 마음을 죄책감으로 뒤덮었다.
남자와의 결혼이 남에게 빚을 지지 않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었나. 아니, 남자와의 결혼은 제가 빚진 것 중에 가장 거액의 빚을 지는 시간이었다.
피해자와 피해액이 늘고, 교은이 죽고.
돌이킬 수 없는 일로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가 숨조차 매캐하게 느껴졌다.
문을 밀고 나온 호연은 푹푹, 살을 찌르는 더위에 그 예민하던 고양이들까지 그늘을 찾아 늘어진 꼴을 보았다.
그 옆에서 상자를 접는 일로 용돈을 버는 할머니들이 나비야, 나비야, 괭이 쉐끼들아……. 하며 평상에 굴러다니던 자두로 고양이들을 현혹하는 모습도 보았다.
바야흐로 충만한 수확의 계절이었다. 소예가 걱정하던 대로 이번 자두 농사는 풍년이라, 흠 없이 결실한 자두들이 너무 많았다. 제값을 받지 못할 것이라 그랬다.
한해를 꼬박 공들여 키운 자식 같은 자두들이 공급과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출하를 조절하고 과격한 농가는 그 자식들을 고스란히 땅에 묻어버리는 잔인한 시기도 곧 다가온다고.
여름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한없이 잔인한 계절이었다.
그 양면성을 이제야 깨달았다.
호연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햇살 아래를 걸었다. 남자가 준 발찌가 유난히 무거웠다.
모퉁이를 돌아 물끄러미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을 받으면 더 그랬다.
왜 하필 매장에 가지 않으면 풀어낼 수도 없는 이런 발찌를…….
족쇄 같았다. 아니, 족쇄다.
세정은 이 주째 호연의 작업실 앞 카페에 출석했다. 그렇다고 먼저 아는 척을 해오는 건 아니라서 그를 외면하면서도 곤혹스러운 건 호연 쪽이었다.
언젠가 그에게 오지 말라고 소리친 적도 있었으나, 한가로이 커피나 한잔하고 가라는 말에 전의를 상실했다.
화를 내고 빌 때는 언제고, 이제는 여유로움이 가득한 태도였다.
호연은 작업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닫았다.
그 일련의 과정 사이로 힐끗, 뒤를 돌아 세정을 바라보았다.
세정은 잠시간 저를 봐주지도 않는 매정한 호연의 뒤태에 무언가 쓰인 게 있는 것처럼 응시하다가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내렸다.
까딱거리는 발이 오만했다. 호연은 부러 문에 설치한 커튼을 끝에서 끝으로 당겼다. 내부가 훨씬 어두워졌다.
회사는 어쩌고 오는 건지. 간간이 뉴스를 볼 때면 남자의 성과들이 줄지어 나오곤 했으니 여기서 한가로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사탕은?”
“……어? 어, 사탕. 여기.”
호연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씹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손톱이 짤막해지다 못해 깨물린 속살이 뒤늦게 쓰라렸다.
사탕은 며칠 전부터 미술학원에서 초등부 아이들을 봐주기 시작한 소예의 심부름이었다.
내가 무슨 걱정을 하는 거야.
“저 남자 또 있네.”
호연이 도피하듯 테이블로 가서 앉는 동안 소예는 창밖을 내다봤다.
그 말에 호연은 잠시간 다시 넋을 놓았다.
제가 이 주 전 그 밤에 한 것은 명료한 거절이었다. 연거푸 사랑이라던 남자를 내쫓고 문을 걸어 잠갔다. 남자가 비에 젖든, 말든 무시하는 밤은 아주 길고 아팠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어 데리러 온 소예의 잔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돌아갈 때도 내쫓긴 모습 그대로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한참 가슴이 이상했지만…….
끝일 거라 믿었다.
그건 어떤 걸 근거로 기대한 얄팍한 믿음이었나. 아니면 내가 남자를 잘 몰랐나. 그렇게 해석하고 싶었나.
세정은 호연의 작업실 출근 시간보다 이르게 카페테라스에 진을 치고 앉아 있다가 그녀가 퇴근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서울로 돌아갔다.
그게 이 주째였다.
소예는 얼큰한 국물을 들이켠 사람처럼 크으……. 감탄을 흘렸다. 드물게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중얼거렸다.
“약간 그런 건가? 카페 사장님이 고용한 모델 같은 거지. 잘생긴 남자 있으니까 들어와서 커피 마시고 가세요. ……연예인이나 하지.”
그 밤의 애원을 씻은 남자의 얼굴이 소예의 환심을 샀다. 소예의 환심만 샀냐, 눈이 마주치는 이들의 호감을 다 샀다.
남자는 알까. 당신이 누군가의 유희로 소비되고 있다는 것. 당신이 이 작은 마을에서 유명 인사가 되고 있다는 것.
소예가 시사에 관심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전국 소식에 빠삭한 사람들조차 남자가 TV 속 북두 그룹의 후계자라는 생각을 못 했다. 그런 사람이 이곳에 있을 리가, 그랬다.
“근데 여기 근처에 회사도 있었나.”
을언면과 어울리지 않는 세정의 차림을 지적하는 의문에 호연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의심 선상을 빠져나갔다.
“너 기진 갤러리 언제까지 마감이라고?”
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실정이 문제였다.
“23일.”
“근데 아직 저래?”
작업하던 그림을 파기하고 도통 작업이 손에 잡히지 않아 콩테로 장난질해 놓은 수준인 것을 지적하는 거였다.
“나도 알아…….”
기진 갤러리와 약속한 마감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호연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했다.
작업실을 안 나올 수는 없는데, 나와도 남자가 신경 쓰여 작업이 되지 않는 것. 정말 최악이었다.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그림 더 안 나온다.”
“방금 네가 스트레스 준 거야.”
“미안. 난 이미 그려놓은 줄 알았지.”
“두 번째 스트레스야, 이거…….”
호연이 죽는 소리를 내며 테이블로 길게 엎어졌다.
이내 괜찮아, 괜찮아. 소예는 무엇이 괜찮은 건지 끝내 말하지도 않은 채 사탕을 들고 도망가듯 사라졌다.
호연은 꽉 맞물린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결처럼 요동치던 커튼도 동력을 잃어 차분해졌다.
괜찮은 게 하나도 없었다.
자신의 법적 가족인 이들이 하나씩 잡혀 들어가는 일이 달가울 리가.
“내 시간은 잘 쳐줘 봐야, 네가 떠났던 그날이야.”
남자는 자신의 시간은 잘 쳐줘 봐야, 내가 떠난 그날이라고 그랬다. 나라고 다를까. 다르지 않았다.
호연은 지난날들의 죄책감까지도 빚처럼 안고 있었다.
정상적인 사랑을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리 제가 남자를 사랑하고, 남자가 아무리 저를 사랑하여도 이 관계는 정상적인 사랑이 될 수 없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남자를 보면 계속 석훈이 생각나겠지. 가짜 민형이 생각나겠지. 죽은 교은이 생각나겠지.
그러다 보면 자기혐오의 그릇에서 넘친 혐오가 제게 가장 다정한 사람을 향해 칼날처럼 쏟아져 그를 베겠지.
여전히 남자는 제게 애틋하고 소중하기에 사랑을 그만하고 싶었다.
견디다 견디다……. 결국 못 버텨 피를 흘리고 돌아설 남자를 또다시 원망하고, 실패한 사랑에 무너지는 일은 지금 겪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자.
남자도 언제까지나 저러진 않을 것이다.
아주 계산적인 남자니까 제가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정신이 드는 순간, 금방 그만두고 어느 날 훌쩍, 사라질 것이다.
어쩌면 속초에서 맞선을 봤던 여자와 다시 반지를 나누어 끼겠지. 아무렇지 않게 식장으로 들어가 입맞춤을 나누겠지. 가까운 미래에 아이도 하나 낳겠지.
그렇게 멀어질 것이다. 오랜 기억은 낙장처럼 탈락하고 어떤 날 돌아보았을 때 그런 여자가 있었나, 싶어질 정도로 앞만 보고 나아갈 것이다.
당신의 보장된 미래에 내가 없을 거라는 유구한 생각.
감히 한 번도 꿈꿔보지 않은 미래만큼은 떠올려도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 * *
휘영은 찢어져 꿰맨 볼을 쓰다듬었다.
배에 칼이 꽂히는 일만은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온몸이 두들겨 맞은 흔적으로 만신창이였다.
조직적인 깡패들에게 흠씬 처맞으면서 조금 천진난만한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북두 그룹 후계자라는 새끼가 이런 더러운 것들이랑 손을 잡아도 돼?
“아…….”
혀로 볼을 미는 습관적인 행동에서 극렬한 통증이 일었다.
제 태생이 더럽다는 걸 인정할 때도 됐는데.
병원에서 정신 잃고 달려들던 때를 둘째 치고 올바른 정신으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상해를 가한 것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네까짓 거 죽여도, 죽을 정도로 두들겨 패놔도 나는 아무런 벌을 받지 않는다고 압도적인 위치를 공고히 하는 태도.
여차하면 죽일 수도 있으니 납작하게 바닥을 기라는 수위 높인 경고.
제가 직접 손을 쓰지 않고 더러운 자들의 손을 빌려 폭력을 가하는 데서 다시 한번 너는 천것이다, 찍어 누르는 압력.
……그리고 모든 일을 조금의 뒤탈도 없이 깔끔하게 처리하려는 기세정에게 백호연이 얼마나 큰 약점인지 알려주는 동요.
가장 마지막 의미가 꽤 만족스러웠다.
기세정이 사내에 부재했다. 임원진들의 입까지 틀어막고 숨기는 눈치지만, 훤했다. 서신원만 개고생을 하고 있었다.
이에 세정은 제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직감한 사람처럼 밀리언 리조트 인명 사고를 들어 직무 정지라는 징계를 내리기는 했지만…….
출근하지 않고도 휘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굉장히 많았다.
기세정과 기한규의 대립이 극심해진 지금, 여차하면……. 불변의 북두 그룹 후계자인 기세정을 끌어내릴 수도?
휘영은 지난날, 제게로 다가와 제가 후계자로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일러주던 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은 절대 될 수 없고, 할 수 없다고 규정지은 선을 언젠가 슬그머니 문지르고 있었다.
욕심이 움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