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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86화 (86/98)

제86화

‘경상북도 달재군 을언면 시나로 141, 금경린 피아노 교습소’

세정은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상가에서 새어 나오는 여린 불빛을 응시했다.

서울에서 을언면으로 내려오는 동안 술이 깨고 이성이 돌아왔다.

그랬으면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질 않았다.

저기에 네가 있다. 백호연이 있다, 저곳에. 네 삶의 기록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던 이곳에, 당신이.

머릿속을 알코올로 닦아낸 듯 잡스러운 생각들이 모두 휘발되어 그따위의 것들만 여백을 메웠다.

할 말은 없고 그냥 보고 싶었다.

“가보세요.”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세정은 기사가 건네주는 우산을 받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걸음을 떼려는데,

“저 봄성지에서 카페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아침에 놀래켜서 죄송하단 뜻으로 가져왔는데 괜찮으실까요?”

“아뇨.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고, 너무 많고…….”

눈앞으로 백호연과 낯선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호연은 당황스럽다는 듯 살짝 손을 내젓다가 이내 남자의 손, 그 옆의 종이 가방을 움켜쥐며 어렴풋이 웃었다.

분명 그 하얀 얼굴이 웃고 있었다.

세정은 저도 알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눈매를 어그러트렸다.

이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나.

단지 살기 위해 도망쳤다고.

네가 다른 남자와 웃고, 손이 스치고, 나중을 약속하는 것 따위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뼈마디가 벌어지는 통증이 들었다.

너는 피아노를 곁에 두고도 내 생각을 하지 않나. 그 정도로 내가 사소한가.

아,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백호연을 종이 한 장짜리 인생이라며 비웃었던 시절에서 조금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또 멋대로 넘겨짚고 있었다.

너도 행복하지는 않을 거라고. 너도 못내 힘겨울 거라고. 살고자 나를 끊어내고 싶어도, 쉽게 끊어내지는 못할 거라고. 네 인생에 나는 제법 클 거라고.

다 내 질긴 착각이었지.

세정은 실소했다. 눅눅한 습기 탓에 가라앉은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삐이―

이내 좆같은 성질머리를 닮아 좆같이 발악하는 좆같은 귀를 무시하며 걸었다. 남자의 등을 바라보고 선 백호연을 돌려세우고 싶었다. 저 새끼를 어떻게 죽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간 스쳤다.

세찬 빗소리가 기척을, 어둠이 몸을 감춰주었다. 세정은 큰 보폭으로 간격을 좁혔다. 닫히는 문을 잡고 더 넓게 벌렸다.

“…….”

“…….”

보고 싶었지, 이 얼굴.

등줄기로 싸한 전율이 흘렀다.

세정은 뒤틀린 시선에 호연을 담았다. 제 입꼬리가 솟는 만큼 호연의 입꼬리는 꺼졌다.

저 새끼한테는 웃고, 나한테는.

“……가세요.”

저 새끼는 또 보고, 나는.

“싫은데.”

멋대로 들어갔다.

“들어가지 마요.”

호연이 붙들어 잡은 손목을 비틀어 뺐다. 당황하여 허공에 놓인 손을 그러잡았다. 반대편 손에 들린 명함을 가져와 입에 물고 찢었다. 바닥으로 두 동강 난 명함이 흩날리자, 호연도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세정은 그대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지 말라고! 놔요!”

세정은 팔뚝을 내리치는 손길을 무시하며 공간을 쓱, 훑어보았다. 형편없는 공간이었다.

놔, 놔아! 놔요! 귓가로 쏟아지는 소리보다 이명이 커지는 순간이 있었다. 세정은 그제야 손을 놔주었다.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그림을 보고 섰다.

백호연의 그림 같지 않았다. 이렇게 제한적인 색의 사용과 두터운 질감은 우울하고 불안하며 심장을 움켜쥘 정도로 두려웠다.

세정은 심장이 덜컥, 발밑으로 꺼지는 아뜩한 감상 속에 몸을 돌렸다.

호연은 제 두 손을 등 뒤로 감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러 갈래의 감정이 뜨겁게 뒤엉킨 눈으로 세정을 노려보았다.

다 죽어가는 그림과 다르게 이 눈은 살아 있었다.

“계속 그렇게 봐.”

그래, 아무것도 섞이지 않아 죽은 눈으로 나를 보지 말고 차라리 죽도록 증오하는 눈으로 나를 보라고.

나는 그게 더 견딜 만하니까.

그런데 그 눈의 빛이 금방 꺼져버린다. 세정은 점점 초조해졌다. 그 빛을 살리고 싶은데.

“……정말 끝까지 무례하시네요.”

“진짜 무례한 게 뭔지 보여줘?”

세정은 허리를 굽혀 발목을 가린 호연의 원피스 끝자락을 들어 올렸다.

“미쳤어요?”

밀치는 손을 다시 붙잡은 세정은 호연의 발목에 맺혀 있는 발찌를 확인했다.

“……서울에 돌아가면 풀 거였어요. 혼자는 못 푸는 거니까. 도망칠 때는 생각도 못 했죠.”

자극을 가할 때마다 호연의 눈빛에 빛이 돌았다가 도로 흩어졌다.

“괜한 거에 의미 두지 말아요. 아무 의미 없으니까.”

“그래서.”

“혼전 계약서랑 이혼 합의서는 서 비서님 통해서 보내시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요.”

“나는 끝낸다고 한 적 없는데.”

호연은 차마 생각하지 못한 말인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러곤 코끝까지 밀려오는 술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몰랐을까.

“술 마셨어요?”

“진작 깼지.”

“아니요, 기세정 씨 술 안 깼어요.”

“장담하네.”

“그게 아니면 기세정 씨가 무슨 염치로 내 앞에 나타나.”

날 선 적막이 곳곳에 칼날처럼 놓였다. 호연은 먼 데로 시선을 버려두었다가 다시 힘주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기세정 씨 때문에 나는 원장님 임종도 못 지켰어요. 며칠은 살아 있었다는데. 의식은 없었어도, 칼 맞고도 며칠은 살아 있었다면서!”

어느 순간, 호연은 남자가 크게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올바른 방향의 분노는 분명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 분노는 교은을 살해한 종영에게로 가야 옳고 세정에게는 그를 숨긴 만큼의 원망만을 가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명백한 자기혐오 속에 누구도 품고 싶지 않았다.

사랑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사랑하고 싶지 않았다.

병든 사랑 같은 건 그만하고 싶었다.

“난 기세정 씨가 너무 무서워요.”

그 말을 듣는 세정의 눈이 짙어졌다.

“사랑한다면서…….”

“유치한 사랑 타령은 백호연 씨가 먼저 했지.”

호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치해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했구나.

순식간에 진창 속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분명 단단한 건물 아래 있는데, 빗속으로 내몰린 것 같았다.

그날 맞았던 비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적시고 머리가 빠개질 듯 울렸다.

“나는…….”

호연은 울컥, 차오르는 설움을 억눌렀다.

나는 내 모든 걸 걸었던 일이라고.

혐오스러워하는 눈길을 보내는 남자에게 나신으로 안겼다. 아무렇게나 만져대는 손에 몸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를 죽였던 밤들이다.

그런데 그게 유치하다고.

“애초에 백호연 씨는 날 사랑 안 했잖아요. 먼저 그따위 거짓말로 한 번만 속아달라고, 도와달라고 사정한 건 백호연 씨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나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잖아, 당신은.

“그렇게도 간절하게 나를 속이려 한 건 당신이면서 왜 이 끝에는 나를 원망할까.”

그저 사실을 나열하는 나직한 말에 가슴이 시큰거렸다. 가슴에 생채기가 났다.

알고 있었다. 남자가 가만히 이 원망을 참고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

다 알고 있던 건데…….

“평생 모든 것에 속고만 살았으면서, 나한테도 거짓으로만 사랑을 속삭였으면서 왜 당신은 나한테만 그렇게 분노하지. 나는 당신을 속이면 안 됐나.”

모순적이었던 마음을 인정한다.

나는 그냥 원망하고픈 사람을 찾고 있었고, 당신은 좋은 과녁에 불과했다고.

당신을 사랑하면서 초라해졌던 날들이 많고 오래 아파한 밤들이 있고 그런데도 구질구질하게 아침을 맞는 못난 새벽을 거치며 당신을 미워하는 감정으로 덮어야 하루를 살아낼 수 있었다고.

“나도 나쁜 새낀데, 백호연 씨도 좋은 여자는 못 돼.”

세정에게 한 꺼풀씩 벗겨 모두 내어주었던 영혼이 이 순간 파괴되었다.

“……그래요.”

지친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더럽고 나쁜 기억으로 남고, 이제 끝을 내자고. 잘잘못을 따지는 과정은 지루하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더는 이렇게 마주할 필요도 없겠다고.

당신을 여러 번 미적지근하게 사랑했던 날들도 오늘로 끝을 내자.

그러나 아직 준비되지 않은 말들이었다. 목구멍이 뜨거웠다. 뼛속 깊이 사무친 남자의 언어가 아팠다.

“기세정 씨.”

힘이 빠진 가냘픈 음성이 끊겼다. 호연은 흔들리는 눈으로 세정을 올려다보았다. 맞비벼지는 시선이 단단했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건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내가 없어 무너진 밤이 있을까. 잠 못 이뤄 뒤척인 밤이 있을까. 차라리 서로를 속여 다행이라고 안도하던 밤이 있을까.

눈을 돌리는 곳마다 내가 보이는 지독한 나날들이 있었을까.

당신은 없었을 거야.

당신은 지독한 사람이니까.

호연은 손을 들었다. 나쁜 말만 내뱉었던 세정의 입술을 더듬었다. 세정은 사나운 인상을 누그러뜨리며 호연을 응시했다.

호연은 쓰게 웃었다.

저를 덥게도, 상처 입히기도 했던 그 입술에, 미치도록 열망했던 나날들이 눈앞으로 지나갔다.

“나는 당신을 정말 사랑했어.”

“…….”

“그것만은 진심이에요.”

호연은 입술을 가볍게 누른 뒤에 손을 떼어냈다. 번울한 가슴 속에서 철썩철썩, 속을 치는 파도를 참았다. 몸이 무너질 것 같았다.

“끝나는 마당에 믿지 않는대도 할 말은 없지만, 우리는 이렇게 끝을 내고…….”

떨어지던 손이 붙잡혔다. 세정은 우악스럽던 악력이 아니라, 부드럽고도 다정하게 손가락 사이사이로 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런 기분은 이상했다. 호연은 손을 빼내려 강하게 당겼다.

“누가 끝을 내냐고.”

그러나 그것보다 강한 힘이 저를 당겼다. 짧은 탄성과 함께 눈앞이 안 보였다. 코끝으로 비 내음에 섞인 남자의 체취가 진하게 요동했다.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연이 몸을 비틀수록 세정은 강하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호연이 부딪치듯 세정의 가슴에 안겼다.

호연은 몇 번이고 부술 듯이 세정의 몸을 아프게 내리치다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지면을 강타하는 빗줄기처럼 미친 듯이 튀어 오르는 남자의 심박에 잠시간 머리가 뿌예졌다.

무의식 너머로 흘러가는 말들이 멍한 정신을 훑고 갔다.

“끝내려고 한 적 없다고 했잖아.”

세정의 거친 음성이 목구멍을 다 긁고 나온 것처럼 갈라졌다. 그 차갑게 식어버린 말에 가슴이 선득하게 얼었다.

호연은 마른 입술을 빠끔거렸다. 그러나 온전한 소리로 돌아 나온 건 없었다.

“선인장이 죽어가, 호연아.”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 주었다.

하필 이런 순간.

세정은 미친 듯한 발악이 멈춘 호연의 몸을 부서져라, 껴안았다. 호연보다 한참 더 큰 세정이 그녀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물을 주는 법도 모르는데.”

세정은 절박하게 빌었다.

“네가 다시 와서 돌봐주면 안 될까.”

호연은 세정의 음성이 살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문신처럼 뜨겁게 새겨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못되게 말해서 미안해.”

“…….”

“내 시간은 잘 쳐줘 봐야, 네가 떠났던 그날이야.”

“…….”

“내가 멈춰버렸어…….”

“…….”

“사랑해.”

살이 찢기는 듯 아팠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아픈 고백이었다. 꽃 무더기로 온몸을 흠씬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듣는 내가 이렇게 아픈 고백인데, 남자는 어떤 처참한 얼굴로 돌아오지 않는 사랑을 고백하고 있을까.

“제발.”

나는 또 어떤 얼굴로 남자의 고백을 듣고 있을까.

“그러니까 끝이라는 말 좀 하지 마, 씨발…….”

“…….”

“당신이 죽을까 봐, 무서워.”

당신의 불안을 깊이 머금는다. 나도 당신이 죽을까 봐, 무서워. 왜 우리는 서로가 죽을까 봐 두려워하는 사랑을 하나.

호연은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물기를 애써 외면했다. 끝내 소리 없이 들먹이는 남자의 어깨까지도 무시했다. 그를 마주 안지 않은 손가락을 아프게 말아 쥐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니야.”

호연은 비정상적이고 기이한 관계부터 부정했다.

“사랑이야.”

세정은 호연을 으스러질 듯 고쳐 안으며 부정을 부정했다.

“아니에요.”

“사랑이야…….”

호연은 입 안쪽 여린 살을 아프게 씹었다.

나만의 망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의 망한 사랑이었다는 게 나는 왜 더 아플까요.

잔향 같은 슬픔이 오래 부유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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