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말아 빈손을 꽉, 움켜쥐었다. 호연은 몸 깊은 곳으로부터 발화된 불 탓에 붉어진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올 사람이 없는데. 간접 등 불빛이 밖까지 새어 나가는 정도인가.
호연은 몸을 일으켰다. 누군지는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아서. 그러면서도 괜히 슬금슬금 자세를 낮추어 걸어갔다. 문에 난 틈새로 슬쩍 밖을 내어보았다.
“어…….”
호연이 잠가두었던 문을 열었다.
빗소리가 번졌다. 공기가 한순간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확, 열이 올랐던 가슴도 차츰 온도가 떨어졌다.
호연은 한층 고요해진 눈을 들었다.
“아침에…….”
황망한 눈으로 피아노 교습소가 아니냐고 물었던 그 남자였다.
“네, 죄송해요. 아침에는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세찬 비에 옷자락이 살짝 젖은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밖에서 불빛이 보여서…….”
아, 불빛이 새어 나가는구나.
예상한 그대로였다. 호연은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봄성지에서 카페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아침에 놀래켜서 죄송하단 뜻으로 가져왔는데 괜찮으실까요?”
남자가 종이 가방 속에서 크루아상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 안으로 넘치도록 많은 디저트가 보였다.
“아뇨.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고, 너무 많고…….”
종이 가방이 또 두 손 가득이라, 호연이 손을 내저었다. 이런 건 별로 내키지 않았다.
“……아, 그러세요. 친구분이랑 나눠 드시라고 챙겨온 건데, 너무 많군요…….”
여전히 착한 사람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게끔 친절한 어투가 바닥으로 질질, 끌렸다. 선한 얼굴이 시무룩하게 기울었다.
호연은 마지못해 한 손을 뻗어 종이 가방을 하나 들었다.
“이것만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반달처럼 접힌 두 눈에 기쁨이 흘렀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합니다. 카페는 봄성지 어디로 가면 있어요?”
“봄성지 카페 ‘커민’이에요.”
남자가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져 지갑 속에서 명함을 꺼내 건네었다. ‘이차민’ 이름 끝에 개화한 자두나무가 그려져 있었다.
“친구랑 같이 갈게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어…… 맛있게 드시고요.”
대화를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들처럼 맛있게 드세요, 맛있게 먹을게요, 를 몇 차례나 반복하고서야 호연은 멀어지는 남자를 보았다.
분명 느껴졌다. 명료한 호감이 겉돌던 분위기가.
이상하지. 예전에는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제 모습도 어설프고 서툴렀기에 눈에 들어오나.
기세정의 눈에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지.
뒤늦게 수치스러워도 아무 의미가 없지. 후회되는 일을 고칠 힘도 없지. 거대한 기억 앞에서 또 한 번 무력함이 밀려들었다.
호연은 잡고 있던 문을 놓고 발을 뒤로 물렀다. 닫혀가는 문 앞에서 종이 가방을 열었다.
“…….”
그러나 그 속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가세요.”
넓게 벌어진 문으로 들이치는 빗줄기가 매서웠다. 쩍, 갈라지는 세상이 무섭게 진동했다. 어지러운 비 내음 사이로 익숙한 체취가 파고들었다. 호연은 빠르게 숨을 참았다. 치밀하게 마음을 단속했다.
“싫은데.”
아,
시선이 맞물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빗줄기처럼 꿰뚫리고 번개처럼 갈라지고 천둥처럼 뒤흔들리도록 두는,
기세정이 왔다.
* * *
아침나절 험한 비가 내리더니 명균의 기일에만 이루어지는 추모 예배가 시작되기 전에 그쳤다.
장소는 북두 그룹 일원의 유골을 봉안한 북두 묘원이었다.
죽을 날을 받아둔 사람처럼 고집스레 외국의 묘지를 보러 다니던 명균이 어느 날 공사를 지시하고 그대로 끌어 묻힌 곳이었다.
그만큼 지독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이 제 손에서 조금도 벗어나는 꼴을 못 보고 조금도 틀어지는 걸 못 견디는 성미였으니까.
세정은 고개를 삐뚜름히 내려 모친의 묘문을 읽었다.
‘빛이 깃들었던 자리’
그 밑으로는 모친의 생몰 연도가 적혀 있었다.
빛이 참 짧게도 왔다 갔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는 언젠가 한규가 묻힐 예정이었다.
그런 거였다.
은선이 밤마다 한규에게 저도 북두 묘원에 묻히고 싶다고, 제 흔적을 남기고 싶다고 구슬려도 그는 그곳에 묻힐 수 없고, 소희가 한규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나는 너희 가족묘에 절대 묻히지 않겠다고 발악했어도 결국은 이곳에 묻히는 것.
그런 거였다.
제 자리를 마뜩잖은 듯 바라보던 한규가 앞서 걸었다. 행렬은 세대를 상징하는 한 계단을 내려와 홀로 놓인 소라의 석물 앞에서 멈추었다.
‘겨우내 가장 찬란한 별’
오렌지색 소담한 메리골드 꽃다발을 내려놓고 그녀의 안녕을 기도한다.
소라의 안녕까지 빌면 긴 추모는 끝이 나는데, 세정은 친지들을 모두 보내고도 떠나지 못했다. 다시 내려왔던 계단을 거슬러 올라갔다.
‘빛이 깃들었던 자리’
묘문을 다시 한번 읽어 내린 세정이 그 앞에 다리를 굽혀 앉았다.
“엄마.”
속으로만 썩게 두었던 말을 내뱉어보았다. 그러곤 씩,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좋은가, 거긴.”
좋아야지. 좋은 데 가려고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이 죽은 건데.
“여기 묻혀 있어서 별로 안 좋을 수도 있겠네. 빼줘? 아버지랑 같이 묻히긴 싫잖아.”
물으면 대답이 돌아올 것처럼 세정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뙤약볕 아래로 바람이 불고 머리칼이 흔들렸다. 웃음이 식어가는 동안 세정은 석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돌아오지 않는 대답을 들은 셈 쳤다.
“응, 빼내 달라고. 알겠어.”
이제는 그 음성조차 기억나질 않으니, 꿈에서 부른대도 돌아볼 수도 없겠네.
나는 억울하지.
죽음으로부터 억지로 빼앗긴 당신의 숨결도, 얼굴도, 음성도, 이제는 체구까지도 잘 모르겠다.
한 품에 안겼던가. 그것보다도 작았던가. 날 보면 웃었던가. 많이 울었던가. 희망찼던가. 자주 절망했던가.
그토록 사랑했던 당신도 내게서 잊히나 보다.
그건 참 다행인데.
“엄마.”
언젠가는 엄마라는 단어까지도 입에서 마르겠지. 소리 내 부르는 게 멋쩍고 어색한 날들이 오겠지.
“사는 게 억울한 일 투성이네.”
세정은 고개를 숙였다.
“그걸 말할 사람이 없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사람은 있었던 것 같은데.
나를 종종 약하게 만들었던 여자가 떠오른다. 제 연하고 여린 부분을 드러내고 가득 안고 싶었던 여자를 언젠가는 가졌었다.
그게 내가 가진 건지, 여자가 내게 안긴 건지……. 나도 여자에게 가져졌는지, 안겼었는지…….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감히 너를 통제하고 가두어 보려던 어리석은 시도가 망한 뒤에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삐이이―
귀가 또 병신같이 굴었다.
세정은 비틀거리며 두 다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엄마.”
발음하는 입꼬리가 떨렸다. 세정은 가슴 위로 손을 짚었다.
평소보다 빠른 박동이 불편하게 뼈를 울렸다. 세정은 사리물며 순간을 견뎠다.
상흔처럼 남아 있던 이들의 얼굴도 결국 흐려진다는 걸 알지 않나.
잘 알잖아.
세정은 두 눈을 질끈 내리감았다가 떴다.
“다음에 올 때까지…….”
눈앞이 흐리다.
“꼭 안녕하세요.”
북두 묘원의 아래로는 저수지가 있었다. 가둬둔 물은 흐르지도 않건만, 물비늘이 길어질 정도로 바람이 불면 꽤 봐줄 만한 풍경이 되었다.
몇 번 연기를 흩트리던 세정은 휴대용 재떨이에 타다 만 담배를 버렸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독한 연기는 가슴 어딘가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이내 터져 나오는 숨이 탁했다. 한참을 무감한 눈으로 바람의 방향을 따라 엉키는 물결을 보고 있을 때였다.
“전무님.”
뒤쪽으로 다가온 신원이 세정을 불렀다.
“가야 합니까?”
부러 조여둔 일정들 사이로 쉴 틈이 거의 없었던 터라, 당연한 반응이 돌아왔다.
“네, 가시긴 하셔야 하는데요.”
“하는데?”
잘린 말끝이 뭐냐고.
“제가 주제넘습니다, 전무님.”
“뭘 하려고 밑밥을 이렇게 깔아요.”
말은 이렇게 주저하면서 해도, 신원이 주제넘은 짓을 하지 않는 성정인 걸 잘 알았다.
세정은 웃으며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었다. 곧 신원이 내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단순한 낱장이었다.
이게 주제넘을 것까지야.
‘경상북도 달재군 을언면…….’
거기까지 읽어 내린 세정이 종이를 순간 확, 구겼다.
“주제를…… 좀 많이 넘네.”
한순간 잘 벼린 칼처럼 사납게 변한 눈이 신원을 내려다보았다.
* * *
눈앞이 가물거렸다. 늘어진 정신이 이쪽으로 치우쳤다가 다시 저쪽으로 치우치며 기우뚱거렸다. 세상이 아래로 푹, 꺼졌다가 올라왔다. 동시에 몸이 크게 휘청였다.
세정은 벽을 짚고 숨을 짧게 내쉬었다. 온몸이 알코올램프 같았다. 그것도 불이 붙은. 열기가 울컥울컥, 몸 어딘가를 휘돌았다.
괜히 마신 건 아니었다. 만찬이 약속되어 있었고 하필 상대가 주당인 최수열 사장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잔을 맞추다 보니 이리 취했다고.
세정은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눈을 가리고 벽에 기대어 섰다. 등 뒤로 닿는 벽이 무너질 것처럼 아슬하게 느껴졌다. 정작 무너질 것 같은 건 제 몸이면서.
습관적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입안의 열기로 살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네가 서울을 떠난 게 언제더라.
복잡한 생각을 젖히고 백호연만을 떠올리게 하는 술은 정말 마시기 싫었다고.
안다. 비겁한 생각이다.
이 관계를 확실히 짚고 넘어갈 필요는 분명했다.
이혼하든, 씨발 뭐든…….
분명한데.
태어나 처음으로 해보는 회피였다. 백호연과 살던 집에도 못 가고, 유성채를 전전하는 꼴만 봐도 그랬다.
끝이 너무 분명하니까. 백호연은 이 관계의 말로를 바라보고 있을 테니까.
그게 나는 숨 막히게 겁이 나니까.
지난날의 모든 계획이 도미노처럼 무너진 세상에서, 하나를 세워도 깨진 밑이 중심을 버티지 못해 다시 쓰러지는 세상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을까.
세상을 손 위에 뒀어도 너 하나 두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은데.
“꼴 보기 좋네.”
한층 더 깊은 늪으로 삼켜지던 때였다. 세정은 느릿하게 손을 내리고 제 앞에 선 얼굴을 보았다.
“술 존나 꼴았네.”
휘영은 비웃는 얼굴로 세정을 훑어보았다. 세정은 그 속에서 눈치를 살피는 기운을 읽었다. 도발의 전조였다.
저급한 도발에 상대할 기분이 아니다.
세정은 벽을 짚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무시당한 휘영이 하,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세정의 등 뒤로 소리를 꽂았다.
“백호연, 내가 빼돌린 거 알면서 왜 닥치고 있을까.”
세정이 걸음을 멈추었다.
휘영은 세정의 주변을 둘러싼 기류나 그 기색을 파악하려 숨죽이다가도 거칠 것 없이 내뱉었다.
“내가 뭔 짓을 했을 줄 알고.”
“뭔 짓을 했는데.”
세정이 뒤를 돌았다.
호연에게 아무런 일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일이 있었으면 제일 먼저 보고가 왔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딴 시골에 무슨 짓을 못 할까.”
온 신경 줄이 고작 이딴 저급한 도발에 반응하고 있었다.
“……씨발, 진짜…….”
사랑 한번 지랄 같게 한다.
‘가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