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다음 주에 열릴 ‘을언 자두 축제’로 작은 마을이 생기를 머금었다.
소예는 아빠 친구의 과수원이라며 도로로 뻗친 나뭇가지에서 가장 탐스럽게 익은 자두 하나를 서리했다.
그러곤 넉살 좋게 과수원까지 뛰어 들어갔다가 자두를 뽀득뽀득 닦아내 돌아왔다.
곧장 그 예쁜 자두를 호연의 입에 물려주며 다 같은 자두 같겠지만, 실은 아니라고 그랬다.
이건 ‘포모사’라고.
“을언 자두가 맛있긴 해. 요즘은 이쿠미, 알프스 왕자, 스위트카렌, 썸머뷰트, 머큐리……. 할매, 할배들은 발음도 못 하는 신품종이 미친 듯이 많은데 이런 포모사 같은 구 품종들만 줄 수 있는 오리지널한 맛이 있지.”
중학생 때까지는 이곳에 살아 자두의 웬만한 건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호연은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단단한 과육을 이로 베었다. 역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는 과즙이 입꼬리를 타고 흥건하게 번졌다. 혀로 입술을 닦고 쭉, 빨아 먹었다.
어때? 묻듯 눈썹을 들었다 내리는 소예에게 호연은 입꼬리를 내렸다. 그러자 소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괜찮다고 그랬다.
“작년에는 낙과가 엄청 심했거든. 태풍이 미쳤었잖아. 그래서 여름에 내려오니까 분위기가 완전 개판. 할매들 길거리 다니면서 울고. 할배들 소주 까고. 너 자두 썩는 냄새 알아? 미쳤는데. 치우다가 포기한 과수원마다 벌레며 악취며 진동하는데…….”
줄초상이 나도 그거보다 낫겠노라고.
“올해는 너무 풍년이라 또 문제다……. 이러면 또 제값은 못 받을 낀데.”
서울에 올라와 산 지가 몇 년이냐고, 사투리를 절대 안 쓴다던 소예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붙잡을 때마다 사정없이 사투리를 남발했다.
지금도 멀어진 과수원을 돌아보며 걱정하는 말끝에는 고장의 오래된 약속이 묻어 있었다.
약속…….
이곳에서는 종종 세월이 무상하리만치 오래된 것들을 흔하게 마주칠 수 있었다.
젊은 사람이라고는 도통 찾아보기 힘든 마을 구성원 나이부터 그들의 사소한 말투까지.
일대에서 가장 신식 건물인 행정 복지 센터 앞, 나이만큼 허리가 두꺼운 수호목, 회나무부터 슈퍼 주인 할머니가 매일같이 닦아주어 윤이 나는 아날로그 라디오까지.
그런 것들을 숱하게 마주할 때면 남자와의 백 일은, 끌어안고 싶을 만큼 소중해졌다가 흐르는 세월 속에 내다 버리고 풍화되는 꼴을 바라보며 통쾌하게 웃고 싶은 양가감정에 시달리게 했다.
그건 기세정을 대하는 마음과 같았다.
어떻게 그 남자를 한 감정으로 표할 수 있을까.
교은의 장례식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남자를 죽이고 싶을 만큼 밉게 만들었고,
언젠가 나를 살게 한 남자는 당장 돌아가 그를 끌어안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 끝에는 서로를 기만했던 날 속에서 안도하는 내가 있다.
나도 당신을 속였고, 당신도 나를 속였잖아.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미안하지 않아.
다만, 두려운 건 이 마을에 널린 오래된 무엇들처럼 내 사랑이 사라지지 않을 자흔으로 남을까 봐.
호연은 자두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물컹거리는 과육이 입안을 헛되이 돌았다.
“작업 끝나면 봄성지 가자. 거기 물안개 끼면 예술이래.”
아직도 말하고 있었구나.
호연은 소예를 힐끗,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앞선 말들을 다 듣지 못했지만, 어디에 가자는 말만 들었으면 된 것 아닐까?
호연이 괘씸한 자기합리화를 하는 새 어느덧 작업실 앞이었다.
“여기야.”
“엥.”
한 마디를 내뱉은 소예는 건물의 이곳저곳을 눈으로 훑어 내렸다. 차츰 얼굴로 선명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검갱린 피아노.”
누렇게 변색된 간판을 읽은 소예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릿속을 뒤적이면 ‘검갱린’이라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깨끗한 게 1순위라던 애 어디 갔죠?”
“이만하면 깨끗하지.”
호연은 열쇠를 꽂아 문을 열며 변명했다.
“너 사기당했어?”
소예는 짐짓 심각한 눈빛으로, 진지한 음성으로 호연의 어깨를 짚었다.
“사기는 무슨 사기.”
“아니, 적어도 리모델링이 필요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텅 빈 공간을 원하신다면서요.”
처음에야 그랬지…….
호연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이만하면 깨끗하지……. 라는 말이 무색하게 깨끗하지도 않았다.
공간을 분리했던 가벽을 철거하여 피아노 방 하나를 빼고 모두 한 공간이 되어 넓어진 것을 제외하면 처음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야, 이 상태로 계약한다는데, 그냥 그러래?”
졸지에 피아노 학원에서 혼나는 애들과 흡사한 기분이 되었다. 호연은 주변을 검사하는 소예의 시선을 따갑게 받아들였다.
“뭐……. 하나 남은 피아노는 어디 산다는 데도 없어서 안 치웠으면 한다고 그러시긴 했는데.”
“사기당했네! 부동산 사기네, 이거!”
“……그 정도는 아닐걸?”
“아니긴 뭐가 아냐, 부동산 어디 갔어? 너 막 이상한 데 갔지. 요즘 생태 공원 만들어져서 상가 개발 중인데, 이상한 부동산 껴서 난리도 아니라…….”
“네가 추천해 준 곳…….”
“아, 그래…….”
흠, 옆구리에 손을 올려두고 열을 내던 소예는 이만하면 괜찮지, 뭐……. 하고 말끝을 흐리며 창문을 열었다.
“채광이 좋다, 채광이.”
그러곤 되지도 않는 말을 지껄이며 한 번도 다문 적 없던 입술을 꾹, 잠그고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호연은 웃음을 터트리며 자두를 한입 크게 베어 물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나도 계약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피했는데, 결국은 피아노 한 번 보고는 외면할 수도 없게 되었노라고.
사실 피아노를 앞에 두고 남자를 잊어 보겠다는 다짐이 어불성설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남자에게 피아노를 떠올리게 하는 상징, 그러니까 꽃다발을 빼앗아 온 뒤로는 그 벌이라도 받듯 어떤 것을 봐도 남자가 떠올랐으니까.
피아노여도 뭐…….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주 마주하다 보면 무뎌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했다.
실은 강하게 이끌렸을 뿐이면서.
그래도 피아노가 있는 방의 가벽만은 여전히 두어 공간을 분리했다.
변덕스러운 마음을 향한 일종의 화풀이기도 하지.
“뭐야, 이 대놓고 티 내는 임파스토(impasto)는.”
한창 작업 중이던 작품을 멀찍이서 보던 소예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호연의 평소 유화 마티에르와는 사뭇 다른 표현이 펼쳐져 있는 까닭이었다.
“그냥 그런 시도를 해보고 싶네.”
“……그럴 수 있지.”
이 또한 쉽게 동조한 소예는 말하지 못한 감상평이 있는 듯 어딘가 켕기는 눈초리로 그림에 시선을 박아 넣은 채였다.
호연은 소예가 느끼는 불안감을 모르지 않았다.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와 임파스토를 능란하게 쓰던 렘브란트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그 극적인 기법 속에 제가 가진 모든 불안을 두껍게 칠하고 있으니까.
비록 감상하는 사람이 덩달아 불안해지기는 해도 그리는 사람은 불안을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만 봐, 닳아.”
“웃겨, 백호연.”
그러면서도 작품에서 눈을 떼지 않아 호연은 소예의 손을 잡고 질질 끌어 의자에 앉혔다.
열어둔 창문으로 테이블 위까지 햇살이 늘어지는 충만한 아침이었다.
호연은 차츰 길어지는 햇살의 모양을 보았다. 요즘은 자주 멍했다.
“작업실도 봤는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소예는 게으른 고양이처럼 테이블에 엎드려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말했다. 응, 대답한 호연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너는 오늘 서울 가야 한다고?”
“밥 먹고……. 버스 끊어 놨어.”
얘기하며 문을 잡고 아직 당기지도 않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
“……?”
“……?”
문을 밀고 들어온 사람과 문을 잡고 선 사람, 그 뒤에 선 사람까지 총 세 명의 얼굴로 동시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먼저 입술을 달싹인 건 소예였다.
“누구세요?”
문을 밀고 들어온 남자는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또래였다.
“……?”
그 남자가 문을 놓고 뒷걸음질 치는데, 호연이 문을 붙잡고 있어 닫히지 않았다.
남자는 잠시 물러난 채로 간판을 올려다보고 동그란 눈을 재차 깜빡거리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질 못했다. 그러곤 다시 몇 걸음 다가와,
“피아노 교습소 아니에요?”
이미 내부를 들여다봐 아닌 걸 알면서 제 결백을 증명해야겠다는 듯 주저하는 입술로, 슬픈 눈으로 물었다.
“네…….”
호연의 짧은 대답이 끝나자, 남자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죄송하다고 그랬다. 괜찮다고, 죄송하다고 피곤한 주고받기가 이어졌다.
한참 실랑이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을 때였다.
안쪽에서 전화가 울렸다.
“야, 전화 온다.”
“아, 어어.”
대충 대답한 호연이 소예를 두고 급히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본래 피아노 교습소에서 쓰던 유선 전화였다. 저것만은 치워 주겠다던 주인아주머니에게 호연이 제가 써도 되느냐, 부탁해 남겨둔 거였다.
세정과 살던 집에서 정신없이 몸만 겨우 나왔으니까. 핸드폰 또한 챙기지 못했지. 다만 새로 개통할 의지는 없어 이 번호를 몇 명에게만 알려주었다.
현소예, 차인영 교수, 기진 갤러리 담당자, 한수연 팀장.
전화가 올 곳도 이게 다라는 말이었다.
아, 주인아주머니를 향한 전화일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수화기를 든 때였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백 작가님이세요?
수연이었다.
“아, 한 팀장님. 저 맞아요.”
―아, 잘 지내셨어요? 을언면은 날씨 좋아요? 서울은 비 오는데.
“비가 와요? 여긴 맑아요.”
호연은 아직 열려 있는 창문을 응시하며 아, 닫는 거 까먹었다……. 중얼거렸다.
―작가님, 을언면 내려가 계신다는 말 듣고 이제는 아침마다 을언면 일기예보도 찾아보잖아요, 제가. 밤에 을언면도 비 온대요. 나가실 일 있으면 꼭 우산이요.
멀리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는 소예의 음성이 들려왔다. 호연은 수화기를 다른 쪽 귀로 옮기며 대답했다.
“네에,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지금 밥을 먹으러 가야 해서요. 다른 용건 있으실까요?”
―아, 아아. 다른 게 아니고요. 서 비서님이 전해드릴 서류가 있다고 주소지 좀 알려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알려드려도 괜찮을까요?
* * *
아, 우산.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붓을 내렸다. 먹색 밤하늘에 쩍, 금이 갈 때마다 빼곡하게 그어지는 빗줄기가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풍경을 조금 망연하게 보고 있자니, 호연은 한참을 힘주어 작업한 결과물이 생각보다 형편없게 느껴졌다.
“씨…….”
호연은 허리를 곧게 펴다가 통증에 도로 무너졌다. 굽은 자세로 그림을 노려보았다.
“씨이…….”
뻐근한 손목을 털면서 가벼운 욕을 삼켰다.
어디가 마음에 안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아……. 짜증 나.”
당장이라도 캔버스 나이프로 그어 이 그림의 목숨을 끊어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작품 하나에 밤을 갈아 넣고 있다 보면 종종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본인 작품에서 오는 자괴감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기 마련이었다. 호연은 그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
호연은 항복을 외칠 것처럼 두 손을 들고 발로 바닥을 밀었다.
이제 돌아갈 게 문제인데…….
우산도 없고, 서울에서 내일 아침 일찍 내려오겠다던 소예의 전화도 있었다.
“그냥 여기서 잘까?”
붓 칠하는 데 사력을 쓴 것 같았다. 이리 피곤할 수가…….
호연은 벽을 짚어 불을 껐다. 간접 등만을 남겨놓고 테이블로 엎어졌다.
잔상이 된 물감의 색들이 얇게 펴졌다. 눈앞으로 옅고 짙은 색의 글자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림은 안중에도 없는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숨을 끊어내고 싶은 쪽도…….
“…….”
서 비서님이 갖다줄 서류가 있다고.
무슨 서류인지 알 것 같았다. 제가 휘영을 앞에 두고 서울에 돌아가 정리할 것이라고 했던 ‘혼전 계약서’와 ‘이혼 합의서’겠지.
남자는 기다리지 못하는구나.
남자는 이미 정리가 끝났구나.
나만 또 이렇게…….
신경 쓰지 않으려 부러 작품에 몰두했다. 결국은 자기 학대에 가까웠던 행위에 욱신거리는 손가락을 주무르고 있지만.
“하아…….”
이것도, 저것도 다 짜증이 난다. 눈물이 난다. 삶에 넌더리가 난다.
남자를 떠올리면 피어오르는 감정들 중에 지금 느껴지는 것은 미움이었다. 남자가 미웠다. 증오스러웠다.
널뛰며 불붙기 시작한 감정은 정신을 꺼멓게 태웠다. 온몸이 들끓었다.
진짜 사과 한번 없구나, 당신은.
없구나.
“나쁜 새끼…….”
기세정 씨, 진짜 나쁜 새끼네…….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들을 뒤섞어 잇새로 흘릴 때였다.
쿵쿵―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