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저 영원히 가는 거 아니에요.”
“알겠다고요.”
“정리하러 올 거예요.”
“…….”
“정리하러 올 거야…….”
아주 마른 여자였다. 기세정같이 커다란 새끼를 쥐고 흔들 수 없을 정도로 작고 가느다란 여자.
버석하게 마른 얼굴로 다짐하듯 중얼거리던 여자의 두 눈은 꺼멓게 빛이 죽어 있었다.
과연 살아 있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안광이 맞나 싶었지.
세정은 사람 붙이기가 까다로우니, 휘영은 그가 호연에게 붙인 사람을 돌려 제 편으로 삼았다.
물론 제가 신임할 수 있는 사람만 쓰는 것으로 유명한 세정이었으나 그쯤엔 워낙 많은 사람을 부리고 있던 터라 모두 신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두긴 어려웠다. 그래서 휘영도 변절자를 하나 포섭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알 수 있던 정보들로 휘영은 호연과 세정의 냉전을 읽었고 그녀를 도망가게끔 풀어주었다.
그리고 세정의 눈을 피해 여자가 도망쳤다는 을언면으로 내려갔다.
자두 과수원의 목가적인 풍경을 안은 카페에서의 만남이었다.
“정리하러 올 거예요.”
“…….”
“정리하러 올 거야…….”
호연은 말 되풀이증에 걸린 사람처럼 고집스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 진짜 알겠다니까!”
휘영의 짜증에 호연은 젖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제가, 여기 있다고, 절대, 절대로, 말씀, 하시면, 안 돼요.”
기세정이 찾으려면 어떻게든 찾는다고.
지극히 당연한 생각도 못 하는 모습을 보면서 진실을 말하고 싶었으나 더 울까 봐. 휘영은 지겨워하며 우는 꼴을 관조하기만 했다.
사랑했었구나. 사랑하는구나.
이내 다소 낯 뜨거운 감상평이 절로 나오게끔 그 감정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기세정은 어떤가.
휘영은 턱 끝을 엄지로 어루만졌다.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아랫입술을 혀로 쓸다가 턱을 괴었다.
애당초 세정의 붕괴를 목표로 두고 호연의 도망길을 열어준 거였다.
너는 기소라를 죽였잖아. 그런 주제에 행복할 순 없지 않아? 기소라가 억울해 죽겠다는데, 너는 행복하면 안 되지 않아?
고스란히 내보인 약점을 찌르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세정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행한 일이었다. 그건 분명 명중이었고, 치명상이었으며, 흘린 피의 정도까지도 가늠이 되었다.
그런데도 멀쩡할 수가 있나.
흐트러짐을 목격했던 건 모두가 본가에 모였던 사혼식 예고 날이 유일했다.
그날로부터 서서히 붕괴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너무나도 멀쩡히 출근하고, 야근하고, 임원들과 섞여 보란 듯이 구내식당을 이용해 점심을 먹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건…….
“미친놈인가?”
진짜 미친놈인가?
진짜 개또라이세요?
일을 저지르고 칼이라도 맞을까 봐, 복대를 몇 겹이나 하고 다니는데, 씨발…….
내가 잘못 알았다고? 기세정은 백호연만큼 무너지지 않는다고?
휘영은 머리칼을 흩트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눈을 좁혔다.
“나는 기세정, 그 새끼 속을 모르겠네?”
누군가 기세정 속에는 몇백 년 묵은 이무기가 들어 있다고 했다. 스스로 용이 되길 거부한 이무기가 안에 몸을 틀어 세상 모든 것을 우습게 보는 새끼라고. 원한다면 하늘도 쉽게 내려 앉혀 제가 있는 물속을 하늘 삼을 놈이라고.
그런 새끼니까 모든 걸 철저히 계획했나? 다 속인 건가?
백호연은 엔마트로만 이용해 먹을 생각이었는데, 제가 오해해서 그녀를 도망시킴으로 도리어 기세정이 할 일을 덜어준 꼴이 되는 건가?
“뭐냐고…….”
도와주었건 아니건 지은 죄는 죄였다. 차후의 일을 도모해야 했다. 그러니 이쯤하고 일단락 지어야만 하는데, 자꾸 반박 증거가 끼어들었다.
분명 제가 백호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기세정은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게 연기인 것 같지 않은데.
결론이 적당히 맺어지지 않았다. 그건 기질적인 문제였다. 한번 확고히 한 생각을 도통 뒤집을 줄 모르는 아집 같은 것.
휘영은 끙, 앓으며 동공을 굴렸다. 그러다가 두 눈을 큰 손으로 덮고 중얼거렸다.
그 약점,
“한 번 더 찔러봐야 하나.”
그래도 버티면.
그때도 버티면.
“……못 버텨.”
부정하면서도 머릿속에 쩍, 들러붙는 찝찝함이 남았다.
엿 같게.
* * *
세정의 미려한 이목구비는 안전했다. 피부가 꺼칠하지도 않고 입술이 말라 터지지도 않았다. 다만, 눈 아래로 짙은 피곤이 끼어 있었으나 근래의 업무량을 되짚으면 심한 정도도 아니었다.
북두 그룹 전체가 난리인 탓이었다. 정확히는 북두 그룹의 북두 리테일이 난리였다. 계열사 중 가장 큰 리테일을 분리하는 일은 그저 도끼로 내려찍듯 손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랫동안 한 몸이던 각 계열사의 유착 관계가 생각보다 더 찐득했다.
더러운 뒷돈이 오고 갔던 순간이 뒤늦게 포착되기도, 그를 숨기기 위한 증거 인멸의 장면이 잡히기도 했다.
특히 에트 주식회사와 거래했던 장부가 이상했다. 누군가 돈을 횡령했다가 다시 채워 넣은 이력이 있었다.
따라서 해당 사건을 조사하는 특별 감사팀까지 꾸려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가장 무수한 양의 일을 처리하는 자, 기세정은,
“서류 주시고.”
자세가 조금도 비스듬하게 틀어지지 않았다. 무채색과 무음이 어울리는 그대로였다.
신원은 그게 이상했다.
평소와 달라 이상한 게 아니라, 너무 평소와 같아서 이상했다고.
풍랑이 몰아치기 전, 그를 피해 게으른 듯 부지런히 육지로 나아가는 조각배.
비록 이미 풍랑은 몰아쳤고, 제 상사는 게으르지도, 어딘가로 돌아갈 생각도, 심지어는 쪽배 따위의 작고 허술한 배도 아니건만. 맞는 비유가 하나도 없건만.
자꾸 심상찮은 너울에 흔들리는 조각배가 떠올랐다.
신원은 어지럽게 방류한 생각을 억제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전무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센터 쪽에서 백호연 씨를 놓쳤다고 해서요.”
신원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고 기 전무님께 말씀을 좀 잘해주시라, 납작 엎드리던 이들의 어투를 떠올리면서도 미사여구 없이 간결하게 전했다
기실, 잘 말할 수도 없는 게…….엔마트 관련 기사가 뜨고 며칠 뒤 호연을 놓친 모양이었다. 고작 집과 대학원을 오고 가는 여자를 놓쳐 봐야, 얼마 뒤면 집에서 나올 거라 생각하고 보고하지 않았던 듯했다.
그러나 찾다가 안 되어 지금에서야 보고를 올렸는데, 그 기간이 길었다. 이쯤 되면 제가 좋게 전해도 좋게 들어줄 수 없었다.
세정이 호연을 어디로 도피시켜 놨을까, 신원이 돌아올 답변을 기다릴 때였다.
“그만 치웁시다.”
“……네?”
“백호연 씨한테 붙였던 사람들 다 치우시라고.”
날 선 대답은 두 번 묻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세정의 성정을 앎에도 구태여 되물은 제 탓이었다.
신원은 자세를 단정하게 고치며 긴장을 다스렸다.
세정은 가까운 과거에도 그랬던 적 있었다. 호연에게 사람을 붙였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휘영에게로 돌렸었다.
“아, 네.”
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지.
“그리고.”
“네.”
“혼전 계약서 파기해 주시고.”
신원은 되묻지 않기 위해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과정을 거쳤다.
“……실례입니다만, 전무님. 제가 기억하기로, 한 차례 연장했던 결혼의 종료 기한은 양측 합의로 변경되었는데요. 혹시 합의된 사항일까요?”
세정은 대답 없이 눈을 들었다.
언젠가는 사랑으로 읽히던 눈이 이제는 흠집이 난 것처럼 흐리게 보였다.
그래, 왠지 이상하더라.
“…….”
“…….”
세정의 눈 속, 그 먼 곳을 더듬듯 바라보던 신원은 문득 속이 울컥 조여 왔다. 이지러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건…… 목숨을 걸고 애써 건너온 지난날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수연아.
언젠가 그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적 있다. 저는 그 시간을 잃은 듯 살지만 단연코 잊은 적 없는 기억의 파편. 그 뾰족한 조각이 다시 속을 푹푹, 찔렀다. 한순간에 너덜너덜해졌다.
여전히 넌더리가 날 정도로 버겁고 아픈 기억에 신원은 눈을 내리깔았다. 발끝만 바라보았다. 치밀어 올라 온몸을 벌레처럼 기어 다니는 번뇌를 외면으로 방조했다.
“이러다가, 괜찮아지긴 하나.”
세정이 목 졸린 음성으로 물었다.
어떤 걸 묻는지 너무 잘 알았다.
괜찮아지긴…… 이딴 게 괜찮아지긴.
“……아니요.”
신원은 말끝을 웃음으로 흐리며 쉽게 부정했다. 이에 세정의 눈으로 참혹한 빛이 번졌다. 신원은 그 눈을 더 강하게 짓밟았다.
“점점…….”
“…….”
“갈수록 더 안 괜찮아집니다, 전무님.”
대답하는 입 속에 피가 흥건한 기분이었다.
그날, 수연의 발밑에 고이던 피 웅덩이가 떠오르는 비릿함이었다.
* * *
멀리서도 신원을 알아본 수연의 입꼬리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실룩였다. 신원은 그 세세한 부분을 예전에 다 잊은 사람처럼 외면했다.
또 수연의 왼손 약지에 남은 결혼반지마저도 무시하고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오랜만이네.”
“응, 오랜만이야.”
담담히 대답하는 신원의 어투에 수연은 시선을 떨어트렸다. 쿵쿵, 선명한 박동 탓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다가다 수연이 붙잡아 공적인 인사를 몇 번 주고받은 적은 있으나 단둘이서 마주 앉아 대화하는 건 이혼 이후 처음이었다.
그 시기를 더듬어 보던 수연의 가슴이 한 자락 크게 무너졌으나 그녀는 어렵지 않게 웃어 보였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고. 또 얼마 만의 자리인데……. 우는 얼굴을, 무너진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정말 웬일이야……. 네가 연락을 다 하고. ……잘 지냈어?”
그런데 얼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애써 입꼬리를 드는 얼굴이 이상하진 않을까. 수연은 두 손을 맞잡았다. 그 위로 동그란 테이블에 온도가 다른 아메리카노 두 잔이 있었다.
그 일이 있고 시간은 쏜살처럼 지나갔지만,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여름날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신원의 여전함까지 수연은 그를 끊임없이 확인했다.
그러다 보면 가슴 한구석에 제가 남아 있다는 것까지 알 수 있을까, 기대감 어린 마음으로. 역시 여전한 마음으로.
“일은 많이 바쁜가? 아, 바보 같은 말이네. 바쁘겠지.”
수연은 내려앉은 정적을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신원은,
“많이 바빠. 난 잘 지냈고 잘 지낼 거야, 앞으로도.”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네 마음을 다 안다는 듯 차분하게 미래를 향한 단언까지 했다.
“…….”
그 단호함에 수연은 입을 다물었다. 이 역시도 여전한 아픔인데, 왜 적응이 되지 않을까.
“다른 건 아냐. 백호연 씨, 연락하지?”
수연이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에 옅은 선을 그렸다.
“백 작가님? 백 작가님은 왜……?”
“계신 곳 좀 알려줘.”
“……그러니까, 왜.”
수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신원을 살펴보았다.
기 전무의 아내인 호연과 기 전무의 비서인 신원이 대체 무슨 관계기에……?
세정에게 필요한 것이면 그의 손을 쓰면 될 일인데, 그토록 껄끄러운 제게 묻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너한테 꼭 다 말해야 할까, 수연아.”
“아…….”
그러나 거기까지 말할 의무가 없다고 선을 긋는 대답에 수연은 이제 억지로 웃지도 못했다.
“사모님께는 전해드릴 서류 있다고 말씀드리면 될 거야.”
서툰 원망들이 머리를 내밀었다.
“……알겠어. 여쭤보고 보내줄게.”
그 원망들을 누르느라 한참 느리고 조금은 아픈 대답이 끝나자, 신원은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수연은 꿈을 꾸는 것처럼 망연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갈게. 커피마저 마시고 가.”
“신원아.”
“응.”
조금 더 보고 싶다고.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그러한 진심을 꺼낼 수는 없어 수연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방황은 가장 강렬한 기억을 마주하고 덜컥,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머님은…….”
이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고된 시집살이와 고부 갈등. 사랑하는 여자, 둘이서 싸우는 꼴에 터져나갔던 신원의 마른 등줄기. 결국은 지키지 못했던 아이.
“죽었어.”
“…….”
“너는 우리 어머니,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아.”
아마 지금도 지나치게 정정하시겠지.
두 여자 사이에서 정신이 아픈 어머니를 선택했던 신원의 얼굴로 거멓게 음영이 들었다.
“그 말도 꼭 하고 싶었어.”
아이를 잃은 건 오로지 제 잘못이라고. 네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 어디 가서도 죄책감 느끼고 살지 말라고. 넌 아주 잘 살라고.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등을 떠밀던 마지막 얼굴이 스쳤다.
질긴 시선이 끊어졌다. 어느 날 절대 놓지 않고 해로하겠다며 하객들에게 약속하던 그날의 손이 한날, 그런 약속은 없었다고 부정하듯 끊어진 것처럼…….
그로부터 서먹해진 관계를 놔주지 못했던 나날들.
수연은 울음을 참았다. 제가 울면 가지 않을 신원의 성질을 알았다. 그래서 참았다. 동정으로 붙잡아 두고 싶진 않았다.
멀어지는 신원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등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
“흐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러운 울음을 토해냈다.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