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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82화 (82/98)

제82화

[북두 그룹 - 북두 리테일 – 북두 호텔&리조트 부문 이사, 기휘영]

북두, 북두, 북두 명함에 세 번이나 들어간 사명은 북두 그룹의 일원들이 누리는 자긍심 같았다.

호연은 그날 방문으로 쏟아지던 후텁지근한 공기를 떠올렸다.

방문을 여는 사람이 언뜻 세정으로 보였던 말도 안 되는 순간과 세정이기를 바랐던 미련한 희망.

그저 그날을 떠올렸을 뿐인데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보다 더 눅눅해진 공기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게 묶어두었다.

호연은 내내 가위에 눌린 것 같은 감각에서 조금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간신히 고개만 돌려 담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두가 탐스럽게 영그는 경상북도 달재군 을언면은 소예의 외할머니 집이었다.

새콤하고 단 향의 예감이 바람에 밀려들었다.

눈길을 두는 곳마다 싱그러운 자두 과수원이었다. 그 붉고 푸름이 난만하게 펼쳐지고, 노동의 고됨보다 평온이 물씬 밀려오는 곳. 큰 숨을 들이마셔도 부담스럽지 않은 곳. 그저 자유로운 곳.

“호연아, 밥 먹자.”

외할머니의 집에 살기도 했다면서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부엌을 뒤엎기 바쁜 소예가 상을 들고 비뚝비뚝 걸어왔다.

소예의 외할머니가 지난겨울, 요양 병원에 들어가게 되어 이곳은 빈집이었다.

소예는 언젠가 외할머니가 씻은 듯 병을 털어내고 다시 돌아올 테니, 잘 쓸고 닦고 살다가 원래의 형태 그대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그랬다.

그러니 제가 요리를 전담하고 호연이, 네가 청소를 하라고.

기실 청소가 하기 싫었던 거면서 소예는 꽤 합리적인 업무 분장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얹혀살게 된 처지로 딱히 꼬투리 잡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 좀 도와줘. 나 좀…….”

호연은 평상에 거의 다 와놓고 죽는소리를 하는 소예를 도와 상을 올렸다.

파란 대문 집 기남이 손녀면 제 손녀와 다를 바 없다고, 애들 손으로 뭘 만들어 먹겠냐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집 저 집을 끌려다니며 바리바리 받아왔던 반찬 중 하나인 열무김치로 만든 국수였다.

“야, 개맛있어.”

얼큰한 걸 먹은 것도 아닐진대 속부터 북받친 감탄을 내뱉은 소예가 정신없이 그릇에 고개를 처박았다.

그 모습이 엄청…….

“……사료 먹어?”

“……왜, 나 지금 개 같아? 게걸스러워?”

“……많이?”

호연이 눈썹을 들어 올려 나지막하게 긍정하자 소예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잠시간의 침묵이 있다가 호연이 먼저 웃고 소예가 따라서 웃었다. 아무것도 아닌데 눈물이 날 정도로 웃겼다.

“얼른 먹어라.”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소예는 아직 한 젓가락도 뜨지 않은 호연의 그릇을 보고는 짐짓 비장하게 명령했다.

응, 흐리게 대답을 중얼거린 호연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휘휘 저었다.

어떻게 해야 별로 안 먹고도 많이 먹은 것처럼 보일 수 있을까.

“너 이씨, 오늘 이거 다 안 먹으면 작업실 구하러 못 갈 줄 알아.”

엄포에도 호연이 젓가락을 들었다 말았다, 하자 소예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알았다고…….”

호연은 억울한 듯 웅얼거리며 국수를 조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저를 노려보던 소예의 형형한 눈초리가 한층 가라앉았다.

분명 맛이라는 게 있으니 음식일 텐데, 특히 열무김치는 매콤하고 신맛이 있어 입맛을 당기게 하는 강한 감칠맛이 돌 텐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을 떠난 직후부터 그랬다. 혀뿌리부터 올라오는 쓴맛만 느껴졌다.

호연은 맛이 느껴지냐는 물음 대신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소예에게 입 모양으로 고마워, 그랬다. 소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호연은 정말 괜찮았다.

미각이 사라진 것쯤 뭐가 어때서.

이곳으로 내려올 적 엉망진창이던 상태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우 두 젓가락을 깨작인 호연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막혀버린 것 같은 목구멍은 딱 이 정도가 한계치임을 알려주었다.

“좀 먹나 했다.”

국물까지 마신 소예가 물컵을 건네었다. 호연은 멋쩍게 웃으며 물도 딱 한 모금 삼켰다.

“여기 대체 얼마나 있으려고 작업실을 구해.”

소예는 부모님을 피해 내려온 것이고 어쩌면 호연을 위해 내려온 거였다.

너무도 멀쩡히 집으로 돌아갔다가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처참한 꼴로 다시 와서는 도망가자던 말이 아직도 유효하냐고 묻던 얼굴에 차마 거절의 말이 안 나와서.

내려오는 내내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내려와서도 한참 문을 걸어 잠그고 울던 사연이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나는 여기 마음에 들어.”

타박하는 물음에 고개를 돌려 이쪽저쪽을 둘러본 호연은 말갛게 웃었다.

그냥 이 조용한 풍경만이 좋은 게 아니었다. 예전에는 호수였으나 메워져 동네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 얕은 중턱도, 도로 위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산도.

가본 적은 없지만, 최근에 생태 공원이 되어 산책로로 입소문이 났다는 저수지, 봄성지도 좋았다.

“여기가 좋긴 뭐가 좋냐. 핸드폰도 잘 안 터지지. 버스는 하루에 네 번 오지. 서울이랑 멀지. 아무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이거 봐. 또……. 소예는 쓸모없어진 핸드폰을 몇 번 꾹꾹, 눌러보다가 내던졌다.

이에 호연은 연한 바람결을 따라 여린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좋아.”

“어?”

소예는 눈을 들어 호연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어서 좋아.”

그래, 가끔 이렇게 텅 빈 눈을 할 때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아서 소예는 묻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너는.

“근데 네가 서울 갈 일이 많아서 힘들지? 작업실을 방 붙어 있는 데로 구할까? 그러면 너는 서울 가도 되고, 나는 여기 조금 더 있어도 되고.”

지청재 이름 밑에 빨간 줄을 그어 버리겠다던 소예의 결심은 아직 지지부진한 단계였다. 몇 번이고 서울을 올라갈 일이 있었다. 호연은 내심 그 번거로움이 미안하고, 같이 있어줘 고마웠다.

“됐거든. 잠은 여기서 자. 하룻밤 비우는 일은 있어도 너 혼자 두고 완전히 서울 가는 일은 없으니까.”

“……고마워.”

“고맙다는 말도 한 번만 더 하면 죽는다, 진짜.”

그러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고 드러누워 짜증을 냈다. 호연은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걸친 채 이제는 멍도 다 빠진 소예의 종아리를 쓰다듬었다.

“갔다 오는 길에 사다 줄게.”

“……마카롱도 사 와.”

“알겠어.”

얼음은 빼고. 내가 얼려 놓을게. 그냥 에스프레소에 샷 추가해서 사 와. 내가 만들어 먹게. ……그냥 같이 갈까?

* * *

“여가 원래는 피아노 교습소였는디, 주인 아지매가 건강이 나빠지가……. 여즉 위짝에 계시긴 해요? 아이다. 지금 계실라나. 저짝에 을언 병원이라고 생깃거든. 거 쫓아갔을 지도 모르지. 쪼매만 기다리보소.”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면적이 어떠니, 건물 상태가 어떠니, 새로 생긴 을언 병원이 얼마나 을언면의 자랑인지 중얼거리던 중개소장은 이내 핸드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예에, ‘검갱린 피아노 교습소’ 임대인 핸드폰 번호 맞능교? 내 을언 부동산 소장인데예. 아니, 별일은 아이고, 상가 보러 온 사람이 있어가 짐 으디신가 해가꼬…….”

검갱린…….

호연은 들려오는 단어를 곱씹으며 내부를 살펴보았다.

곳곳에 아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작은 피아노 교습소였다. 피아노 방 세 개와 로비로 보이는 공간 하나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피아노 두 대는 치워진 상태였고, 한 곳에만 피아노가 남아 있었는데, 그 또한 갈색의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였다.

호연은 그 곡선의 피아노를 따라 시선을 내리다 괜히 건반 뚜껑을 열었다. 윤이 나는 건반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누르지 않고 음을 가늠했다.

사실 피아노 교습소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기 싫었다.

순간, 기세정이 떠올라서.

하필 피아노 교습소일 게 뭐냐고.

비어 있는 상가를 세 개쯤 보고 나머지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에 마지못해 왔지만……. 정말 피아노를 마주하니 환상통처럼 온몸에 극렬한 통증이 번졌다.

호연은 열상이 남은 듯이 따가운 가슴을 짚으며 잘게 토닥였다. 뜨거운 숨이 몰려 나왔다.

괜찮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제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말 오래 아프고 싶었다. 오래 아프다 보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수 있겠지.

나만의 망한 사랑…….

도망쳐 을언면에 온 순간에 확실해졌다.

남자가 찾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진작 찾았을 테다. 그런데 아직도 남자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건,

찾지 않는다는 거겠지.

그러므로 제가 한 도망은 도망이 아니다. 잡으려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도망이야.

그렇다면 이 행위는 무어라고 규정지어야 할까.

나만 눈이 멀도록 사랑했던 거야.

지난날, 남자의 눈빛이 거짓말이고 고백이 지독한 속임수였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하는데, 쉽지 않았다.

어떻게 평생을 걸어 사랑을 수배한 저를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을까?

“내가 그런 걸 구분 못 할 정도로 좋아했던 거지.”

이 또한 절망스럽게 인정하면서 가슴이 쓰려 죽을 것 같았다.

불현듯 교은이 보고 싶었다.

이 또한 나의 망한 사랑이므로.

고백처럼 흩어놓고 싶던 말이 아직도 입속에 고여 있었다.

“……엄마.”

나도 언젠가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보육원의 어린애들이 모두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이제는 등에 대고도 하지 못할 고백이다. 후회의 그늘로 남는다. 모든 게 다 구질구질한 미련이다.

“흐으…….”

언제쯤 이 모든 사랑에 울지 않을 수 있을까.

감히 너무 많은 것을 사랑했다.

호연은 떠밀려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랫입술을 아프게 짓씹었다. 새어 나오는 숨이 시근덕거렸다.

언젠가 보통의 음악은 ‘도’로 끝난다던 말을 곱씹었다.

그렇다면 내 사랑은 지금 어디쯤 연주되고 있을까.

호연은 ‘도’를 찾아 깊이 눌렀다.

이 건반의 온도, 음의 높이, 진동을 가슴 깊이 새기기로 한다.

간절히 비는 것은 하나뿐이다.

다시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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