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미친 자식 아냐?
한규는 입안에서 헛도는 말을 삼켰다. 그러나 못마땅한 속을 감추지 못하고 쩝쩝, 텁텁한 입을 혀로 더듬었다.
“이건…….”
다시 생각해도 기세정은 정말 미친 자식이었다.
서류를 들었다 내리는 일련의 행위가 뜻 없이 반복되었다. 경탄처럼 터진 말이 몇 번이나 탄식으로 바뀌었다가 뭉툭하게 끊겼다.
엔마트가 넘어오다니.
유통 그룹끼리 손을 붙잡고 압박했을 때나 겨우 휘청이던 엔마트였다. 그마저도 무너트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세정은 금세 손아귀에 쥐고 흔들었다. 버거운 기색도 없이, 어려운 눈치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휘영에게 유인 홀딩스 유정우 대표의 딸, 유아민을 맺어 줌으로써 유대 관계를 공고히 했고 엔마트와 뉴웨이브를 삼키며 리테일 계열사 분리를 끌어냈다.
“하…….”
생각보다 이르게 자리를 위협당할 수도 있겠다. 찍어 누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낙관은 이제 돌려막을 수 없는 안일함에 불과했다.
애초에 세정은 북두 그룹의 전망도 한규와 다르게 내다보았다. 그가 손을 잡으려는 정당 또한 색이 달랐다.
잡음이 많은 후계자에서 총수 자리로 오를 때부터 불안했던 지반이 정신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한규는 수용치를 넘긴 두려움이 목구멍에 고인 것을 실감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뜨거운 한숨이 나올 리가.
고압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머리가 깨어질 듯 아팠다.
소라가 꿈에 나온 뒤부터는 계속 그랬다.
억울하다고. 자꾸 억울하다고……. 뭐가 억울하냐고 물을 때마다 서럽게 우는 얼굴로 또 억울하다고……. 하염없이 아빠, 나 억울하다고.
저야말로 환장할 지경이다.
정말 소라가 마약 중독자였을까. 그래서 사고가 났을까.
가장 근본적인 물음의 해답은 제가 덮으면서 끝이 나버렸다. 돌이킬 수도 없고, 이젠 돌이켜서도 안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날에 두고 온 후회가 있나.
그런 건 또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안녕을 빌 뿐. 편안히 잠들기를.
여자를 좋아하네. 파혼하네, 마네. 그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못해 억울하다는 건 다 멀찌감치 미루어두고 제발 좀 조용히 살자.
“……아버지. 아버지…….”
딸이 실수하면 아비 된 덕목으로 허물을 덮어야지.
막막함에 명균과 하느님, 두 아버지를 한탄처럼 중얼거린 한규는 신경질적으로 내선 전화를 들었다.
―네, 회장님.
“기 전무는 아직 출근…….”
―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비서는 여자였다. 그러나 먼 통화감이 나직한 남성의 음성을 전달했다. 동시에 걷어차인 것처럼 열린 문 사이로,
“출근.”
세정이 끊어진 말을 이어가며 걸어 들어왔다.
걸음마다 매캐한 기류가 넘실거렸다. 피곤한 듯 느린 걸음과 목을 두둑두둑, 꺾는 행위에서 묘하게 사나운 기질이 읽혔다.
턱, 소파에 앉으며 보이는 벌건 눈은 또 어떻고. 마주한 검은자위 아래로 드러난 흰자위에 실핏줄이 죄 터져 있었다.
차림은 반듯하나 느슨함은 감춰지지 않았다. 부러 발산하는 위태로움이었다. 그건 한규가 세정을 끌고 와 후계자 자리에 앉힐 때 가장 먼저 지웠던 자유의 흔적이었다.
그를 매력적인 피아니스트로 보이게 하고 관객들이 열광하도록 만들었던 장치. 그러나 기업인에게는 필요 없는 것. 그게 한규의 노력을 무시하듯 다시 세정의 곳곳에 열꽃처럼 피어 있었다.
“뭐야?”
그래서 엔마트와 관련한 물음 대신, 월권을 행사했던 순간의 책망 대신 못마땅한 짜증이 새어 나왔다.
“…….”
세정이 들어 올린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목표물보다 한참 뒤를 조준한 시선이 흐렸다.
“정신을 어디 빼먹고 다녀?”
동시다발적으로 엔마트의 논란을 터트려 임시 주주 총회를 열게끔 입김을 불어넣고, 자신의 주식까지 팔아치운 석훈을 대표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나도 매끄러웠다.
이리 나사 빠진 얼굴로 모든 일을 지휘했다고는 믿기지 않게끔.
“너 뭐 하는 새끼야, 이거?”
“…….”
세정은 충혈된 눈을 나른하게 깜빡일 뿐이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무정물처럼.
한규의 눈이 세정의 표정을 읽으려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눈 밑이 파르르 떨려 두 손에 얼굴을 묻는데, 머릿속이 아뜩했다.
누구보다도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라, 그런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싸한 예감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소희가 죽고, 소라가 죽고, 스스로 손을 부쉈을 때 벌이라는 말로 제 앞에 세우자 이런 얼굴이었다.
대체 왜?
세정에게 그런 순간을 안겨주는 일이 또 있을 리가.
“기세정이, 너…….”
순간의 직감이 있었다.
엔마트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던 그날, 한규는 세정의 사진을 여러 장 받아보았다. 평소에도 과민증을 앓는 세정 탓에 멀찍이 붙여두었던 심복이었다.
소리치는 호연을 달려가 끌어안고, 쓰러진 호연을 들어 올리고, 늘어진 호연을 차에 조심히 넣던 순간들.
그 사진 속에서 먼 기억을 불러일으키던 세정의 공허한 표정.
정말 사랑이라도 했나.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기어코 사랑을 했나.
그리하여 지금 이리 휘청이나.
“뭐 이런 미친 독한 새끼가 다 있어.”
질렸다는 듯이 나온 한규의 말에 세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눈은 전혀 웃지 않아, 기괴하리만치 섬찟했다.
한규는 빠르게 부정했다. 이런 괴물을 키운 적 없었다. 적어도 제 손으로는 키우지 않았다.
“아버지.”
이내 세정에게서 나온 나직한 음성에 한규는 눈살을 이지러트렸다. 오랫동안 목을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슨 것 같은 쉰 소리였다.
“예전에…… 소라 초상화 그렸던 여자애 찾았잖아요.”
세정은 소라를 향한 병적인 한규의 집착을 알아낸 후 이 사실이 좋은 팻감이 될 수도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러므로 이리 가볍게 꺼낼 말이 아니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러면서도 되감겨온 기억에 한규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왜 찾았어요?”
그러나 묻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았다.
“……헛소리는. 그냥 소라가 좋아했었으니까. 앞으로 못 보는 30대, 40대 소라의 초상화도 받아보고 싶어서 그랬지.”
목이 타는 질문에 반해 대수롭잖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싱거운 어투에 세정은 피식, 웃었다.
실패한 도박이었다.
백호연 씨, 당신이 최후의 협상 카드로 꺼내 들었던 것도 실은 별 볼 일 없는 일이었어. 알아?
세정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자, 표정이라 부를 것이 사라졌다.
“아버지.”
“또 왜.”
“내가 집에서 가만히 생각해 봤거든요.”
저 너머 어디쯤을 고요히 내다보던 세정의 시선이 낮게 떨어졌다. 바닥에 질질 끌렸다.
어쩐지 숨이 막히는 회고였다.
“……뭘, 이 자식아.”
“몰랐는데.”
“…….”
“나 아버지 닮았네.”
온 생을 걸어 부단히 부정하던 일을 순순히 인정한 세정이 헛바람을 흘리듯 웃었다.
“똑같더라고. 이래서 씨도둑은 못 한다고.”
발칙한 언행이었으나 한규는 심기가 불편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내려다볼 뿐인데 흔들리는 세정의 눈이 몹시 낯선 탓이었다.
“아버지도 엄마 이용했잖아요.”
곤욕스러운 진실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억이 가슴을 할퀴었다. 한규는 불쾌한 눈으로 세정을 쏘아보았다.
“그게 똑같아. 사랑한다면서. 개씨발, 핑계도 안 될 이해타산적인 태도로…….”
어느 시점을 끊임없이 반추하던 세정은 일순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하면 정말 무너질 것 같은 눈으로, 간신히 호흡을 억누르면서.
“사내새끼가…… 그만하면 됐다.”
그 나약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규는 입술을 벌릴 수 있었다.
“널린 게 계집앤데.”
아, 그랬지. 널린 게 여자였지. 여자를 줄 세워 맞선 자리에 골라 앉히던 날들이 있었지.
“병신 찌질이처럼…….”
이보다 저를 잘 표현한 단어들이 또 있을까. 세정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저질렀으면 뻔뻔해야지. 어디 글러 먹은 새끼도 아니고. 거참……. 하나하나 마음 써서 어디 구멍가게나 처운영하겠나. 등신 새끼.”
가릴 것 없는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세정은 하염없이 웃었다.
“그까짓 계집애, 죽어도 무슨 상관이야?”
그러다가 이런 말에는 참지 못해서,
“…….”
세정은 테이블을 가볍게 들어 비어 있는 어딘가로 내던졌다. 그와 부딪친 무언가가 와르르, 붕괴했다.
순간의 굉음이 들리고 발치로 알 수 없는 물건의 파편과 자욱한 먼지가 파도처럼 가득 밀려들었다.
그러나 평온하리만치 고요하게 잠잠해진 세정의 얼굴로는 어떠한 균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삐이―
세정은 이명이 들리는 귀에 신경질적으로 손바닥을 대었다.
“아버지.”
내선 전화가 울렸다.
경고 사이렌처럼 분명하게.
이번에는 칼날 같은 눈이 슥슥, 한규를 토막 내듯 쓸어보았다.
“내가 아버지 닮았다고 했잖아요.”
한규는 이미 베인 것 같은 목을 더듬으며 입을 다물었다. 세정의 눈이 마침내 한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럼 알 텐데. 내가 뭘 욕심내는지.”
내선 전화가 끊어지고 문이 열렸다. 뛰어 들어온 비서진들이 처참해진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세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상체를 숙였다. 가까이서 한규의 눈을 직시했다.
“근데 왜 이렇게 도발하시지.”
“…….”
“패륜아 새끼처럼 당장 뺏고 싶게.”
삐이이―
버틸 수 없는 이명에 세정이 씨발, 귀를 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어디로 갔을까.
백호연이 사라진 지 보름이 되었다.
세정은 거실 바닥에 길게 누워 벽에 걸린 호연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누가 그림에 손을 댔나.
언젠가는 손 뼈마디를 지근지근 밟던 뻔뻔한 사슴 새끼가 한심하다는 듯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정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그 끝으로 허공에 호연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죽고 싶은 마음이 들면 화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렸던 소희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한다.
“살 만하네.”
잔뜩 목 졸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세정은 팔을 늘어트리며 높은 천장을 응시했다.
“살 만하네.”
살 만하다고.
“살 만해.”
살 만하다고.
“살 만한데.”
살 만하다고.
“씨발…….”
백호연 없이도 씨발, 존나게 살 만해.
만에 하나 납치일까, 살아 있다는 것만 알아보았다.
기휘영이 풀어준 백호연은 살아 있대. 어딘가에 잘 살아 있대.
살겠다고 떠났으니 찾지 않았다. 찾으려면 국내든, 국외든 금방 찾을 여자를 찾지 않았다.
세정은 아, 뜨거운 한숨을 흘리며 이곳저곳 남은 호연의 흔적을 눈으로 찾았다.
그것만 찾았다.
……살겠다고 떠났으니 찾지 않았다. 찾으려면 국내든, 국외든 마음만 먹으면 금방 찾을 여자를 찾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가게 될 테니까. 나는 분명 거기에 서 있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어떻게든 살 만해야 했다.
“살 만하네.”
버릇처럼 뇌까렸다.
그러다가 도저히 너 없는 집은 살 만하지 않아서 세정은 머리맡을 더듬었다. 약물 중독 환자처럼 강박적으로 헤집듯이 손을 휘젓다가 어딘가에 손가락이 툭, 닿았다.
세정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호연의 스크랩북을 들어 올렸다.
호연이 버리고 간 것 중에 가장 손때가 많이 남은 물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제 기사를 정리한 스크랩북이라는 게.
기사를 자르고 붙이고 몇 번을 들여다보았을 손과 눈 따위만 반복해 아른거렸다.
그 눈이 저를 올려다봤을 때나 그 손이 제 몸의 어딘가를 짚었을 때…….
삐이―
동반하는 이명은 이제 거슬리지도 않았다.
세정은 다시 스크랩북을 내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어딘가에서 물감 냄새와 호연의 살 내음이 났다.
착각일지라도…….
입맛이 쓴 자각이 온다.
정말 보고 싶은 네가 영영 갔구나.
너는 단지 내 인생에서 도망쳤을 뿐이지만, 네가 의도하지 않았으므로 이곳은 문 닫힌 완벽한 지옥인데.
그런데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버틸 수 있다.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