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사혼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목적 없이 이루어질 리 없는 만찬의 끝은, 사혼식 예고로 맺어졌다.
각자의 속도로 디저트 그릇을 끝내던 와중이었다. 청재는 단단한 한규의 눈길이 제게로 올곧은 걸 알면서도 깨진 그릇처럼 여러 갈래로 나뉜 음성을 내뱉었다.
“……누구랑 누구를요?”
청재는 이 집안에서 결혼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소라뿐이며, 저는 그녀의 약혼자였던 이유로 이 저택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단 사실을 잠시간 까마득히 잊은 사람처럼 맹하게 굴었다.
그래서 한규는 비스듬히 입매를 휘면서 침묵했다.
다 알면서 왜 이래? 하는 눈으로.
“하하…….”
청재는 한숨을 흘리듯 입꼬리만 올려 쓰게 웃었다. 테이블의 가장 끝에 있어 지위 순으로 앉은 사람들의 옆얼굴이 고스란히 시야에 담겼다.
짐작했던 것 그 이상의 일인지, 좀체 놀라지 않는 휘영까지도 대놓고 청재와 한규를 갈마보고 있었다.
청재는 저야말로, 한규에게 다 알면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다.
소라는 여자를 좋아한다.
그 작달막한 여자. 이름이 가은이랬나, 히카리랬나. 소라가 죽고 기한규, 당신이 제 손으로 일본으로 쫓아 보냈으니 치매가 아닌 이상 잊었을 리도 없다.
사혼식이 뭔가. 결혼하지 못한 채로 죽은 이의 넋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위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애도 아니고 갑자기 나를 왜. 소라가 달가워하지 않을 것도 뻔히 알면서.
제가 소라를 죽인 것과 다름없는데, 이 사혼식이 그녀의 위로가 되나? 사혼식을 치르면 세정이 총수 자리에 앉게 되어도 자신은 감히 쫓아낼 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되나.
고작 차장 자리에서 한 칸, 한 칸, 올라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큼성큼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되나.
묘하게 구미가 당기면서도 구린내가 났다. 청재는 더욱 알 수 없고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한규가 아직 범인을 찾아내지 못했구나, 그쯤으로 생각이 번졌다.
좋은 건 좋은 일이고, 나쁜 건 나쁜 일이라.
“청재는 그날 몸만 오면 된다.”
애초에 저도 다른 여자와의 결혼을 꿈꾼 적 없었다. 소라와의 약혼은 길고 지루했으며 때로는 갑갑하기까지 했다.
약혼 기간에도 다른 여자와의 연애와 잠자리가 잦았다. 앞으로도 그리 살 예정이었다. 그러다가 계열사 하나 넘겨받고 쥐 죽은 듯이 지낼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씨발……. 영혼이랑 묶인다는 게…….
제가 죽인 것과 다름없는 여자와 영혼이 섞인다는 게…….
골치가 아팠다.
청재는 이해하기 무거운 충격에 시선을 떨어트리다 오늘따라 유독 존재감이 죽은 세정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세정은 왼손 약지에 채워진 결혼반지를 오른손 엄지로 밀어 돌리는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뭐야, 그 오만한 눈깔 어디 가고 등신 새끼처럼 멍해.
정도가 다른 충격을 나눈 공간에서 세정 홀로 분위기가 달라 이질감이 들었다.
“청재는 나 따라오고.”
근데 이딴 걸 살필 때가 아니지.
세정은 멀어지는 청재의 등판을 바라보다가 일어났다. 평상시에 접어 올려두는 셔츠를 내렸으나 답답한지 습관적으로 계속 끌어올려 드러난 청재의 팔뚝에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다이닝룸을 빠져나가려는데, 송 여사가 부드러이 세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 전무, 얼굴이 많이 곯았네.”
다 귀찮았다. 유심히 얼굴을 핥듯이 보는 시선까지도.
“……그런가.”
세정은 흐린 대답을 내놓으며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사모님은 같이 안 오셨고요?”
세정은 말없이 서 있었다. 제 가슴팍쯤 오는, 나이가 지긋한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생전 소희와도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던 사이니, 같이 늙었다면 그녀도 이 정도의 시름을 주름으로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세정은 눈을 좁혀 송 여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이 많던 소희가 지금껏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걱정 어린 잔소리를 했을까.
또 얼마나 같은 말을 반복하며 똑바로 알아보고 해야 한다, 꼼꼼하게 알아보고 해야 한다, 지겹게도 그랬을까.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건, 당신이었으면서.
“싸웠어요?”
싸우긴.
은근히 물어오는 어투에 세정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눈앞이 울렁거렸다.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다른 건 아니고 반찬인데……. 유성채에 있을 때 좋아했잖아. 가져가서 사모님이랑 같이 드셔. 응?”
송 여사가 건네주는 보따리를 받아 든 세정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아 우스워 보였다.
그런 모습을 어린아이 보듯 두 걸음 물러나 찬찬히 뜯어보는 송 여사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엄지를 치켜드는 꼴에 세정은 바람 빠지듯 웃었다.
“다음에 또 봐요.”
다음에……. 그다음에…….
당신은 또 얼마나 늙어 있을까.
모친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그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싶은데.
그 긴 애정을 감추고 세정은 다시 복도를 아주 천천히, 어둠에 물들 듯이 느리게 걸었다.
붙잡아 사고할 의지도 없는 머릿속으로 생각이 지저분하게 흘렀다.
청재의 팔뚝에 난 손톱자국은 아마 호연의 친구라던 현소예의 발악일 것이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거나. 청재의 애인은 하나가 아니니까.
세정은 느리게 눈을 내리감았다가 다시 떴다.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고도 요즘은 술에 뇌가 전 것 같은 흐리멍덩함 속에 살았다.
모든 계획은 완벽했다.
어느 시점에서는.
늘 모호하게, 애매하게 ‘정답’이라고 말하는 법 없는 과학자들이 어느 순간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또 다른 진실들이 밀려들었다.
전부 통제했다고 생각했으나 아닌 것.
교은을 죽인 그녀의 남편, 종영과 석훈이 계양 실업을 통해 아는 사이였다는 것. 둘 다 계양 실업의 투자자로 운명 공동체였다는 것.
세정은 복도를 지나 현관을 빠져나왔다. 차는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세정은 차에 올라 피곤한 두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집으로 모실까요?”
“네.”
종영이 교은을 살해하는 자리에 석훈도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보험금을 받아 계양 실업에 다시 꼬라박을 생각이었다고. 그러고도 안 되면 다음은 석훈의 아내 차례였다고.
그러나 보험금에 눈이 멀어 치밀하지 못했던 계획은 보육원 아이를 증인으로 남겼고 몰락했다.
그러니까 석훈이 호연에게 전화한 시점은 종영이 잡혀가고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이, 남김없이 좆됐다, 싶어진 그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세정은 왼손 약지에 맺힌 결혼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세정은 눈이 긁히는 기분이었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사람처럼 연신 따갑다가 한순간 초점이 나갔다. 한때의 정신도 그랬다.
계양 실업에 돈을 처박고 있는 또 다른 새끼가 지청재라는 신원의 보고를 곱씹다가 찰나에 정신이 산란해졌다.
돌이킬 수 없다…….
남김없이 좆됐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렇게나 허무하고, 이렇게나 어이없게.
완벽하던 계획이 뒤틀리고 백호연이 무너졌다.
백호연을 생각하면 자주 웃음이 나왔다. 미친놈 같겠지만, 백호연을 미치도록 한 게 자신이라 웃음이 났다.
세정은 짧은 새 버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건조한 눈으로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내렸다.
“이딴 게 사랑이에요?”
이딴 게 사랑이냐 물었고,
주저 없이 사랑이라고 답했던 순간이 떠올렸다.
이딴 게 내가 하는 사랑이야, 백호연 씨.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결국 다 부서지고야 마니까, 진짜 사랑이 맞아.
당신이 바닷물 같았으면 삼켰을 것이고 별 같았으면 따서 가졌을 텐데, 안개 같아 어떻게 그러담아야 할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죽어가는 사람을 붙잡는 방법을, 죽어가는 사람을 다 놓쳤던 사람이 알 리 없다.
“도착했습니다.”
세정은 다시 걸었다. 더운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는 길을 지나 공동현관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지나 문 앞을 차마 지나지 못하고 한참을.
기괴하게 움츠린 나날들이었다.
무너진 세상에서는 작은 움직임도 크게 보이니까. 눈에 거슬리니까. 저를 보면 죽고 싶을까, 백호연의 시야 속에서 숨을 죽인 나날들이었다.
저 대신 의사를 들여보내어 생사만 확인했다. 그대로인 음식이 돌아 나오는 것을 보며 당장이라도 방에 들어가 억지로 먹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게 며칠 지속되었을 때 든 감정은…….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에 대한 절망감이나 허망함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선득한 감정이 내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설령 호연이 죽지 않게 인력을 부리고 있었어도 사람이 죽기 전, 그 예고 없음을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알기 때문에…….
도어 록을 여는 손가락이 굼떴다.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에 세정의 심장이 덜컥, 덜컥, 한 계단씩 내려앉았다.
동시에 핸드폰이 자지러졌다.
세정은 호연의 방문 앞에 쓰러진 사람들을 하나씩 눈에 담았다.
백호연 하나 막는데 셋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 너무 많으면 무서워할 것 같아서.
그랬던 장정들이 모두 고꾸라져 있었다.
세정은 송 여사가 챙겨주었던 보따리를 팽개쳤다. 곱게 싸주었던 반찬통들이 우악스러운 힘에 깨지고 날려 벽이 엉망진창으로 물들었다.
세정은 그 과격한 파열음 위에서 살짝 열린 문을 강하게 걷어찼다.
쾅―
문짝이 떨어져 호연의 서랍장을 덮쳤다. 멀쩡한 것들이라곤 없는 그 위로 날카로운 어떤 것들이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상관없었다.
“…….”
무서워할 백호연은 이미 이곳에 없으니까.
문을 두드릴 때마다 호연이 던진 장식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길목을 두고 옆으로 비켜난 상태였다.
세정은 차마 더 들어가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폐부로 넉넉하게 밀려드는 호연의 향을 가득 머금었다.
삐이―
귓가로 호루라기를 부는 것처럼 끝도 없는 이명이 들렸다.
삐이이―
세정은 귀를 손으로 퍽퍽, 내리쳤다. 미친놈처럼 다시 빠져나가는 숨을 억눌렀다.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금도 놓치지 않도록, 그리하여 영원히 속에 잔류하도록…….
백호연이 사라졌다.
그 말만큼 실감 나지 않는 말이 있을까.
언젠가 백호연이 제 인생에서 도려지리라, 오만하게 생각했던 지난날의 한심함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피아노가 그랬듯 제가 영원토록 지킬 수 있는 건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어야 했는데.
세정은 호연의 침대부터 문까지 호연의 궤적을 눈으로 쓸어보았다.
누구의 손을 잡고 도망쳤는지는 지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만, 당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 집을 나갔을까, 궁금했다. 그저 내게서 벗어나고 싶어서? 살고 싶어서?
그리고 만약 살고 싶었을 뿐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거 하나는 다행이다.
피아니스트의 꿈을 버리는 데는 손 두 쪽이 박살 났다. 이제는 몸의 어디쯤을 박살 내야 너란 꿈을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이 심장을 멈춰야 끝이 날 것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