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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경위서-78화 (78/98)

제78화

호연의 손을 들어 쪼듯 입을 맞춘 세정이 실실거렸다. 잠시 넋이 나간 채로 있던 호연이 빠르게 손을 빼냈다.

얇은 끈을 힘주어 묶어 조금도 틈이 없었다. 풀어내려면 잘라내야 할 정도의 강한 매듭이었다.

“이쪽 선물도 벗기고 싶네.”

“……저요?”

눈길을 피하지 않으므로 긍정하는 세정을 확인한 호연이 소파 끄트머리에 걸쳤던 몸을 깊숙이 묻었다.

“넘어와 봐요.”

어이없다는 듯 호연을 보던 세정이 손을 까딱였다. 제 옆자리로 오라고. 호연은 소파에 뒤통수까지 붙인 채로 간신히 도리질 쳤다.

“싫어요.”

“와보라니까.”

“벗기실 거잖아요.”

“누굴 변태로 보나.”

“아니에요?”

신뢰가 그랬다.

호연은 언젠가 잠이 든 제 입술을 세정이 진탕 빨았던 날을 떠올렸다. 벗기고 싶다고 선언까지 한 상황에서 남자의 곁으로 갔다간 정말 집무실에서 흘레붙을 수도 있었다.

최소한의 도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건 정말 아니었다.

“아직도 선물 안 연 거 아세요?”

세정이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았다. 호연은 급하게 닫혀 있는 선물 상자를 눈짓했다.

“말 돌리네.”

구태여 한 번 더 집어준 세정이 상자를 열었다.

“넥타이핀?”

과거 메르텐의 상징적 로고였던 ‘M’이 우측에 장식된 넥타이핀이었다.

상자 너머로 여전히 괴상한 자세를 취한 채 긴장한 두 눈과 마른침을 꼴깍이는 목덜미가 보였다.

장난을 더 쳐볼까.

울려나.

세정은 지금 착용 중인 넥타이에서 넥타이핀을 빼내었다. 그러곤 호연이 선물한 메르텐의 넥타이핀을 꽂아 넣었다. 이내 옷매무새를 다듬고 팔을 넓게 벌렸다.

“어울려요?”

넥타이핀 하나 바꿨다고 크게 달라진 게 있겠냐마는, 호연은 세정의 그 뻔뻔함이 좋았다. 눈을 접어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마주 웃던 세정은 비어 있는 상자에 원래 꽂고 있던 넥타이핀을 찔러 넣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러곤 아무렇지도 않은 심상한 어투로 툭, 물었다.

“왜 울었어요?”

정말 팔찌라도 되는 것처럼 파란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이 정지했다.

“안 울었는데요.”

생각보다 먼저 나온 습관적인 거짓말이었다. 이에 호연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젠 자각도 하기 전에 거짓말이 나오는구나.

세정은 그런 거짓말이 익숙한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백호연 씨 거짓말도 모른 척해주고 싶은데, 내가 아직 그게 안 되네.”

세정이 눈을 들었다. 허공에서 만난 두 시선이 달라붙었다. 호연은 어쩐지 눈을 피할 수 없는 끈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왜 울었냐고.”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시야에 잡혔다.

발그스름하게 부어 있는 눈매와 어딘지 모르게 침잠한 기류를 덕지덕지 몰고 들어왔던 걸 제가 감지하지 못할 리가. 호연의 모든 것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데, 모르면 그게 등신 아닐까.

모르는 척은 했다. 짧게, 얼마 못 가서 꼭 묻게 된 지금이 문제였지. 밤이 되면 올라올 백호연 뒤에 붙인 이들의 보고서를 못 기다려서.

전과 다른 어색한 정적이 사이를 메웠다.

호연이 뒤집어썼던 가면이 깨졌다.

전보다 파리한 안색의 여자가 두 손을 맞잡고 손톱을 까드득, 긁었다.

어쩌면 말을 하고 싶어서, 알아주길 바라서 다 티가 나는 얼굴로 세정에게 왔던 것 같다고, 호연은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직 생일이 남은 남자를 보러 올 핑계로 선물 전달을 삼지 않았을 테니까.

“……아주머니랑 언니 만나고 왔어요.”

“만났는데.”

왜 백호연 얼굴이 이런 꼴일까.

호연은 가느스름해진 세정의 눈을 마주하곤 직감했다.

남자를 더 속이지도 못하겠다. 꿰뚫듯이 저를 보고 있는 세정도 세정이거니와 제 마음이 그랬다.

세정을 볼 때마다 자꾸 모든 걸 고백하고 떳떳해지고 싶은 마음이 말썽이었다.

남자와 같이 있노라면 이따금 진실들을 잊었다. 그러나 늘 마주한 현실은 이토록 지리멸렬해서…….

죄악감도 없이 거짓말을 일삼는 자신에게 너무 많이 놀랐다.

호연은 그만하고 싶었다. 이러다 형편없이 들키는 것보다는 고백하는 게 나으니까.

호연은 원피스 자락을 공연히 쥐었다가 가만히 놓았다.

옥죄고 있던 고통스러운 마음도 천천히 놓였다. 그렇게 떠나보냈다.

석훈도, 천사보육원도, 민형도, 내 마음까지도 모두 말해야지.

“집에 가서. ……집에 가서 말씀드릴게요.”

문득, 예약해 두었던 파라스 호텔의 케이크가 떠올랐다.

줄 수 있을까.

속 깊은 곳이 울렁였다. 두서없이 발칵, 말해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할 말이 아닌데.

“그래요, 그럼.”

뭉그적거리며 나온 호연의 말에 세정은 더는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나도 백호연 씨한테 알려줄 거 있는데.”

다만 화제를 돌리며 균열이 난 분위기를 간단히 문질렀다.

“……뭔데요?”

세정의 성과로 가득한 유리 장을 멀거니 보고 있던 호연의 시선이 세정에게로 되돌아왔다.

“백호연 씨, 친구…….”

“찾으셨어요?”

말이 끝나는 것도 기다리지 못한 호연이 제 말을 이어 붙였다. 이미 대답을 예상했는지 말갛게 퍼지는 미소가 환했다.

세정은 저릿한 등줄기를 곧게 폈다. 옅은 맥박 소리가 귓가로 감겼다. 기대감이 가득한 눈을 내려다보며 따라 웃었다.

“찾았지, 내가.”

이로써 인정하게 된 사실 하나,

내가 당신 웃음에 꽤 연약해지네.

* * *

호연이 머물렀던 흔적을 신원이 하나씩 치워나갔다. 눌린 소파를 자국 없이 다듬고 세정의 성정대로 테이블 귀퉁이에 깔끔하게 접힌 쓰레기를 버렸다.

그때까지도 세정은 온기가 사라진 소파를 잠잠히 응시하고 있었다.

“……챙겨 드릴까요?”

공손한 물음에 세정은 쥐고 있던 선물 상자를 손끝으로 가늠했다.

“아니요.”

그러곤 일어나 책상 앞까지 걸어갔다. 의자에 앉아 서랍 가장 아래쪽을 열었다.

호연의 인생이, 호연의 사진이, 호연의 연필이, 호연이 그린 제 초상화가 있는 곳에 하나의 상자가 놓였다.

모든 것이 계획된 그림처럼 이어졌다.

“전무님, 지시해 주셨던 대로 전부 이행했습니다.”

신원은 엔마트의 파멸을 앞둔 상황에서도 차분한 세정을 마주했다.

제 아내의 모든 것을 박살 내고도 태연한 남자.

문득 소름이 끼치는 까닭은 그가 너무 무감정해 보이는 탓이었다.

그러나 특이점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신원이 아는 세정은 늘 이런 얼굴이었으니까.

이래야 기세정이었다.

“회장님께서 무속인에게 연락을 취하셨다고 하는데요. 길일을 받아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씀드린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네, 나가보세요.”

신원이 짧게 묵례하고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세정은 핸드폰을 들어 검색 엔진에 ‘엔마트’를 써넣었다.

[단독] 엔마트, 고객 개인정보 유출 및 판매 정황 포착

[단독] 엔마트, 계열사 매각하려다 분식회계 덜미

[단독] 엔마트, 북두 그룹으로부터 계약 불이행 투자금 반환 소송 얽혀

[단독] 엔마트, 하도급 갑질 은폐 및 무마 의혹에 공정위, 현장 조사 나설 예정

[단독] 연이은 악재 엔마트, 역대급 RCPS 상환일 도래해……. 주가는 연일 하한가로 곤두박질

부정적 헤드라인을 단 단독 기사들이 쏟아진 채였다.

여전히 이 결혼에 조금도 손해를 볼 생각이 없다는 말은, 기어코 엔마트를 손에 넣겠다는 말이었다.

세정은 핸드폰을 엎어두고 일어났다. 창가로 걸어가 사라진 호연의 흔적을 눈으로 그려보았다.

이러고 어떻게 가느냐고 리본을 잘라달라고 씩씩거리던 호연은 모를 것이다. 노을 진 저녁 하늘 아래 친구를 본다는 기쁨 하나로 걸어갔을 얇은 발목에 걸린 건 사실 족쇄라는 것.

가까운 친구의 소식, 엔마트의 붕괴 정도면 되었다.

불행과 불운을 겪어야 한다면 제가 선별한 것만을 안겨주고 싶었다.

백호연이 무너지지 않을 만큼만. 저를 떠나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만. 어떤 날 갑자기 죽고 싶지 않을 만큼만.

이 품에서 숨을 쉬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안도할 만큼만.

그래서 이교은의 사망 소식을 전해서는 안 됐다. 강민형이 가짜라는 소식도 아직은 전해서 안 됐다.

백호연의 삶을 통제하고 싶었다. 깊이 관여하고 싶었다.

사랑하니까.

죽지 않길 바라니까.

억류하고 싶었다.

세정은 알았다.

불행과 불운은 빗줄기였다. 비가 그칠 걸 알면 그리 슬퍼하지도, 우산이 있었더라면 젖지도 않는다는 것.

소희는 사랑이 힘이 없던 날, 우산이 없어 죽었고 비가 그치지 않을 걸 알아 죽었다.

그로부터 그치지 않은 빗속에 살게 될 아들도 모르고.

세정은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백호연을 이 빗속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 우산이 아니라 절대자가 되어 그녀의 삶을 둘러싼 불행과 불운을 먼저 움켜쥐고 싶었다.

호연의 거짓말 같은 건 상관없었다. 애초에 더는 관심도 없다.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이라면 기꺼이 속겠다. 진실을 외면해야만 거짓이 완전해진다면 나는 감히 진실도 모르겠다.

세정은 넥타이핀을 느리게 매만졌다. 창에 비친 무기질적인 얼굴에 병력지(病歷紙)가 길었다.

내가 사랑이기에 당신은 무엇이라도 상관없다고. 내 곁에만 있으면 된다고.

합리화하며 다 괜찮다고 입꼬리를 말아 올리는 썩어빠진 결론까지도, 세정은 병적이었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음울한 창밖의 어둠은 소예의 몸을 더 앙상하게 보이도록 감쌌다. 그게 호연을 더 눈물겹게 만들었다.

“이게 다 뭐야…….”

호연은 울음을 터트리며 해쓱한 소예의 뺨으로 손을 얹었다. 그마저도 아플까 봐,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멍든 뺨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다른 곳도 이래?”

아랫입술을 너무 세게 씹은 듯 비린 피 맛이 느껴졌다. 호연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예를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무너지는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물어보지 말걸.

넉넉한 환자복 사이로 엉망진창인 피부가 훤히 보였다. 꽉 쥐어지고 어딘가에 처박히고 두들겨 맞은 흔적들…….

그 보랏빛의 아픔을 알았다.

호연은 주저앉듯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침대 난간을 겨우 잡은 손 위로 괜찮다는 듯 소예의 손이 올라와 토닥였다.

호연은 괜찮지 않았다.

“네가 왜…….”

정말 네가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할까.

소중한 친구였다. 어쩌면 그렇게 상극이면서도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냐고 묻는 말에 질색하지만, 호연은 소예의 사랑스럽고 밝은 성격을 닮고 싶었다.

말해본 일도 없는 제 그늘에 함께이길 바란 적은 없는데…….

떠오르는 학대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자욱했다.

몸이야 낫지만, 앞으로도 내내 고통스러울 마음은 어떡하나. 저는 온전치 못한 기억들로도 아픈데.

“신고는 했어?”

간신히 고개를 든 호연이 소예의 손 위로 제 다른 손을 얹었다.

소예가 괜찮다는 듯이 씩씩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저더러 울지 말라는 뜻임을 알았다. 호연은 심장이 날붙이 끝에 찔린 것처럼 욱신거렸다.

“나 정말 다 괜찮거든.”

호연은 소예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소예는 다시 눈물이 나려는지 턱을 치켜들고 크게 숨을 마셨다. 가쁜 숨이, 미친 듯이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나쁜 새끼 내가 꼭 콩밥 처먹일 거고, 이름에 빨간 줄 긋게 할 건데.”

청재를 지칭하는 단어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부러 힘주어 발음하고 말끝이 덜컥, 무너졌다.

“아빠는 ‘나도’ 잘못했대.”

“…….”

“그게 난…… 너무 서운하고 힘들어.”

소예는 다시 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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