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강민형은 죽었다.
[복지의 사각에서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
단독 기사로도 다뤄지지 않은 죽음이었다.
아동 학대를 다룬 칼럼에 다른 아이들과 피해 아동으로 묶여 등장하는 강민형은 필자가 가장 안타까웠던 사연이라고 소개했다.
[친부에게 맞아 죽은 민형은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고 아주 뒤늦게 발견되어 온전한 시신으로 수습하지도 못했다. 짧은 조사 끝에 도박장에서 체포된 친부는 이미 전과 5범의 잡범이었다.
……
조사 과정에서 그는 아내와 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혼인 신고의 기록이 없는 점, 이에 친부가 침묵함으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고, 주변 이웃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모녀는 야반도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친부는 모든 범행을 순순히 인정했으나 보험금 및 보상금이 따로 없다고 하자, 시신을 포기했다고 한다.
……
아내와 딸의 행방을 계속 추적하던 중 정신병력으로 형이 감경된 친부가 출소 후 도박장에서 아사(餓死)함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필자는 아동 학대의 양형이 자주 집행 유예에 그치는 점, 감경되는 비율이 다른 범죄에 비해 높다는 점을 지적하며 칼럼을 마쳤다.
세정은 서랍장 가장 아래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었다.
백호연의 인적 사항이 적힌 종이 한 장이었다.
그때도 별 볼 일 없이 간단한 인생이라고 쉽게 비웃었던 그 종이 한 장.
여기에도 강민형은 사망이라 적혀 있었다.
세정은 호연의 사진과 그 이름을 표정 없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신원이 사진 몇 장을 내밀며 설명했다.
“가짜 강민형입니다. 이름은 오재성, 남성, 스물아홉이고, 엔마트 대표, 백석훈과 모종의 컨텍이 있어 보입니다. 사모님이 미국으로 출국했던 당시, 오재성 씨도 미국 체류 기록이 있습니다.”
가짜 강민형.
세정은 사진을 한 장씩 넘겨보았다.
호연의 부축을 받으며 산책하는 사진, 한껏 클로즈업된 얼굴 사진. 강민형으로 위조된 서류 사진.
“오재성에서 강민형으로 신분을 세탁했습니다. 한국 신분을 새로 만들지는 않았고요. 미국 신분을 위조한 것으로 보이는데……. 조잡합니다. 대충 눈속임만 해놨어요. 한국에서 개인이 특정인의 신원 조사를 할 수 없는 걸 악용한 듯합니다.”
병원 로비에 많은 돈을 허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세정은 한 장의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 사진 속에서 호연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병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에서 꺼낸 김밥을 재성에게 먹여주는 얼굴에 본인은 이미 하나를 집어먹은 듯 볼이 불룩했다.
그런 얼굴로 웃고 있었다.
“사모님께서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백 대표가 워낙 달변가이며 그 가정 내에서 성장한 백호연 씨는 세뇌…….”
신원의 말이 흐려졌다.
세정은 사진 속 호연의 볼을 쓱, 쓸어보았다. 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사진인데도 불구하고.
“예쁘네.”
“아셨대도 부정하고……. 네?”
무수한 가능성을 언급하던 신원이 입을 다물었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도통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눈길로 ‘예쁘네.’라고 말했던 게 맞나.
“예쁘잖아요, 백호연 씨.”
쐐기처럼 돌아온 대답에 신원은 세정이 만지작거리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포커스는 오로지 재성에게 맞춰져 있어, 오히려 호연의 얼굴은 흐릿했다. 저나 세정은 호연의 얼굴을 알고 있으니 구별 가능한 정도였다.
“네에.”
신원은 얼떨떨하게 대답하며 다시 눈을 들었다. 세정이 사진을 집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입체 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세하게.
그게 꼭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았다. 기세정과는 절대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감정.
“의외롭습니다.”
신원은 엄숙한 얼굴로 입술을 열었다.
“……저는 전무님께서 조금…….”
적당한 말을 찾아 잠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 상사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없었다. 기껏 해봐야, 웃음 정도로 그치는 감정들. 그것도 대부분이 조소 내지는 비웃음이었던 것들.
사랑뿐만이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세정이 낯설었다.
다만, 지금 제가 전한 말들로 세정이 느꼈을 거라 넘겨짚었던 감정은,
“불쾌해하실 줄 알았는데요.”
불쾌감이었다.
백호연은 기세정을 속였다.
혼전 계약서에 기재된 내용은 세정이 ‘엔마트’를 조력하는 것에 국한되어 있었다. 엔마트는 북두 그룹에 제안한 사업을 투자받은 돈으로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그런데 석훈은 돈을 빼돌려 ‘계양 실업’이라는 불분명한 기업에 투자하고, 재무제표에는 고의로 누락하며 그 내용을 수정했다. 또 돈 일부를 천사보육원과 가짜 강민형을 만드는 데 쓴 것으로 보였다.
호연이 동의한 일이었다면 사기 결혼이었다. 동의하지 않았다고 해도 신변에 변동이 생기면 즉각 알려야 하는 조항이 있었다.
호연이 졸업 이후 미국 여행을 가서 민형과 만났다고 추정되는 시점이 결혼 종료일 이전이므로 민형의 생사를 세정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다.그러나 알게 된 이후로도 침묵하였으니 문제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니 신원이 아는 세정이라면 당연히 불쾌해하는 게 맞았다. 북두 그룹의 캐치프레이즈인 ‘정도경영(正道經營)’을 내건 것도 세정, 본인이니까.
호연에게 사람을 붙인 것도 다 같은 맥락이 아니었나?
“결혼 연장 사유도 ‘배우자의 심경 변화’라고 전달하셨었죠.”
세정은 살짝 눈썹을 들어 올렸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계약서의 효력이 다하기 전, 세정은 계약 결혼의 연장을 지시했었다. 사유는 ‘배우자의 심경 변화’. 기간은 양측 협의로 변경되었다.
신원은 세정이 낯설게 느껴지던 순간을 차분히 되짚었다.
호연에게 다시 사람을 붙이라고 했을 때. 호연의 동창인 고진오를 떨어트리라고 했을 때. 피아노 연주회 티켓을 챙겼을 때. ……휘영을 팼을 때.
신원에게는 세정을 보필할 의무가 있었다. 어떤 누구보다도 세정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길 빌었다.
세정의 오랜 꿈이 신원의 오랜 염원이었다.
세정은 불쌍한 사람이니까.
모친이 목매달아 죽은 걸 두 눈으로 보고, 여동생이 제 탓에 죽었다고 죄책감을 안고 살고, 결국은 손가락까지 박살 내며 모든 퇴로를 차단한 채 그 죽음의 진실만을 파헤치려고 드니까.
세정은 고요하게 미친 사람이었다.
사랑을 주고받아 본 적 없는 이런 사람에게 사랑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위험했다.
비단 세정에게만이 아니라 호연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전무님, 주제넘습니다만, 사모님께서 전무님을 사랑한다고 하셨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세정은 조금은 나른한 듯이 눈을 풀었다. 신원은 그 표정이 경고의 신호임을 알았다. 또한 긍정이라는 것도.
세정이 북두 그룹으로 들어온 이후의 행보는 모두 소라의 사인을 밝혀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겨우 그 끝이 보이는데…….
지난 이 년 간,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 두 사람의 사이는 사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백호연 씨가 전무님을 좋아한다는 말은 거짓에 가까울 거라고. 그러니까 엔마트를 무너트려 인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압니다.”
말하려고 했다.
세정은 여느 때보다 평이한 어투로 말을 내뱉곤 웃었다.
“나도 알아요.”
그 말을 듣는 신원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일그러졌다.
“……전무님.”
“나는 여전히 이 결혼에 조금도 손해 볼 생각이 없어요.”
무슨 말이지?
신원의 얼굴이 천천히 다시 펴졌다.
세정은 호연의 사진을 엎으며 명료하게 말했다.
“지금부로 엔마트에 계약 불이행 및 사기로 투자금 반환 소송 걸어요. 엔마트가 가진 모든 의혹 터트리고 돈 융통할 곳까지 다 끊으세요.”
당황한 신원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네? ……네.”
“계양 실업 추가 정보 입수 시 즉각 보고해 주시고.”
“……네.”
“천사보육원 원장, 이교은 씨 사망 건은 백호연 씨랑 백 대표 귀에 안 들어가게 하시고.”
“네.”
“백호연 씨 보호 인력 늘리세요.”
몰아치는 상황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 신원이 끝내 흐린 눈을 깜빡였다.
똑똑―
짧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비서실 소속 전동현 대리였다.
“전무님, 사모님 오셨는데요. 안으로 모실까요?”
지금 이 상황, 나만 이해 못 한 건가.
신원이 멍하니 동현을 돌아보았다.
* * *
호연은 다소 서툴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밀었다. 세정은 붉은 기가 어린 호연의 눈매와 어쩔 줄 모르는 손끝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곤 제 앞으로 놓인 선물 상자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내 선물이에요?”
“네.”
“왜? 갑자기.”
세정은 검은색 포장지 위로 묶인 파란색 리본 끄트머리를 손가락에 말아보았다.
“곧 생일이시잖아요.”
“아.”
모친이 살아 있을 때나 챙겨보았던 생일이 이때쯤이었던가.
생년월일을 모르는 건 아니나 생일이라고 하면 조금 생경해지는 날짜를 떠올렸다.
이맘때였지.
“포장은 직접 했는데……. 해달라고 할 걸 그랬어요.”
곁눈질하는 호연의 얼굴이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생일을 챙기는 편은 아니지만,
“귀여운데.”
나쁘지 않네.
세정은 피식, 웃으며 선물 상자를 들어보았다. 호연은 눈이 마주치자 금세 다른 곳을 내다보았다. 세정이 다시 한번 바람 빠지듯 웃었다.
“백호연 씨 생일이 1월이었던가.”
그맘때쯤 신원이 결재 서류를 올렸던 것 같다.
“아, 그건 그냥……. 등본상 생일이고요. 원래 생일은 몰라요. 원장님께서 하신 거라.”
“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호연의 표정이 의연했다. 세정은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눈을 내렸다.
“열심히 골랐어요.”
호연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선물 상자였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짐작이 어려웠다.
궁금한데도 풀기는 아까운 기분.
내용물을 알기 전, 설레는 마음이 좋아 풀지 않고 오래도록 두었다는 누군가의 말을 이제 공감한다.
“안 열어보세요?”
“아까워서.”
“아……. 그래도 열어 보셨으면 좋겠어요.”
“선물 또 해준다고 약속하면.”
또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중을 약속한다.
호연은 빠르게 잡념을 지워버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카드로 사도 되고.”
가진 카드를 다 줄 것처럼 말한 세정이 리본을 당겼다. 애초에 강하지도 않았던 매듭이 쉽게 풀렸다. 그러곤 포장지를 벗겨내는데, 상자 위로 ‘메르텐’ 로고가 보였다.
“커프스 링크?”
열어 보면 당장 알 수 있을 텐데. 세정은 두 눈을 굴리며 물어왔다. 고작 이런 선물에 눈을 빛내는 세정이 낯설어 호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커프스 링크 선물해도 안 하고 다니시잖아요.”
“말했잖아요, 아깝다고.”
“…….”
“보고만 있어도 아까운데.”
반쯤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선물 받은 것을 한참 잊고 지냈고 눈에 들어온 이후에는 호연에게 마음이 있어 아까웠다.
“그럼 이것도 아까워서 안 하고 다니실 거예요?”
“보고. 시계인가?”
“……저 그 정도로는 돈 없는데요.”
“내가 백호연 씨 재력을 과대평가했네.”
호연이 표정을 굳히자, 세정이 손을 들어 미안, 했다. 나름 서늘한 적막이 웃겨 호연은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음…….”
“비싼 건 아니에요. 주신 건 되게 비싼 건데, 열심히 고르기는 했어요.”
주절주절 말이 이어졌다.
세정은 가격대를 고민하며 리본이었던 파란색 끈을 양손으로 당겼다. 그러곤 호연에게 손을 내밀어 손, 그랬다. 가벼운 명령에 호연이 세정의 손 위로 제 손을 포개었다. 그 손을 세정이 테이블에 두었다.
“뭐……. 팔찌인가?”
“……적중률이 왜 그래요?”
“보기가 있었으면 맞혔을 건데, 내가 주관식엔 자신이 없어서.”
“거짓말이죠?”
“진짜라니까.”
세정은 웃으며 호연의 손목에 파란색 끈을 감쌌다.
뭐 하려는 거지.
잠자코 지켜볼 때였다.
“시계보다 비싼 선물.”
호연의 손목에 리본이 묶였다.
“안 봐도 이 선물이 좋을 거 같은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