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요지는 그랬다.
석훈이 생활비를 주지 않는다고. 며칠씩 밖을 떠돌다가 집에 잠깐 들어왔다가 정신없이 화내고는 다시 훌쩍 사라진다고.
길거리에 흩뿌려진 명함판으로나 봤던 하급 사채업자들이 집을 디밀고 들어와 깨고, 부수고, 돈이 되는 걸 가져가는 꼴을 지켜보다가 지금 네 앞까지 도망쳐 온 거라고.
그래서 돈을 조금만,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빌려달라고.
희끗희끗한 흰 머리칼은 연실이 주억일 때마다 한 움큼씩 쏟아져 내렸다.
그게 아빠 탓에 늘 어딘가에 돈을 빌리고 다녔을 엄마를 떠오르게 했다.
엄마도 이렇게 빌었겠지. 엄마도 이렇게 사정했겠지.
닳고 닳은 무릎 관절이 시큰한 게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로 수도 없이 꿇어앉았겠지.
호연은 당장 융통할 수 있는 돈이 얼마쯤 되나, 생각했다.
“이러지 마세요. 언니도 임산부가 찬 바닥에 앉아 있으면 어떡해.”
모든 것을 다 포기한 것처럼 주저앉은 여진의 상태도 걱정됐다.
호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제 앞을 막아오는 연실 탓에 도로 앉았다.
호연이 가 버릴까 말했던 사정을 또다시 반복하는 연실의 손끝이 벌벌, 애처롭게 떨렸다.
“생활비만, 호연아. 카드가 다 정지돼서 그래. 내가 지금 어디에 가 있을 수도 없고. 여진이는…….”
여진이는.
마른침을 삼킨 연실이 여진을 바라보았다. 아직 부풀지 않은 배를 쓸어내리는 여진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여진은 고르고 골라 적기를 맞추어 귀하디귀한 집에 시집보낸 자식이었다. 여진의 말마따나 어려운 사돈댁이기는 하나 손이 귀한 집에 아이를 낳아주면 평생을 대접받는 인생이 보장될 거였다.
그런데 친정이 기울고 사위에게 손을 벌리면 여진의 입장이 뭐가 되나. 모자랄 것도 없는 여진이 남편에게 굽히고 들어갈 그 자체가 평생을 석훈에게 굽히고 산 제 인생을 답습하는 것 같아 싫었다.
연실의 입술이 결연하게 다물렸다.
호연에게는 그 모습이 절망적이었다.
정말 나는 무엇도 아니었구나.
이 년 전, 상처 난 목을 보고도 외면하던 그때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순간에도 여진이 있었지. 오래된 깨달음이 다시 모든 생각을 밀어버리며 들어왔다.
십여 년을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부르며 살았어도 늘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여전히 가장 좋은 순간에는 여진을 챙기고, 가장 나쁜 순간에는 나를 찾는구나.
여진에게 묘한 감상을 받았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목이 뜨거워졌다.
누가 누굴 걱정하고, 누가 누굴 안쓰러워해서……. 제가 여진보다 꼴이 더 낫지도 않으면서.
“부탁할게, 호연아.”
말을 잇는 대신 한 무릎 다가온 연실이 호연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느껴지는 것을 확인했다.
다이아몬드가 빼곡하게 박힌 발찌.
연실이 눈을 깜빡거리다 발목 쪽으로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놀란 호연이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이익―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차처럼 기이한 소리가 공간을 갈랐다.
도와줄 능력이 없지도 않으면서. 연실이 입술을 달싹거리다 참지 못하고 침처럼 내뱉었다.
“너 정말 너무한다, 호연아.”
눈물이 번진 볼을 손날로 밀어 닦는 연실의 어투에 원망이 찐득하게 묻어났다. 연실은 무릎을 꿇은 그대로 호연의 허벅지를 찰싹, 내리쳤다.
“여유 되면 도와줄 수도 있지! 네가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안 갚는다니? 갚을게, 호연아. 응? 내가 너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고……. 미술은 또 돈이 좀 들어? 그리고 너 하나 양육하겠다고 천사보육원에, 느이 오빠에…….”
종내 연실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기어 온 여진이 연실의 어깨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며 원망의 눈초리를 호연에게 쏘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연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던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호연은 두 주먹을 말아 쥐며 꾹꾹, 진심을 눌러 말을 뭉쳐냈다.
“키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화목한 가정 내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도, 미술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천사보육원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오빠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빠짐없이 감사드려요.”
연실의 두 눈으로 징그러운 희망이 그득그득 차올랐다. 그으래……. 길게 맞장구를 친 연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모든 감사는, 이미 예전에 끝난 거예요.”
“…….”
“그게 끝인 거예요.”
“……호연아.”
“한 번도 저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으셨잖아요. 근데 이제 와서? 매번…… 이제야 와서……?”
호연은 두 눈을 찡그리듯 웃었다. 얼핏 눈앞이 흐려졌다가 개었다.
연실이 했던 부탁에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게 이 관계의 과거고 현재고 미래였다. 제가 예전에도 속한 적 없고 지금도 속한 적 없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
“가족, 가족이지! 호연아!”
“백호연……! 진짜 이럴 거야? 언니가…….”
사위어가는 음성을 등진 채 호연은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모퉁이를 돌아 아무도 없는 곳에 다리가 꺾여 서럽게 울었다.
떠나는 용기가 머무는 미련을 넘어서는 시절의 범람이 고통스러운 마음을 비워줄 거라 믿었다.
* * *
“사람을 나이스한 반병신으로 만들어놨네…….”
말끔하게 올라간 휘영의 머리칼 아래로 부푼 눈두덩이와 피멍이 든 뺨, 터진 입술을 차례로 확인한 청재가 중얼거렸다.
담당의가 부재했던 탓에 병원으로 직접 행차하게 된 한규의 뒤를 따른 건 그와 친밀한 가족들뿐이었다. 방계나 저와 같은 애매한 사람들은 저택에 남았었다.
그래서 직접 보지 못한 주먹질이었다.
기껏 해봐야 얼굴에 상처 두어 개 주고받고 끝났을 줄 알았던 게 꽤 심각했다. 구내식당에서 본 세정의 얼굴은 멀쩡했는데.
기휘영은 무슨 꼴이…….
청재는 소파로 가 앉으며 휘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처음 휘영의 모친을 보았다. 그러니까 한규의 상간녀 출신 동거녀. 그 여자도 기세정이 두드려 팼다던데.
진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돌연, 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무속인의 형형한 눈깔이 떠올라 청재는 눈매를 구겼다.
미신을 딱히 믿는 건 아니었으나 상황이 자아내는 분위기라는 게 있었다. 이상하게 저를 겨냥한 것만 같은 고압적인 대치가 계속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거기다 무속인의 시선이 그쪽에서는 보일 리 없을 텐데, 자신을 보고 있던 기세정의 눈까지.
단순히 우연일까?
“아, 왜 왔는데.”
점점 골똘해지는 청재에게 휘영이 짜증을 내며 물었다.
괜히 나한테 신경질이야.
잡념에서 빠져나온 청재는 사납던 인상을 부드럽게 누그러트리며 사람 좋게 웃었다.
“회장님 안부도 궁금하고. 병가 냈던 기 이사 걱정도 되고.”
“퍽이나.”
‘퍽’이나인지, ‘Fuck’이나인지, 그 둘 다인지 헷갈렸으나 부정적인 뜻인 건 알겠다.
“회장님은 괜찮으셔?”
“몰라.”
“씻김굿 했으니까 다음은 없겠지?”
“모른다고.”
계속해 이어지는 성의 없는 답변에 청재는 올려두었던 입꼬리를 떨었다.
따지고 보면 휘영은 저와 피차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한규의 눈에 나면 끝. 기세정이 총수 자리에 앉으면 끝.
그런 주제에 씨발…….
“야.”
청재가 앉았던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책상 위로 팔을 올려 턱을 괴고 있던 휘영이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너는 기소라가 사고사 같냐?”
청재는 손등을 쓸어내렸다. 이내 소파 깊숙이 몸을 묻고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를 흉내 냈다.
“……사고사라니까 그런 줄 알고 있는 거지.”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휘영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가 내리며 눈매를 풀었다. 그러곤 톡톡, 제 볼을 검지로 두드렸다. 잠시간 깊은 생각에 빠진 것처럼.
“왜, 갑자기.”
“…….”
“네 말은 뭐……. 사고사가 아니면 자살, 타살. 그런 얘기 하는 거야?”
풀어졌던 휘영의 초점이 돌아와 청재를 움켜쥐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청재는 아랫입술을 핥아가며 휘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자신을 직시한 동공에 태연한 척 표정을 꾸몄다.
“그러면 어떨 것 같은데?”
휘영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얼굴로 되물었다.
몇 번이고 혀로 단어를 뭉쳤다가 허물어낸 청재는 보이지 않는 입술 속살을 깨물었다.
“범인을 찾아야지…….”
“찾아서?”
“……조져야지.”
“같은 생각이야.”
휘영이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 * *
여기도, 저기도 기소라 때문에 미친 게 틀림없다.
청재는 엘리베이터에 혼자 남자마자 치를 떨었다.
“아니, 씨이발……. 갑자기 다들 왜.”
그나마 다행인 건 휘영이 범인을 저로 의심하지 않는 것일까.
죽은 지 한참 된 기소라다. 별다른 증거가 발견된 것도 아니고, 발견될 수도 없는 것으로 안다.
그때 한규가 사건을 덮지만 않았어도 모호하게 끝나지 않았을 거였다. 더없이 깔끔하게 ‘자살’로 끝맺음 되지 않았겠느냐고.
목적지는 속초의 별장. 제 조부인 명균에게 모든 걸 고백할 생각.
그 생각을 모르면, 가족이 반대하는 파혼과 동성 간의 연애. 마약. 빗길.
서사가 충분했잖아.
“존나 허술하게 처덮어 두니까 아무나 들쑤시는 거 아냐, 좆같게.”
화를 못 이겨 발을 크게 구른 청재가 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머리칼을 뒤섞었다.
“뭐가 씨발 억울해서…….”
깊이 따지고 보면 제가 죽인 것도 아니었다. 자신은 소라에게 마약을 적정량 이상 주사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사인은 사고였다.
근데 꼭 그 순간 죽으려고 작정한 애처럼 죽었어.
“몸이 이상했으면 씨발……. 멈췄어야지.”
애초에 별장에 가는 것이나 막을 생각이었다. 죽을 줄은 몰랐다고.
청재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제 옆에 소라를 그려 넣었다. 꿈에도 잊히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왜? 나 네 말 다 녹음하고 녹화했어. 네가 나한테 마약 주사하고 먹이고……. 그리고 북두에서 에트 주식회사에 돌려줘야 하는 돈, 네가 어디 투자해서 날려먹은 것도…….]
시뻘게진 눈으로 서툰 한국어 대신 영어로 악을 쓰던 작은 체구가 떠올랐다.
“청재, 부탁할게.” [나 정말 아무 데도 말 안 할 거야. 정말이야. 그냥 파혼만 해주면……. 난 그 애 사랑해.]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가며 빌던 마른 입술이 떠올랐다.
몇 년을 기다려온 결혼인데,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며 엎자고. 줄줄이 딸린 누나들 탓에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저를, 그저 내팽개치겠다고.
[너 때문에……. 너 때문에 내가, 손이…… 이래. 손이 이렇다고!]
흔한 마약 부작용이었다. 손이 떨리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시끄럽게 땍땍거리기에 몇 번 놔주었을 뿐이었다. 섹스한 척 교묘하게 사진을 찍고 소라의 애인에게 전송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누가 지랄하래?”
그 모든 것을 밝히겠다고 지랄하지만 않았어도 이 꼴은 안 났을 텐데.
청재는 지금도 등 뒤에서 저를 노려보는 것 같은 소라의 환영에게 눈을 맞추었다.
저와 결혼하고 그 여자와는 연인 사이를 유지하랬더니 그것마저 거부했던 건 소라, 본인이었다. 어차피 한국에서는 결혼도 못 하는 거.
사고 후 한규가 손을 뻗쳤을 때부터 조졌다고 생각했다. 괜히 씨발, 이상한 죄책감을 느껴선…….
청재는 한규가 쓰러진 이후에 쫓아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던 2층, 소라의 방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경호원들을 물리고, 도어 록을 해제하고, 열쇠가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제 말을 녹음하고 녹화했던 증거가 있어도 거기 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까.
“넌 죽어서도 평생 내 뒤나 따라다니는데, 그치.”
억울하면 씨발, 내 꿈에나 찾아오지.
노려보는 소라의 환영을 향해 길게 웃은 청재가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주한 동료들에게 눈인사를 건네었다.
지청재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