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 경위서-73화 (73/98)

제73화

“어디 아프세요? 몸 안 좋은 거예요?”

여자에게서는 물감 냄새가 난다. 때로는 옅은 수채화 물감, 때로는 진한 유화 물감. 그게 그날 여자가 그리고 온 게 무엇인지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근데 오늘은 왜 꽃이야.

세정은 자신을 떠받든 호연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없이 어떻게 살까.

한순간 흡연 욕구를 억제하는 이 체취 없이 어떻게 살아.

그날 병원에서 벌벌 떨던 호연의 멍한 눈에 번지는 혐오감을 본 이후로 여자가 없는 삶을 연습했다.

혐오감을 느끼는 상대와 어떻게 같이 살아. 너도 목적한 것을 이루고 나도 이루면 한시라도 빨리 끝을 내야지. 원래 그러기로 했었지.

바쁜 일정 속에 파묻혀 살았다. 찾아온 호연을 거짓말로 물리고, 부러 외면해 가면서. 집 대신 집무실과 한규의 병실만 오고 가면서.

어렵지 않네.

삶에 원래 없던 여자 지워내는 것 생각보다 간단하네.

그랬는데,

오만했나.

모르겠고.

모든 결심이 무상해짐을 느낀다.

안 봤어야 했는데, 봤잖아.

이미 연습은 실패잖아.

세정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뒤쪽으로 주춤거리는 호연의 몸에 짓궂게 더 무게를 실었다. 그러곤 혼잣말인 듯 속살거렸다.

“나 방금 백호연 씨 생각 했는데.”

“……네? 아, 잠시. 잠시만요. 무거워요.”

“난 좋은데.”

“아니, 좋으시겠죠. 근데 위험하고…….”

쫑알거리는 그 입술이 귓불에 여러 번 스쳤다. 투정 어린 말들이 나올 때마다 온온한 숨결이 귓가를 감돌았다.

그게 더러운 말들을 씻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꽃 구겨진다니까요…….”

꽃?

더는 안 되겠다는 듯 가슴을 밀어내는 호연의 뜻에 따라 세정이 몸을 바로 세웠다.

푸른 델피니움 몇 개가 한쪽으로 쏠려 목이 꺾였고 하얀 플로드지도 흐트러져 있었다. 이에 호연의 걱정스러운 손길이 여기저기 닿았다.

그러나 도통 원상태가 될 것 같지 않은지 울상을 지었다.

세정은 목이 부러진 델피니움 하나를 완전히 끊어냈다.

“아, 뭐예요!”

놀란 호연의 앞에서 빙그르르, 돌려보았다.

“회장님 거?”

그렇다면 빼앗을 생각이었다.

“……기세정 씨 거예요.”

근데 빼앗지 않아도 내 거네.

세정의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에서 돌아가던 델피니움이 움직임을 그쳤다. 마찬가지로 빙그르르, 웃던 세정도 의외라는 듯 눈썹을 살짝 올렸다.

“나, 왜요?”

“…….”

호연이 잠깐 우물쭈물 망설였다.

“나 뭐 전시도 안 했고, 회사도 축하할 만한 일 없고.”

세정은 무심하게 시간을 돌아보았다.

“아, 뉴웨이브 M&A. 근데 이건 아닌 얼굴인데?”

기억의 조금 더 뒤편을 더듬어 본 세정이 눈을 내려 호연의 표정을 가늠했다. 그러곤 정답이 아닐 것 같은지 음, 하고 말끝을 늘였다.

“난 전혀 모르겠는데.”

호연의 뺨을 톡, 쳤다.

“말해줘요.”

그냥…….

말끝을 흐리려던 호연은 그냥 없이 대화할 수 없냐던 남자의 타박이 떠올라 다시 입술을 닫았다. 가만히 말을 골랐다.

“오늘 연주회 다녀왔거든요. 저번에 초대장 주셨던 거.”

“아.”

그게 오늘이었어도, 내일이어도, 기실 어제였어도 상관없다는 듯 고저 없는 탄성이 터졌다.

“근데 그거랑 나랑 뭔 상관이지.”

냉담한 문장치고는 상냥한 어투였다. 세정은 호연의 뺨으로 델피니움을 둥글리며 웃었다.

보름 만에, 그것도 제가 신원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면 더 오랜 시간을 그저 흘려보냈을 세정이 뻔뻔한데, 호연의 심장은 자존심도 없이 뛰었다. 웃는 얼굴로 자꾸 눈길이 갔다.

겨우 말을 정리했다.

“피아노 계속 쳤으면 오늘 같은 날 꽃다발이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이 받았을 것 같아서요.”

“백호연 씨가 내 실력을 과대평가하네.”

“피아노 연주하는 영상, 봤어요.”

일주일간 내내 봤다고. 관심도 없는 피아노 협주곡을 종일 들었다고.

“잘 치죠?”

과대평가라는 말은 떠보기 위함이었다는 듯 세정이 애처럼 웃었다. 호연은 잠시간 홀린 듯 그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아프게 끄덕였다.

“그렇다고 꽃다발이 발에 차일 정도로는 못 받았을 건데.”

세정은 망가진 꽃다발을 가만히 보았다. 이런 꽃다발이 넘치도록 많았던 시절이 있긴 했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귓가로 들려올 것만 같은 익숙한 드뷔시의 선율을 피해 세정이 눈을 깜빡였다.

“사실 연주회는 안 들어갔어요.”

다시 시선을 옮겨 호연을 보았다.

“기세정 씨가 피아노를 떠올릴 때면 애틋해하는 게 질투가 나서요.”

이해하지 못한 듯한 세정의 얼굴에 호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이어 말했다. 시야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어렵게 세정에게로 고정했다.

이기적이지만, 호연도 더는 참을 수가 없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꽃다발 주고 싶었어요. 꽃다발을 받은 기억이 피아노를 치던 시절에만 그치지 않게…….”

“아.”

세정이 흐리게 대답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푸른 델피니움만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날에 아무것도 아닌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꽃다발을 안겨줬다고. 그렇게 피아노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하나라도 다른 기억으로 덮고 싶었어요.”

낮은음을 느리게 타건하는 것처럼 고요한 진심이 귓가에 닿았다.

세정은 그게 낯설었다.

아주 오래전, 피아노를 사랑하게 되었던 날에 가슴을 울리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는 찬사를 들었던가. 그러곤 한 번도 스스로 전율하지 않았으나,

……이제야 뛰었다.

돌이켜 볼 필요도 없는 사랑이었다.

동시에 빠근하게 공명하는 가슴으로 숨이 턱, 막혔다. 그 막막함과 아득함이 한 번에 와락, 무너졌다. 발밑이 꺼진 것처럼 눈앞이 캄캄해졌다.

연주가 끝나고 리사이틀 홀에 홀로 남겨진 것처럼.

세정은 그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삶을 가만히 헤아렸다.

삶이 하나의 곡을 작곡하는 일이라면, 그래서 지금도 어느 악절의 음표를 빼곡하게 그려 넣는 중이라면…….

끝내 악보를 무시하고 엉망진창으로 내달리는 이런 가슴이라면…….

“누가 아무것도 아니래.”

너를 안는 것도 큰 오기(誤記)는 아니겠지.

세정은 끊어낸 델피니움을 호연의 귓가로 꽂아주었다.

호연의 눈이 사정없이 요동쳤다. 자잘한 떨림으로 바르작거리는 손에 의해 플로드지가 바스락거렸다.

세정은 아무런 뜻 없이 웃었다. 그 얼굴을 보던 호연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난 이제 꽃다발 보면 피아노가 아니라 백호연 씨 생각날 것 같은데.”

세정은 불쑥 상체를 숙여 호연의 입술을 훔쳤다. 짧은 입맞춤 끝에 숨결이 닿는 간격을 유지하며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사랑한다고.”

그 말에 호연이 서럽게 울었다.

* * *

“왜 울었어요?”

벌써 다섯 번째 물었다.

호연은 생선 살을 젓가락 끝으로 짓이기며 세정을 노려보았다. 세정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식사나 하세요. 평소에는 식사할 때 말 한마디도 안 하더니…….”

“그게 섭섭했어요?”

“아니……!”

가로챈 말에 호연이 발끈하며 입술을 열었다. 그 안쪽으로 참치가 한가득 들어왔다. 호연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자, 세정이 크게 웃었다.

“씹어요.”

“씨이…….”

호연은 울상으로 참치 살을 씹어 넘겼다. 오랜만에 찾은 달채인데, 세정이 먹는 것보다 제가 먹는 게 많았다.

세정은 또 한 번 참치를 집어 호연의 입 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를 받아먹고 볼을 붉혀가며 씹는 호연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보았다.

“안 드세요?”

“난 조금 졸려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도 평소보다 느렸다. 살이 내린 것도 같고…….

찬찬히 세정을 뜯어보는 호연의 눈에 걱정이 스몄다.

“잠은요?”

그를 확인한 세정은 부러 눈썹을 모으며 행동을 꾸몄다.

“못 잤죠.”

시시각각 심각하게 굳어가는 호연의 표정이 재밌었다.

“……밥은요?”

“한 끼?”

경악스러운 눈이 됐다. 세정은 고개를 숙여 웃었다.

호연이 급하게 주변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세정에게 손을 뻗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면요?”

“집 가서 자요!”

“그럼 나 밥은요.”

“지금은 배 안 고프잖아요. 잠 그렇게 안 자면 큰일 나요.”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까지 보이자, 세정은 고개를 젖혀 크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호연은 그 웃음을 이해할 수가 없어 손을 잡으라고 흔들었다.

마침내 세정이 그 손을 잡았을 땐,

“괜찮겠어요?”

“…….”

“집 가면 백호연 씨가 큰일 날 거 같은데.”

익숙한 예감이 몸을 휘감았다.

* * *

전제는 반쯤 틀렸다. 집은 가지도 못했으니까.

주말 서울의 한복판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세정이 핸들을 돌렸다. 그러곤 도착한 호텔은 그가 제 손으로 이룩한 파라스 호텔도 아니었다.

K 그룹의 K 호텔.

괜찮냐는 호연의 물음에 세정은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그랬다.

가릴 처지가 아니라고…….

그렇게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욕실에서…….

욕조에 가득 담긴 물이 출렁였다. 허리가 들려 수면 위로 드러난 뽀얀 가슴이 세정의 손에 일그러졌다.

“하…….”

귓불을 잘근거리던 세정은 호연의 골반을 누르며 제 쪽으로 당겼다. 호연은 엉덩이로 느껴지는 생경한 부피감에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포기했다.

등줄기로 단단한 살결이 닿았다. 욕조에 가득한 물보다 홧홧했다. 호연은 제 다리 옆으로 뻗은 세정의 두 허벅지를 짚었다.

그러곤 세정이 가슴을 쥐지 못하도록 다리를 접으며 기대자, 세정은 손을 뻗어 호연의 무릎까지 쉽게 다 안았다.

그게 좀 터질 듯이 벅찼다.

“백호연 씨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나.”

욕실은 자그맣게 말해도 크게 들리는 특성을 가졌다.

호연은 진동하는 말에 귀가 간지러웠다. 살짝 턱을 당기며 오랜 시간 그저 부유했던 말들을 더듬었다.

남자의 여동생이 그를 사랑했다는 것이나 남자가 여동생을 죽였다는 것.

몸을 결속한 남자의 팔 근육이 표정을 바꾸었다.

호연은 그 팔뚝에 돋아난 핏줄을, 갈라진 근육을 보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없어요.”

내가 아는 남자는 그럴 리 없다.

호연은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단단했던 믿음이 부유하는 말들을 어딘가로 흘려보냈다.

“있을 텐데.”

세정이 조금 더 압박하듯 팔을 조였다. 호연은 제가 말하지 않으면 휘영이 제게 헛소리를 한 걸 세정이 모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불편해진 몸을 살짝 비틀면서 다시 없다고, 대답했다.

“내가 내 동생 죽인 게 맞는지.”

“…….”

“내 동생이 날 사랑한 게 맞는지.”

호연이 세정의 몸에서 제 몸을 떼어내고 돌아보았다. 세정이 짧게 입을 맞췄다. 호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나는 모르는 게 없지.”

본인 마음도 몰랐으면서…….

호연은 고집스럽게 앞을 보면서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잖아요.”

“어떻게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 사실이 아닐 거라고 믿는 것보다는, 기세정 씨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믿어요.”

잠시간 뒤에서 말이 없었다. 호연은 무릎을 끌어안은 남자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죽, 쓸어보았다. 더운 숨이 목덜미로 쏟아졌다.

“백호연 씨는 사람 너무 믿지 말고.”

“기세정 씨도 믿지 마요?”

“백호연 씨 인생에 내가 제일 나쁜 놈일 수도.”

뇌까리듯 말하는 걸 되물으려는데 동시에 엉덩이를 짓누르던 양감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뭐예요?”

“좆?”

몰라서 묻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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